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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주일,종려주일] 나의 십자가는? (갈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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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정호 목사

세 종류의 사람

우리 중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져야 할 책임조차 남에게 미루고,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둘째는 책임소재와 시시비비를 분명히 하고 사는 사람인데 나는 내 할 일만 똑바로 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는 옳게 사는 깨끗한 사람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 예수의 사람이 아닙니다. 세 째는 스스로 잘못이 없어도 전체와 연약한 자의 책임을 대신 질 줄 아는 사람,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사람, 곧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 사람이 참으로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언제나 의인의 고난을 통하여 죄인을 변화시키시려는 것입니다. 오직 이 목적 하나입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영혼을 건지기 위하여 의로운 자가 더 회개하고 눈물 뿌리고 참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십자가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고난주일과 성찬식을 앞두고 우리는 예수님이 당하신 그 고난과 죽으심을 기억하고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면서 자기의 부족을 반성하며, 죄를 회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자신을 반성하는 것은 시간과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만 특별히 예수님의 수난의 계절을 당할 때, 우리가 자신의 모든 일을 살펴보면서 반성하고 회개하는 것이 의의가 있는 일입니다.




찰스 코펜 하이버라는 사람은 "사순절을 우리가 어떻게 뜻있게 지킬 것인가?" 에 대해 10가지 조목을 말씀하셨습니다.

그중에 7가지만 소개해보겠습니다.

① 나를 괴롭게 한자를 용서하고

② 외로운 자를 찾아가 위로하며

③ 웃음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또는 웃음을 기다리는 자에게 웃음을 주며

④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칭찬하며

⑤ 부정적인 생활에서 긍정적인 생활로 바꾸어지게 하는 기회로 삼고

⑥ 다른 사람을 친절한 마음의 자세로 판단하고 항상 말을 조심하며

⑦ 하루의 일과를 하나님의 인도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감사로 끝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부터 한 주간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일을 기념하는 고난주간입니다. 고난을 당하신 주님께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시를 원하시는 성도여러분에게 무한한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갈2:20). 이 말씀 중에 "그리스도" 와 "십자가"와 바울 자신을 가리키는 "내"가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진 사람들

주님께서 두 제자를 데리고 어떤 길로 들어서셨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각자에게 무게가 똑같은 십자가 하나씩을 건네주시며, 당신은 이 길이 끝나는 곳에 가 있을 테니 그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지시한 다음 자취를 감추셨습니다. 첫 번째 제자는 가볍게 십자가를 매고 가는데 반해, 두 번째 제자는 지독히 힘들어하면서 뒤쳐져 따라왔습니다. 십자가를 걸머진 지 하루 만에 첫 번째 제자는 길 끝에 당도하여 십자가를 스승에게 넘겨드렸습니다. 주님은 첫 번째 제자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아주 잘 했다." 두 번째 제자는 이튿날 저녁이 되어서야 길 끝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제자는 십자가를 주님의 발밑에 내동댕이치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한테는 다른 제자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십자가를 내주시다니요! 제가 이제야 온 것도 그 때문이라구요!" 주님은 마음이 상한 채 슬픈 얼굴로 두 번째 제자를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둘 다 똑같은 무게였느니라." "그런데도 앞사람은 아주 쉽게 십자가를 옮겼는데, 유독 저만 십자가를 옮기느라 쩔쩔 맸다 이 말씀입니까?"




주님이 그에게 타이르셨습니다. "십자가를 탓하지 말아라. 그 까닭은 십자가를 지고 오는 동안 줄곧 불평을 늘어놓은 너에게 있느니라. 네가 불평할 때마다 십자가의 무게는 늘어났던 거야. 앞에 온 제자는 십자가를 지고 있는 동안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십자가의 무게를 덜어준 거야. 그래서 힘들이지 않고 옮길 수 있었던 거지." 이야기 속에 담긴 진실 / 앤드류 마리아




사순절 기간 동안 매 주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려고 다각도로 시도하는 것은 바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함인데, 앞으로도 더 십자가 사건을 깊이 이해하기 위한 시도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 십자가 사건을 바르게 믿고 그리고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바라보는 시각을 새롭게 하여 인간 쪽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진정한 자기부인이 무엇일까요? 바클레이는 "자기를 부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긍정하는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내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내 유익보다는 주님의 유익을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의 생활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생활의 지배원리와 그 이상으로 삼는 삶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정하든가, 아니면 주님을 부정하든가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판단력이나 경험이 살아 있으면 주님의 말씀을 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지식을 믿느라고 주님의 말씀과 그 능력을 믿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부단한 자기 부정이야말로 하나님 긍정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부인이란 한 알의 밀처럼 땅에 떨어져 썩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4) 한 알의 밀알 속에는 생명이 숨어있지만 한 알 그대로 있을 때는 아무도 그 안에 생명이 있음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것이 그릇 속에 있을 때에는 그 속에 있는 능력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일단 그릇에서 나와 땅에 떨어지고 흙 속에 묻히고 썩기 시작해야, 그 때에야 비로소 감추어졌던 생명이 싹이 트고 뿌리가 나고 잎이 돋고 줄기가 자라서 수십 백배의 열매를 맺게 되며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드러내고, 많은 사람들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밀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자리로부터 내려옴을 말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려면 우선 곡식 그릇에서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보좌 그 평안하고 영광스런 자리에서 나오셨고 이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위치에서 떨어질까 봐 얼마나 걱정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현 위치에서 스스로 내려가기란 참 어렵습니다.




우리는 내 생활수준, 건강 수준, 명예와 인기가 현재보다 떨어질까 봐 얼마나 몸부림치며 사는지 모릅니다. 자기 위치를 지키려 하면 주님처럼 자기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흙에 묻힌다는 것은 내가 아주 무시를 당해도 좋다는 태도입니다. 씨앗이 땅에 묻히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부인은 흙 속에 묻혀서 보이지 않게 되는데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 그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자기부인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라면 무시당해도 좋다는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주님은 정말 가치 없는 죄인들을 위하여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희생이며 땅에 묻히는 것이며 진정한 자기부인인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있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아무래도 좋아, 무시당하는 것도 괜찮아" 하는 태도가 자기부인입니다. 썩는다는 것은 장래의 모든 기대마저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잠깐만 고생하면 나중에 틀림없이 회복시켜주고, 크게 보상해 주겠다는 보장이 없을지라도, 아무 조건 없이 남들을 위하여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땅에 떨어져 썩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지도 않고 땅에 묻히지도 않고 썩지도 않으면 싹이 날 리가 없습니다. 밀알이 된 우리가 자신을 보호하기에만 힘쓴다면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나겠습니까? 내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부자 되는 꿈일까요? 기득권일까요? 이름을 내 보려는 허망한 생각일까요? 안일한 자세일까요? 버릴 것을 버려야 자기를 부인이 되고, 그 뒤에야 생명의 열매가 맺힙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주님은 죄인들이 받아야 할 죄의 대가인 사망의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자기의 십자가"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가 각 사람에게 있다는 말씀인데, 오늘 우리의 십자가가 무엇일까요? 십자가란 남이 당하는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자원해서 대신 짊어지는 수고를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인류의 죄를 짊어지는 그런 큰 십자가는 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맞는, 작은 십자가들은 많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희생은 많습니다. 형을 공부시키려고 자기는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 노동을 하여 형을 출세시킨 동생이나, 타국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을 위하여 젊음과 출세의 꿈과 평안한 삶을 포기하고 미개한 그들과 생활을 나누기 위하여 정든 고국을 떠나 말라리아가 창궐하고 냉수 한 모금 실컷 마실 수 없는 미개지로 나간 선교사들, 버림받은 정박아 고아들을 위하여 일주일에 한번 쉬는 휴식 시간을 포기하고 그들을 돌봐주며 복음과 사랑을 나눠주는 젊은 일꾼들,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암말기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귀중한 시간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호스피스 사역을 전심으로 감당하시는 분들, 이들 모두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따르지 않았더라면 당하지 않았어도 될 고생을 주님을 따르기 위해 남의 고생을 자기의 십자가로 알고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길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각자 나름대로 갈등과 고민과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자기와 가장 가까운 가정생활에서부터 직장 그리고 사회 공동체 생활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로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하고 또는 본의 아니게 남에게 상처를 주게도 됩니다. 애써 외면하려고도 하고, 아픔을 스스로 치유하려고 노력도 해보지만 그게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는 누구든 십자가는 있게 마련이고 또 그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고통의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드리고 예수님처럼 짊어져야지 그것을 피해서 도망간다면 인생은 굉장히 고달프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짊어지고 나가야 언젠가는 성공의 짐으로 바뀌지, 그것을 당장 고달파 벗어버리겠다고 한다면 도둑이나 강도가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묘합니다. 내가 내 십자가를 저주하면 세상도 저주하게 되고 세상도 나를 저주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내가 내 십자가를 은혜의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도 나를 은혜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참된 축복의 길은 십자가의 아픔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 것은 마치 실과 바늘처럼 십자가의 아픔과 부활의 영광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과 용서, 양보와 희생은 자신을 죽이고 포기하지 않고는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바울 사도는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혔으므로 이제는 자기가 산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바가 되었으며,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시게 된 자기의 삶은 자기를 사랑하사 자기를 위하여 몸을 버려두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바라보면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신을 바라보지를 못하며, 자기 힘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은 생활을 하며,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려고 힘쓰면서도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하지를 아니하니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기대할 수 없으며, 그 삶이 힘이 드는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 안에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을 발견하자.

성경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이제는 자기가 자기를 주장하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들어와 사시며, 그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아서 사는 사람들이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독교의 진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는 신자가 힘쓰고 애쓰면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신자 안에 들어와 사시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면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져야 할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인가?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죽을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수치와 고난을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지는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주의 뜻을 이루어 가시며 그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하면 희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만 썩지 않은 밀알은 언제나 한 알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성경을 많이 알아도 십자가 지지 않은 사람들은 항상 그 모양 그 꼴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될 때 금세에서 백을 얻고 내세에 영생 얻지 못할 자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낮아지면 주님이 높이십니다. 희생하면 주님이 보상하십니다. 그런 십자가를 능히 지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범죄하는 이유가 자기는 희생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남을 희생양으로 삼아서라도 자기가 출세하겠다는 마음 때문에 이 세상에 전쟁이 있는 것이고, 작게는 부부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 입니다

죽어야 살고 버려야 얻고 아파야 성숙하고 깨져야 회복되고 십자가에 매달려야 면류관 쓸 수 있음이 하나님의 코드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살기 위하여 죽고, 얻기 위하여 버려야 하고 성숙을 위하여 아파야 하고, 회복을 위하여 날마다 깨져야 하고, 면류관 쓰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내 몫에 태인 십자가'가 있습니다. 세상에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한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저마다의 크고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가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십자가가 무엇일까요? '이 문제만 없었으면.... 이 사람만 없었으면....' 나도 잘 믿을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것.. 없었으면 하는 것, 피하고 싶은 것,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 벗어 버리고 싶은 것, 잊고 싶은 것이 있다면 모두가 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사람이든,궁핍이든,질병이든,부모이든,자녀이든,부부이든,핍박이든 말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십자가를 앞에 두고, 두 가지 반응을 나타냅니다. 하나는, 내 십자가가 가장 무겁고,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어떻게든 십자가를 안 지려하고, 할 수만 있으면 피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십자가 코드는 십자가를 피하거나, 십자가를 가벼운 것으로 바꾸거나, 십자가를 벗어두고 도망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가라는 것이지 끌고 가라 하심이 아닙니다. 지고 간 후에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지고, 죽음으로 제대로 살게 됩니다. 죽지 아니하면 살 수 없습니다. 죽음 없이 어떻게 부활할 수 있겠습니까? 의사의 마취 없이 수술이 불가능하듯, 우리의 '죽는 경험'(아픔)없이 '생명경험'(변화)도 없습니다.




십자가에 죽으면 되는데, 살려하고 십자가를 지고 매달리면 되는데, 십자가를 피하고 도망가려 하기에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문제는 여전히 문제로 나를 얽어매는 것입니다. 세상에 문제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 없는 곳이 한 군데 있는데 그 곳은 '공동묘지'입니다. 그곳에는 싸움도,다툼도,원망도,미움도,상처도,속상함도,억울함도,욕심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다 죽은 사람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버겁고, 힘겹고, 문제가 문제로 느껴지는 이유는 나의 자아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작, 응답, 기적, 변화는 언제나 인간의 끝에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왜, 나에게는 하나님의 시작과 응답이 없고 이렇게도 더딘가요? 결론은 간단한데 그것은 안 죽어서 그렇고 덜 죽어서 그렇습니다. 설익은 감은 떫고, 설익은 밥은 먹을 수 없듯이 설익은 죽음은 아니 죽음만 못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십자가가 더 가볍고 작아 보이게 마련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무게는 거의 동일합니다. 십자가 무게의 비밀은, 바라보고 생각하면 무거워 보이나, 짊어짐과 매달려 죽음으로 가벼워집니다. 우리에게는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고 안 질수 없는 내 몫에 태인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억지로라도 지고 가면 복이 되는데 하물며 기쁨으로 지고 가면 어떻겠습니까?




십자가는 사실, 내 힘으로 지고 갈수 없습니다. 다만,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가려하면, 십자가를 짊어져 보신 주님이 나 대신 지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면 우리는 응답의 부활, 변화의 부활, 치유의 부활, 회복의 부활, 해결의 부활, 형통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지만 버팅기고 피하려고 하면 십자가의 무게는 천근만근 나를 짓누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안 믿으려면 몰라도 기왕 믿을 바에는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달게 지고 쫓아야 합니다.




한 알의 밀은 땅에 떨어져 썩어야 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야 합니다. 자, 이제 우리 모두 내려온 십자가 위로 떠나온 갈보리 언덕으로 벗어버린 십자가 곁으로 피하려 했던 십자가 밑으로 나아갑시다. 바울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매일 매일 그렇게 충만하여 최선의 승리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울은 날마다 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한 번 죽어서는 안 되고 매일 죽어야 삽니다. 날마다 잘 살려면, 날마다 죽으면 되는데 어디 죽는 것이 그렇게 만만한가요? 죽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요? 그러기에 은혜가 필요하며, 말씀이 필요하며, 고난이 필요하며 ,연단이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고난 중에 - 최 용 덕 -

당신의 인생 중에 이해할 수도 없는 엄청난 고난이 닥칠 때
당신은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뼈를 깎고 살을 에이는 고통 후에 아름다운 진주가 탄생되듯,
이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당신을 성숙시키기를 원합니다.

때론 남녘으로부터 불어오는 따스한 봄기운처럼
때론 한 여름 몰아치는 대노한 폭풍우처럼
그 시험은 당신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을 알 순 없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 당신을 성장케 하시려는지
그 고난을 통해 당신을 매질하시려는지.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고난을 그분의 사랑으로 인한 것이란 사실입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어리석어서, 그 고난의 골짜기를
다 넘은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오묘하신 그 뜻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이 작은 머리로서는 일일이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어서, 때로는 불평하고 하나님께 원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도 우리 주님은 빙긋이 웃으시며 지켜보시고,
우리의 철부지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시길 원하시지요.

그분은 묵묵히 웃으시며 그 고난의 시나리오를 진행시키시고,
한 인간의 성숙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계시죠.

가능하다면 그 처음 불평의 늪에서 빨리 벗어나야 해요.
그만큼 당신은 빨리 하나님의 계획 속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죠.

모질고 험했던 그 고난이 다 지난 후
당신은 조용히 거울 앞에서
그 안에 머물러 있는 또 하나의 당신의 모습을
겸손한 마음으로 바라보세요.

어쩌면 몰골은 더 초라해지고 초췌해 졌을지라도,
그 안에 거듭 태어난 튼튼한 당신의 영혼
당신의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참 복된 인생입니다.

이제 조용히 눈을 감읍시다. 두 손을 모으고 생각해보세요.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의미를....
그리고 기뻐해요. 그리고 기도해요. 그리고 감사해요.

-동산병원 중환자실 병상에서 -

기도: 주님!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많이 받으려 하고 더 많이 누리려 하고 더 높은 곳에 이르려 하고 더 많이 죽지 못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안 죽으려 함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십자가를 피하려 하고, 십자가를 벗어 버리려 했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내 몫에 태인 십자가 제대로 즐겁게 지고 살게 하소서. 어떤 종류의 십자가라 할지라도 내 품에 끌어안고 매달리게 하소서. 주님. 죽는 은혜를 주옵소서. 한 알의 밀알로 썩게 하소서. 죽음으로 만이 부활한다는 이 비밀을, 더 깊이 깨닫게 하소서. 바울처럼 날마다 죽는 경험이 있게 하소서. 그러나 죽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를 잘 아시는 주님께서 순간마다 도와주시옵소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제, 다른 은혜 구하지 않으렵니다. 그 동안 얼마나 십자가 안 지려 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십자가 팽개치고 도망가려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십자가 지고 올수 있게 하신 주님! 감사드립니다. 알고 보니 제가 십자가 진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지셨음을 깨닫고 감사드립니다. 험한 십자가 날 위하여 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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