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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진 자에게 임할 재난 (약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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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정근두 목사

그리스도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요즈음 야고보서를 연속적으로 다시 살피고 있습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알면서도 행치 못한 선행은 죄라는 사실을 말씀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지시에 따라서 선을 실천한 한 주간이었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선을 행할 힘을 갖추고도 선을 행치 않는 자에게 임할 재난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여러 가지 재난들을 만납니다. 천재지변은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최후심판은 반드시 선별적일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 5:10) 선을 행한 사람은 선을 행한 대로, 악을 행한 사람은 악을 행한 대로 그 경중을 따져서 공정하게 심판할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선악 간에 그 행한 대로 몸으로 행한 것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을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면“가진 자에게 임할 재난”을 오늘 한번 살펴봅시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무엇보다 먼저 본문이 일으킬 수 있는 오해의 소지를 제거해야겠습니다. 성경은 부를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부 자체를 결코 악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부자라고 무조건 일렬도 세워놓고 수건으로 눈을 가린 후에 무차별 난사를 하지 않습니다. 공산당이 브르조아 유산계급을 처치하듯이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경고입니다. 가졌던 갖지 못했던 성도들도 귀담아 들어야할 말씀입니다. 세상 것들에 유혹을 받는 성도 모두를 향한 경고입니다. 더 많은 돈을 모으려고 기를 쓰는 성도를 향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사는 목적을 부의 축척에 두는 모든 성도를 향한 경고입니다.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을 시샘하고 있는 갖지 못한 성도들도 들어야 하지만은 사실 근본적으로 오늘 본문은 선물로 주신 부를 오용하는 이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지금 가진 그들의 재물이 영원할 줄로 착각하는 이들을 향한 엄중한 경고입니다.

다른 이들의 슬픔과 고통을 들어 주는데 가진 재물을 사용하기는커녕 그들로부터 격리되어서 안전하게 자기만 살려고 가진 것을 사용하는 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 고난의 통곡입니다. 이미 재난이 그들 위에 덮여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 임할 재난들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잘 보시면 여기 저기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재난의 날, 재앙의 시간이 덮쳐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재난을 불러들이는 가진 자들의 첫 번째 죄는 가진 것을 사용하는 대신에 쌓아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허용된 도를 훨씬 초월해서 재산을 쌓으려는 그들의 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끝없는 욕심으로 재물을 모으려고만 하기 때문에 모아둔 재산은 쓰지 않으면 반드시 썩고 좀먹고 녹슬어 버린다는 분명한 진리마저 보지 못합니다.

야고보 시대 부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식량에 대한 집착이 강했습니다. 먹고 사는데 꼭 필요한 분량보다 훨씬 넘어서 무조건 구매해서 쌓아둡니다. 쌀이고, 보리고, 밀이라도 좋습니다. 감람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용보다 지나도록 매점매석하는 것이 가진 자들의 특성입니다. 어렵다 이렇게 되어지면 먹을 것부터 돈 있는 사람들이 매점매석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고 있습니다. “값 오른다.” 그러면 말이죠? 먹는 것뿐만 아니라 입는 것도 투자의 대상입니다. 비싼 옷은 아직도 호사가들의 구매욕을 불러일으킵니다. 같은 옷 하나를 5000원 10,000원 주고도 살 수 있고요. 5만원 10만원 주고 살 수 있고요 50만원 100만원 주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지요? 천만 원을 호가하는 물건들도 있지 않습니까? 비싸면 조금 좋아 보이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10배 20배 100배 로 좋지는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들이 그렇게 입는 동안에 정말 추위도 가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옛날에는 옷 그자체가 화폐처럼 통용되었던 모양입니다. 요셉은 총리가 되어 형제들에게 옷 한 벌씩을 선물로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복동생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다섯 벌의 옷을 선물로 줍니다.

바울 역시 비슷한 고백을 합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내가 목회하면서 여러분의 돈을 탐낸 적 없습니다. 내가 목회하면서 여러분의 옷을 탐낸 적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은과 금 또한 축척의 대상이었습니다. 은과 금은 당시의 유가증권의 통칭으로 사용됩니다. 요즈음은 동전이나 지폐 등 화폐만이 아니라 수표, 증권, Plastic Money로 통하는 현금카드 등 퍽 다양한 것이 축척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야고보의 재난 선포를 들어 보십시오. 너희 모든 식물이 썩었다. 쌓아둔 식품이 변질되었다. 갖춰놓은 의복 역시 입지 못한 채로 좀 먹어 버렸다는 이야기 입니다. 장마철이 지나서 꺼내 보니 여기저기 좀이 먹었다는 거지요.  부의 상징이요 자랑으로 여기던 귀한 의복이 걸레짝으로 밖에 쓸 수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직도 희망을 가지고 있는 은과 금마저 폭삭 녹슬어 버렸다는 선언입니다. 설마 요즈음 누가 그렇게 녹슬 때까지 돈을 모아 두냐? 녹스는 재질가지고 돈 만드나? 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전쟁이 일어나고 정부가 바뀌면 현금이 종잇조각으로 변하고 무게에 따라 값을 쳐주는 일 말고는 되지 않습니다. 현금뿐만 아닙니다. 통장, 은행에 있는 것들도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요. 대동아 전쟁 때 일본에서 가죽공장을 했어요. 해방되니까 돌아올 수 있을 만큼 많은 돈을 모았어요. 전주에 있는 은행에 저금을 했더니 은행이 생기고 제일 많은 돈을 갖다 넣었다고,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국교가 막히고 보니까 일본은행에 넣어두었던 돈은 아무 소용이 없더라고요. 김해에 논을 수십 마지기 샀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토지 계획을 선언하니까 아무도 친척들 중에 그것 살 사람이 없더라고요. 몽둥이 맞아 죽을까싶어서요.

순식간에 다 날라 갈 수 있습니다. 더 많이 모으려고만 했지 모은 것을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 생각해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모우기에 바빠서 모우는 재미에 움켜쥐면 손가락 하나 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다 썩고 좀먹고 녹슬었다는 것입니다. 온통 세상 것을 축척하는데 정신이 빠져 살았는데 그 모든 것이 무가치해져 버렸습니다.

단순히 무가치 한 것만 아니라 은과 금에 쓴 녹이 부를 오용한 증거가 되어서 소리치며 우리 살을 먹는 불같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식량은 쌓아두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좀이 먹고 곰팡이가 피도록 먹을 것을 쌓아 두는 것은 죄악입니다. 나누어 먹는 대신에 썩어서 내버리는 음식 과일은 여러분을 고발할 것입니다.

나누어 입는 대신에 유행이 지나도록 걸어놓고 좀먹도록 방치하는 것도 하나님이 매우 싫어하시는 죄입니다. 인간의 삶을 편리하도록 인간의 삶에 적절히 사용되도록 통용시켜야 할 돈을 녹슬도록 축척하는 것은 불과 같이 살을 태우게 될 재료를 쌓는 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삶 전부를 걸고 축척해온 그 재산이 여러분을 고문하는 땔감 역할을 심판 날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부자들을 향해 무차별 난사를 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부를 오용한 부자들이 받을 재앙을 선포합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을 축척의 대상으로, 투기의 대상으로만 여긴 부자들이 받을 재난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냉장고에 하루 먹을 것이 있으면 감사하십시오. 썩어 곰팡이가 나도록 저장하는 것은 썩어서 음식쓰레기에 내어 놓은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무서운 죄악입니다.

옷장에 철 따라 갈아입을 옷 있으면 만족하십시오. 유행 지나도록 입지 않고 옷장에 넣어두는 것은 재앙을 쌓고 있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용하도록 주신 것이지 쌓아두도록 주신 것은 아닙니다. 먹는 것이든, 입는 것이든, 은이든 금이든 쌓아두는 것은 마지막 심판 날 받을 재앙을 쌓는 것과 같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십시오. 여분으로 있는 것이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누는 것을 배우십시오. 말세에 쌓아둔 재물은 심판 날 받을 재앙을 쌓는 것입니다. 여분의 것은 무엇이든지 선을 행할 기회입니다. 선을 행할 기회를 주셨는데 행치 않는 것은 죄입니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 폭력으로 빼앗는 강도질만 나쁜 죄가 아닙니다.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베풀지 않는 것도 똑같은 죄입니다. 쌓아두어 썩게 하고 좀먹게 하고 녹슬게 하는 것은 심판 날 받을 형벌을 축척하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바로 사용되지 않는 재물은 재앙의 원천입니다.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모든 부자가 다 정죄되지는 않습니다만

2.재난을 불러오는 가진 자들의 또 다른 죄는 불의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4절에서 가진 자의 죄악을 또 지적하고 있습니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정당하게 지불되지 않는 임금은 소리치고 있습니다. 욕심으로 가득한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그 고발은 만유의 심판자의 귀에는 들리고 있습니다.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착취당한 노동자의 억울해서 우는 소리를 하나님은 들으시고 계십니다.

기독교는 결코 하늘 저편의 기름진 식탁으로 인민을 마취시키는 종교가 아닙니다. 내세를 부각시켜서 현세의 고통을 잊게 만드는 “인민의 아편”이 아닙니다. 성경만큼 현재의 고통 빈부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다루는 책도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자기편에 끌어넣기 위해서 자신들이 구세주가 된 듯이 공산주의가 설쳤지만 지난 100년 동안에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의해 학살당한 인민들은 1900년 동안 학살당한 사람들보다 더 많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셔야합니다. 킬링필드가 하나의 예입니다. 기독교가 결코 인민의 마취시키는 종교가 아닙니다. 아편이 아닙니다. 이 나라에서 행해지는 구제의 70%는 기독교인이 하고 있습니다. 우린 그러고도 욕을 얻어먹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옷 로비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기독교인입니다. 사람들은 고통 받는데 건물들은 세워지고 교회당은 세워지고 하니까 돌팔매질을 하는 것이지요.

성경 중에 야고보서만큼 가난의 문제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집착하는 책도 드뭅니다. 신약뿐 아니라
구약 아모스 역시, 신약의 야고보만큼 가난한 자의 눈물과 한숨을 아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하고 강포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고 상아 침대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켜며 당대에 부자들을 지적을 하는데 상아침대에 누우며 그때는 상아 침대가 인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요즘은 뭐가 있지요? 돌침대 물침대 원적외선 침대 진흙침대 숯 침대 종류도 많더라고요.

양떼에서 어린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큰 양은 고기가 질기니까 큰 소는 질기니까 역시 송아지를 어린양 송아지를 맛있는 것만 골라서 먹고 다녀요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로 지절거리며 노래방 찾아다니면서 먹고 나서는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자기가 무슨 다윗처럼 음악을 한답시고 그렇게 홈시어터까지 갖춰두고 사냐? 이런 이야기입니다.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포도주 컵은 본래 작은 컵에 마셔야 하는데 풍성한 모양입니다, 아예 그냥 사발 채 마시는 겁니다.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값비싼 화장품이 있으면 구해서 바르고 뭐 그런다고 특별히 더 예뻐집니까? 사람은 나이가 들면 나이든 모습이 얼굴에 나타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나는 50,60이 되었는데 나이든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여자들을 보면 징그럽더라고요. 사람은 나이가 들면 든 표시가 되어야 됩니다. 아이들이 할머니! 할머니! 부르는데 할머니로서 보이는 것은 정상적인 것입니다. 뭐 주름을 펴겠다고 난리를 치지 않아도 됩니다.

성경은 결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정당한 임금 지불을 하지 않고, 정당한 세금지불을 납부하지 않고 부를 축척하는, 사업체를 키우는 사람들에 대해서 편들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무력한 자라고 부당한 착취를 해도 아무도 변호할 이 없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을 돌보시는 분은,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4절은 “만군의 주”라고 부릅니다.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칭호 가운데서 가장 위엄 있는 칭호 중 하나입니다.

그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억울한 이의 한을 읽으시며 눈물을 씻길 수 있는 능력자입니다. 비록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의 편이 없을지 몰라도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그들의 보수자로서, 도움자로서 본문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돈 버는 것도 좋고 사업 확장도 좋지만 남을 억울하게 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3. 재난을 불러오는 가진 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또 다른 죄악은 불의하게 사용하는 죄입니다. 축척해 두는 것도 죄입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모우는 것도 죄이고 그 모운 것을 쌓아놓아도 죄이지만 그걸 쓸 때에 자기만을 위하여 쓰는 것은 죄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쌓아두는 것만큼이나 사치와 방종에 소비하는 것도 죄악입니다. 가난에 찌든 노동자에게 지불할 돈을 지불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사치와 방종을 위해서 탕진하는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3.1 사치와 방종에 부를 사용하는 것은 죄입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부를 축척한 다음에 불의하게 부를 모운 것도 죄악이지만 모운 것을 가지고 신체적 안락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사용합니다. 몸에 좋다고 그러면 먹는 일에 마시는 일에 아끼지 않습니다. 집도 그렇지요. 평당 500만원을 하던지 1000만원을 하던지 상관이 없습니다. 좋은 집 웰빙 아파트라고 그러면 모두 다 똑같습니다. 한 평 값만 있으면 그 돈만 있어도 숨 쉴 사람이 이 세상엔 많이 있습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소모적인 것에 그들이 가진 것을 펑펑 쏟아 부는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눅6:24).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로서 사용되는 부는 심판을 불러옵니다. 좀 더 평안하기 위해, 좀 더 즐기기 위해 동료인생의 고민을 모두 망각한 죄는 심판을 불러들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 한 부자의 죄는 그가 행한 무슨 잘못 때문이 아니라 그가 행하지 못한 선행 때문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부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이웃을 돌보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죄입니다.

야고보의 경고를 모두 들어보십시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나이 드신 분들은 아실 것 같아요. 옛날에는 거의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던 시대가 아닙니까? 잔칫날이 되면 집에서 기른 짐승 중에서 살찐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삶는다는 것입니다.

집에서 키우는 짐승들이 그들의 종국을 모르고 먹을 것을 갖다 주면 그냥 서로 먹으려고 설치는 것처럼 사치와 방탕에 빠져서 사는 부자들을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쾌락의 최후는 슬픔이요, 사치의 종국은 죽음인 것을 모르고 사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파멸은 확실하고 그들의 멸망은 신속합니다.

3.2 부를 이용해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만드는 죄를 거기다가 다시 하나 더하고 입니다. 가진 것을 자기를 위해서 사치와 방종에 써도 죄이지만 부가 있고 힘이 있다고 해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죄에 죄를 더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부를 추구하는 과정에 있어서 부자들은 다른 이의 생명조차 개의치 않습니다. 탐욕은 탈취를 낳게 하고 방종에 빠진 삶은 결국 살인까지도 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야고보서 2장에서 부자들이 가난한 자를 법정으로 끌고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그들을 죽이는 죄까지 범한 것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직접 혹은 간접으로 스스로 옹호할 능력이 없는 이의 생명을 빼앗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고속도로가 생기고 나서 고속버스가 다닐 때 여러분 그런 유언비어를 못 들어 보셨습니까? 사업주가 기자들에게 그렇게 말했대요. 차를 부수는 것 보다는 한사람 밀고 지나가라고, 보상해 주는 돈보다 찻값이 훨씬 비싸대요. 매일 벌어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루 품삯 그것도 큰돈입니다. 이것을 주지 않고 넘어가면 당대에 고통당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입니다. 전날 품삯을 주지 않는 것은 생명줄을 끊는 죄악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여기 본문에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라고 말하는 것은 부를 사용한 법적인 행패를 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인으로서 선고하고 그리고 처단하고 법이 가진 자 편에 있으니 가난한 자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방어능력도 없고 부자를 대항하지도 않는 가난한 자를 없애버리기로 결정합니다.

물론 야고보 선생은 구체적인 정황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었는지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야고보가 관심을 갖는 것은 다만 부자가 무죄한 자의 생명을 끊는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언급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잘 보시면 그런 일이 비일비재 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한 두번 예를 들기는 했지만 우리 교회에서 봉사하시던 한 전도사님은 가족과 함께 양평에서 서울로 예배를 드리러 오다가 중앙선을 침범한 우유  트럭에 부딪혀서 프라이드는 논으로 떨어지고 남편은 즉사하고 의식을 차려보니까 모든 죄는 프리이드에게 다 가 있습니다. 프라이드가 용감하게 중앙선을 침범해서 우유차를 박은 것처럼 해서..  너무 억울하잖아요.

동네에 수소문해보니까 현장을 본 사람들이 술만 먹으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데요. 그 장례에 대해서, 그래서 만나서 녹취를 해서 그것을 증거물로 법원에 제시를 했습니다. 그런데 검찰이 그것을 없애 버렸데요. 천신만고 끝에 얻어낸 증거조차도 없애버렸어요. 왜? 편이 가진 자의 편이니까. 그다음에 더욱 놀라웠던 것은 3년인지 5년인지 세월이 지난다음에 더 이상 법적으로 불가능한 시점이 되니까 그 우유회사에서 편지를 해서 우유 값 배상하라. 더 이상 방어 할 수 있는 시한이 없을 때 그렇게 하는 겁니다. 가진 자들의 횡포라는 것은 옛날일 만이 아닙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악한 자를 대항하지 않는” 무고한 생명을 끊는 것으로 부자의 죄가 극대화 시키고 그것과는 대조적인 가난한 자의 모습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본문은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느니라.” 하지만 그의 소리 없는 부르짖음은 하늘 보좌에 울려 퍼집니다. 이 모든 죄악은 최후의 심판을 부르고 있습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있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계시록을 보셨습니까? 보호자 밑에서 죽임을 당한 자들이 부르짖고 있습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피를 신원하여 주지 안이하기를 언제까지 하시겠습니까?

지금도 보호소가 만군의 주 하나님의 귀에 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을 억울하게 해서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는 심판 주 하나님의 귀에 드리고 있습니다. 이 백성이 잘 살기 위해서는 이 백성이 복을 받기 위해서는 평당 500만원 천만 원 이천망원 아파트가 더 많이 지어져야 되는 것이 아니라 골목 안 을 가 보세요. 이 복산동 골목에 정말 사람이 아직도 이런 곳에 거주하고 있나? 하고 생각이 드는 그런 거처들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울산광역시가 사람 살만한 동네가 되기 위해서는 고급아파트 들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임대아파트를 더 많이 나와야합니다. 

최후의 심판이 없는 것처럼 강포를 행하며 살던 모든 이들은 그날 심판아래 빠져들 것입니다. 비록 이 땅의 모든 가진 자들이 여기 나와서 듣지는 않습니다만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들어야 합니다.

가진 자에게 임할 재난에 대한 경고의 말씀은 당시에도 가난하게 살면서 가진 자들에게 압박받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이런 최후의 심판이 임박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마음이 평안치 못하면 여러분은 압제자편에 서 있습니다. 그래 심판이 있었네! 하나님이 내 억울한 것 그날은 풀어 주실 거야! 매일 흘렸던 눈물을 하나님께서 씻겨 주실 거야 하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남겨진 하나님의 백성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상황을 낱낱이 알고 계십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여분의 것들을 주셨을까요? 왜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풍족하게 주셨을까요? 성경의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지지리 가난하게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읽어보면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것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져도 못 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엊저녁에 내가 어떤 음식점에 저녁을 먹었는데  점심때도 저녁때도 그 집에 손님이 많아서 예약이 안 됩니다. 부엌에 보니까 나이가 70~80은 되어 보이는 주인 할머니가 부엌에서 봉사하는데 돈을 버는 재미에 자기가 늙어 가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아요. 참 저는 보니까 딱하더라고요. 가진 것은 누리는 것 그것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엄청 대한민국의 최고의 차를 사도 괜찮을 만큼 부를 가지고 있는데 그런 사람이 체어맨 하나 샀다고 해서 꼭 손가락질을 받아야 합니까?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프라이드를 살 형편도 안 되는데 그랜저 몰고 다니면 그건 사치입니다. 가진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을 우리가 필요해서 쓰는 것만큼 쓰는 것이 꼭 그렇게 잘못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것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과도하게 아껴도 더욱 가난하게 될 뿐이지만 흩어 구제해도 부하게 되는 일은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풍성하게 주신 것으로 우리 자신이 누리는 동시에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딤전 6:18)가 되기를 권면합니다. 이런 선행은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길이라고 소개합니다.

자신만 오로지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있다가 내일 사라질 부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좋은 것을 넘치게 주시는 하나님을 닮아서 선한 일을 행하고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관대한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렇게 하면 영원히 지속되는 보물을 쌓은 것이며 진정한 삶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부는 소중하게 사용될 수 있는 자원입니다. “목사님, 우리가 부자인줄 아십니까? 우리가 요즘 경기 때문에 얼마나 어려운줄 압니까?.” 예, 여러분은 저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나도 할 말이 있습니다. 전 세계 200여 나라를 한번 가보십시오. 대한민국이 결코 가난한 나라가 아닙니다. OECD에 가입해서 벌써 가입 된지가 몇 년이 지났습니다. 대한민국은 가난한 나라가 아닙니다. 목사님처럼 외국에 못 나가 보았다고요? 그러면 여러분의 기억을 한번 되살려 보십시오. 여러분이 어렸을 때 살았던 처지와 지금을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제 어머니가 지금 85살입니다. 시집을 와서 보리방아 새벽에 찧어서 삶아서 널어놓고 밥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지금은 스위치 하나만 꽂으면 아침에 따뜻한 밥이 다 되어 있잖아요. 얼마나 살기 좋아 졌는지 모릅니다. 잘 먹고 그렇다 보니까 일은 다 기계가 해 주고 할 일은 헬스에 가서 뛰는 일 밖에 없습니다. 죽겠다! 죽겠다! 라고 그러면 진짜 어려워 보입니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면 큰 흐름을 가지고 파악을 하면 우리는 다른 나라보다 잘 살고 우리는 어릴 때 보다 훨씬 잘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하고 비교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여러분보다 더 가진 사람과 비교하면 나 보다 더 좋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과 비교하면 나는 아직 가난한 사람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보다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얼마나 우리는 잘사는지 모릅니다. 20여 년 전에 외국에 유학을 갔을 때 어떤 농장에 주말에 놀러갔는데 거기서 순간온수기에 따뜻한 물이 나오는데 얼마나 감동이 되던 지요. 이런 것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분이 따뜻한 물이 나오는 것 가지고 감동하는 사람이 여기에 몇 사람이나 있습니까? 아직도 그런 것이 소원인 사람도 있겠지만요. 대부분의 80~90%의 사람들은 틀면 따뜻한 물이 나오는 그런 주거 환경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잘 사는 겁니다.

잘사는 사람만 쳐다보면 우리는 아직도 어려운 것 같아요. 그러나 세상에는 여러분을 부러운 눈으로 봐라보는 나라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들 이웃에도 난 저 집처럼만 살았으면 그런 꿈을 가진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누구를 기준을 삼느냐에 따라 여러분의 처지는 달리 평가될 수 있습니다. 잘 생각하면 우리에게도 여분의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헌 옷을 모우기도 하는데 잘 안 내어 놓더라고요. 내가 늘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석 달 동안 입지 않은 것은 무조건 남는 것이다 필요 없는 옷이다 그것 더 이상 입게 될 일이 없습니다. 그것을 내어 누군가 필요한 사람에게 줍시다.

저는 여러분이 개인 재산을 내어서 몇 억 자리 복지재단을 개인적으로 세워라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 하는 것은 옷장에 지난 철에 입지 않은 옷을 내어서 누군가를 돕자는 것이고 냉장고에서 바로 썩어서 음식쓰레기로 나가는 것 그것 아껴서 사람을 한번 도와 보자는 것입니다. 돕는 일에 동참해 보면 기쁩니다. 어떻게 제 눈에만 보이는 건지 여러분의 눈에 안보입니까? 저는 어떤 선교단체에 갔더니 세상에 이 시대에 밥 몇 그릇 시켜서 밥 더해서 그 반찬으로 먹고 훈련 받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그 다음부터는 우리 집에 냉장고에 뭐 있으면 어서 연락해라 갖다 주던지 가지고 가든지 하도록 합니다.

도우려고 생각하면 우리 주보에도 보니까 “사랑의집” 만들었다고 광고가 났던데요. 8지구에 보니까 김춘근성도 손숙자집사 선교사와 지역주민을 위한 사랑의 쉼터를 개원했다. 사람들이 모이면 먹을 것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누군가 집을 마련해서 하는 것 같으면 우리도 마음을 합할 수가 있습니다.

큰 것 하지 말고 하라고 해도 큰 것을 여러분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금 작은 것 동전 모우기 그런 것을 관심만 가지만 할 수 있습니다. 동전 모아서 동전이 생기는 대로  모았다고 해서 파산 당하는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모운 동전 그 돈만 해도 영양실조 때문에 눈이 멀어가는 아이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살려 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히 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임을 잊어버리게 되면 온갖 문제가 생깁니다. 시기하고 불의하고 압제하고 착취하고 살인하고 하나님사랑 대신에 이웃사랑대신에 돈을 사랑하는 것은 돈은 온갖 악의 근원이 됩니다. 결국 세상의 벗이 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받은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고 우리에게 주신 것을 바로 사용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은 좋은 교회 울산교회 성도들입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장로님은 청년 중에서 등록을 못했는데 교회적으로 도움의 손길이 못 미치니까 개인적으로 도왔더라고요. 뒤에 들어보니까 저는 그런 분들을 참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집사님들 가운데서도 구역에 어려운 사람들을 살피는 것을 보면 정말 저는 시장을 만나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울산시가 아직도 사람 살맛나는 동네가 있는 것은 그렇게 헌신하는 좋은 교회 울산교회 성도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자랑하고 싶습니다. 우리 조금 더 한번 몸부림쳐 볼 수 없을 까요?  철 지나도 입지 않은 옷을 한번 선한 일을 위해서 썩어서 내 보내는 대신에 씽씽할 때 나눠먹는 그렇게 들은 말씀에 따라서 순종하면 우리의 작은 몸짓이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나비 효과를 아시지요? 울산광역시가 사람 살만한 도시로서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게 기쁨이 되는 여러분의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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