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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느니라 (눅 24: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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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정필도 목사

18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19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20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21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지가 사흘째요 22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장례를 치르는 동안 갑자기 죽었던 사람이  다시 일어나는 바람에 사람들을 화들짝 놀라게 했다는 소문이 퍼지는 경우가 혹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소에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과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마 16:21,17:22,20:18).
과연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이 놀라운 소문은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적어도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다 알 정도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보면, 이때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는  우연히 동행한 사람으로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 물음에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라고 대답하며 의아해 했습니다. 이들의 대화로 미루어 볼 때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글로바라 하는 제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고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제자의 말에 몇 가지 문제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그저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로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문을 들었으면서도 그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시면서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시며,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들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기록된 자신에 관한 것들을 그들에게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우리 가운데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처럼 믿음이 없어서 마음에 더디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또 한가지 문제점은 이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걷고 있었으나,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마침 목적지에 가까이 왔을 때 예수님은 더 길을 가시려고 했습니다. 이에 이들은 “해가 다 저물었고 날이 이미 기울었으니 묵고 가시라”고 강권하며 예수님을 모시고 들어가 대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축사하시고 이들에게 나누어주시는 순간 이들의 눈이 밝아져 지금껏 자신들과 동행하며 여러 말로 주고받은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들은 얼마나 놀랐고, 또 기뻤겠습니까?
예수님으로 인해 이들의 밝아진 눈은 “믿음의 눈”, “신령한 눈”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믿음으로 볼 때 보이는 눈입니다. 그래서 “영안”이라고도 하고 “마음 눈”이라고도 합니다.
에베소서 1:17~19을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에서 『마음 눈을 밝히사』라는 말씀은 비록 우리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마치 보이는 것처럼 믿어지고 알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이 자리에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 안에 항상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롬 8:9). 그런데 문제는 스스로 믿는 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늘 계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믿음으로 살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곧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만이 주님이 항상 함께 하여주심을 날마다 체험하며 살아가게 됩니다(요 14:21).

성경이 말씀하시는 부활에 관하여
1.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비록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성경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하여 베드로와 열두제자와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으며, 그후 야고보에게 보이셨고 그후 모든 사도에게 보이셨으며, 특히 사도 바울에게도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부활하신 주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살아계심을 나타내십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저도 부활하신 주님을 여러 번 만났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부활’한다는 그 자체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 그대로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기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선포했습니다.

시카고 신학 대학교는 매년 <세례의 날>이라는 특별한 날을 가집니다. 이날은 학생들이 야외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강당에 모여 학교측이 초청한 유명인사로부터 강의를 듣게 됩니다.
어느 해인가 폴 틸리히라는 유명한 신학박사가 강사로 초청되었습니다. 그는 두 시간에 걸쳐 예수님의 부활은 거짓된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그들의 책을 인용하여 강의했습니다. 강의를 마친 후 질문 시간에 한 노인이 일어나 말하기를 “틸리히 박사님!”하고 부르고는 사과를 꺼내 한입 베어 물고 아작아작 씹으면서 “간단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또 사과를 베어먹기 시작하더니 “박사님이 말씀하신 책들을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하고는 또 사과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질문을 하는 도중에 계속해서 사과를  잡수시는지 이 노인의 파격적인 행동에 모든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주목하자, 다시 노인은 “니이버나 하이데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지만”하더니 또 다시 사과를 아작아작 씹어 먹고 방금 다 먹은 사과의 꼭지를 높이 쳐들고서는 “박사님! 방금 제가 먹은 이 사과가 신가요, 단가요?”하고 물었습니다.
몹시 당황한 틸리히 박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유감스럽게도 선생님이 드신 사과를 먹어보지 못했기에 어떤 맛인지 말씀해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이 노인은 그 남은 사과 꼭지를 가방 속으로 던지면서 “그렇다면 박사님은 우리 예수님도 맛보지 못하셨군요.”라고 소리쳤습니다.
그곳에 모여있던 천 여 명이 사람들이 까르르 웃고 손뼉을 쳐대는 통에 강단은 삽시간에 유쾌한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얼굴이 빨개진 틸리히 박사는 조용히 강단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신학을 연구하는 신학박사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만난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이는 거듭나지 못한 증거입니다. 안타깝게도 자유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이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활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부활합니다.
고린도전서 15:15을 보면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도 부활시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기 때문에 성경은 여러 번 부활을 거듭해서 말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을 하심으로 부활을 우리에게 확실히 증거하여 주셨습니다.

2.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합니다.
로마서 8:11을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살리신 영이 저와 여러분의 영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2~24을 보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부활을 하나 부활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부활합니다. 그리고나서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이 부활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은 첫째 부활로 천국에 들어가는 생명의 부활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의 부활은 둘째 부활로 지옥에 들어가는 심판의 부활입니다(요 5:29).
보통 사람들이 죽는 것을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사람이 이 세상에 살다가 죽는 것을 첫째 사망이라 하고, 지옥에 들어가 영원히 멸망당하는 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 살다가 육신이 죽는 첫째 사망만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두 번 죽습니다. 육신이 죽을 뿐만 아니라 지옥에 들어가 영원히 멸망을 당하게 되는 둘째 사망을 맞이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게 되고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되며 영원히 천국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5:24).
누구나 예수님을 믿는 순간 영생을 얻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천국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흙으로 만든 아담의 형상대로 태어나 살기 때문에 죽는 몸이요, 연약한 몸이요, 병든 몸이요, 썩는 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할 때는 썩지 않고 죽지 않고 약하지 않고 강하고 영생하는 몸으로 변화됩니다. (고전 15:42~44,49).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러한 변화가 일어납니다데살로니가전서 4:16~17을 보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부활하거나 들려 올라가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통곡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마 24:30).
성도들의 몸이 썩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공중으로 들려 올라갈 때에 기분이 어떠하겠습니까? 예수님도 무덤에서 부활하신 후에는 영생하는 신령한 몸이었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해서 움직이셨습니다. 제자들이 문을 단단히 잠그고 두려움에 떨고 있던 방도 그대로 들어가셨습니다.

3. 부활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부활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보다 더 좋은 세상으로 간다는 것도 알기 때문에 죽는다 해도 결코 슬퍼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사실 사람이 한평생 살다가 어떻게 죽느냐 하는 문제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죽는 모습으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칼 마르크스는 죽음을 앞두고, 그의 하녀가 “제게 마지막 말을 남기시면 기록해두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시끄럽다 나가라”고 소리를 지르며 죽었습니다. 나폴레옹 황제도 “내 인생은 불행했다.”는 말을 하고 죽었습니다.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영웅이란 용감하게 실패하는 자”라는 말을 남겼고, 철학자 사르트르는 죽음의 불안과 공포 때문에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정신병자가 되어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돈이 있어도, 권력이 있어도, 건강해도 죽습니다. 
영국의 요한 웨슬레는 88세까지 살다가 “모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하고 평안히 눈을 감았습니다. 무디 목사는 “나는 죽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곳으로 옮겨간다.”라고 말했으며, 칼빈은 “주님, 나는 더 할 수 없이 만족합니다.”라고 말하며 눈을 감았습니다. 이화여대 초대총장을 지낸 김활란 박사는 “내가 죽었다고 장송곡을 부르지 말고 승리의 행진곡을 불러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부활의 신앙을 믿는 자답게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4. 부활신앙을 가진 자는 생의 목적이 뚜렷합니다.
남은 생을 주를 위해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때때로 죽고 싶을 정도로 고난을 당해도 오히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남은 여생 주님과 동행하면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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