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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주일,종려주일] 베드로냐, 사단이냐? (마 16: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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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오주철 목사

지난 주일에 군에서 박격포를 잃어버린 영철이의 편지를 읽어드렸습니다. 그런데 영철이가 해병대를 제대한 형님 때문에 비리가 밝혀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형님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형님 전상서. 형, 영칠이다. 형이 뭐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엄마한테서 박격포 값을 보낼 수 없다는 답장을 받았어. 형은 기억력이 부족한가 본데, 형이 해병대 취사병으로 있을 때, 물에 빠뜨렸다던 수륙양용 장갑차 값으로 아버지까지 속여서 100만원 가량 받아 갔었잖아. 박격포값 받으면 백수 생활 어려운 형을 생각해서 포탄값 정도는 보내 줄테니까, 형이 알아서 잘 처리되도록 해 주기 바래. 그럼, 이만... 영칠이 씀. P.S. 만사형통... 만사는 형을 통해야 잘 이루어진다는 이 속담을 좋아하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동생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형이 영철이에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동생 영철이에게. 영철아, 형아다. 형 이름이 영팔이인데, 영철이 네가 이름을 영칠이로 바꾸고 내 형인 것처럼 행세하면 되겠냐? 왜 이름까지 바꿔가며 은근히 협박을 하고 그래. 영철아 시대가 많이 변했단다. 군대도 많이 변해서 PX 양념닭발 값이 많이 올라 네 주머니 사정이 궁한지 모르겠으나 사회도 예전 같지 않아. 군대 사정 다 안단 말이야. 그리고 내가 어머니한테 일러바친 게 아니니 오해 말거라. 어머니도 이미 다 눈치채시고 나한테 물어보시더라. 너 유치원생이 훤히 보이는 귀여운 거짓말하면 어떠냐? 속으로 웃음이 나오지? 어머니나 내 앞에서는 네가 바로 그 유치원생 같구나. 군대 가더니 많이 귀여워졌어. 남자다워져야지 그게 뭐냐? 장갑차 정도는 돼야지 박격포가 뭐냐? 쯔쯔쯔. 백수 생활 걱정해주는 것은 고맙다만 나도 이제 백수 생활 면하게 되었으니 아무 걱정 말고 박격포 관리 잘해라. 포판은 잊어 먹지 않았겠지? 요새도 사용하는지 모르겠다만 옆 분대 엠60기관총도 잊어먹지 않도록 주의시켜라. 영철아, 형아가 곧 취직이 되면 그 때 박격포값 보내 줄테니 중대장님께 잘 말씀드려서 한 달만 버텨봐라. 동생을 사랑하는 영팔이 형아가"

그런데 영철이의 편지가 어떤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인터넷에 올려졌습니다. 어느 날 어떤 어머니가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영철이와 엄마의 편지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철이 어머니에게 이렇게 위로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RE:RE: 영철이 보거라. 그래도 댁에 아드님은 다행입니다. 저희 아들은 해군에 있는데, 미 해군에서 합동 훈련하는데 놀러갔습니다. 그런데 항공모함을 잘못 가지고 놀다가 물에 빠트렸답니다. 에구 내 팔자야. 그쪽은 몇 푼 안 되는 거 같으니까 빨리 보내주세요. 우리 집은 백년상환 오십년거치루 갚기로 결정했답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장애물들을 만납니다. 때로는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장애물들도 있고, 해결할 수 없는 장애물들 앞에 서게도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나게 되는 모든 강력한 장애물들 중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일 겁니다. 자기 자신 속에 나타난 분노의 장애물, 미움의 장애물, 자기 속에 있는 상처의 장애물, 의심의 장애물, 자신을 번민 가운데에 빠뜨리는 이 무서운 번민의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크고 유용한 자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름이 아닌 자기 마음의 자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같은 환경 속에 있으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자기 마음의 자원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불평과 원망 가운데에서 삽니다. 어떤 때는 자기 마음의 자원을 가지고 어려운 환경도 잘 넘어가는데, 어떤 때는 훨씬 더 좋은 환경도 못 넘어 갑니다. 그러고 보면 환경이 나를 넘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내가 나를 넘어뜨립니다. 환경 때문에 시험에 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시험에 넘어집니다. 내 마음에 있는 장애물이라는 것도 사실은 자기 스스로가 만든 울타리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깊은 곳이 많습니다. 깊은 계곡도 있고 깊은 바다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이 어디일까? 인간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마음이면서도 그 안에 무엇이 담겨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삶의 형태를 시간마다 결정합니다. 내 마음이 나를 결정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깊은 바다에는 인간의 수많은 오염된 쓰레기들이 잠겨져 있습니다. 깊은 바다 속에는 함몰된 수많은 생명과 배들이 가득가득 수장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인 바다도 매 한가지입니다. 이런 쓴 뿌리들이 얽혀서 마음 가운데에 있으면 수많은 상처와 고통들이 쌓이고 쌓여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부모와 조상들의 여러 영역에서 유전된 것도 쌓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육체의 감옥보다 더 무서운 것은 마음의 감옥이 나를 가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잠재의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잠재의식의 형성에 숨겨져 있는 마음의 씨앗들이 현재의 생활과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 잠재의식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내 마음을 쓰게 하는 이 쓴 뿌리, 내 마음을 아프게 쏘는 이 가시에서 자유할 수는 길은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시면 됩니다. 아무리 굳은 마음도 하나님께서 한번만 만져주시면 순한 마음으로 바뀌어질 것입니다. 억세고 사납던 완악한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의 손 길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터치하여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사람 앞에 설 때마다, 일 앞에 설 때마다, 문제 앞에 이를 때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개입하여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질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수가 없습니다. 인생은 성질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질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 넘어지고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질은 일을 그르치게 만드는 걸림돌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안에 있는 이 성질까지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품으로 다듬어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내 안에 있는 나도 주장하기 어려운 내 마음의 장애물을 주의 성령께서 다스려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마음의 다스림, 이것은 아무리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마음을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의 삶 속에 마음의 상처가 강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어떤 특정적인 결과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대인관계에 대한 어려움입니다. 내 성장 과정이나 내 어떤 시기에 내가 남다른 마음의 고통과 아픔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대인관계가 힘듭니다. 무엇이든지 간섭하고 무엇이든지 주장해야만 자기의 마음이 안정이 됩니다. 타인의 주장을 무시하고 꼭 자기 주장이 관철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면 속상합니다. 신경질이 납니다. 집안의 물건들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그대로 놓아야지 흩트리면 화가 납니다. 사람들과 깊이 사귀지 못하고 친구들도 별로 없습니다. 사람을 싫어하여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있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집에 오는 것도 싫어합니다. 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에 주는 것도 모르고 그런 일에 익숙하지도 못 합니다.

그런가 하면, 마음에 상처가 강한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에게 후한 점수를 주기보다는 야박한 점수를 많이 줍니다. 늘 억울해 하기를 잘하고 남을 깎아 내리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나는 똑똑한데 세상 사람들이 무식해서 자기를 알아주지 못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세상이 다 모순이라는 겁니다. 하나님도 서운하고 불공평한 것은 물론이고, 그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분노는 매일 싸늘하고 인정머리 없는 성격으로 굳어져갑니다. 주변에 존중할 사람도, 신뢰할 사람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습니다. 예민하고 날카롭기 때문에 교만한 모습으로 남에게 비추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부정적인 언어나 부정적인 태도가 늘 자신을 괴롭히게 됩니다. 지금 자신의 고난도 고통도 다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에게서 가장 큰 피해자는 제일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배우자들이 많습니다. 형제자매가 고난을 당합니다. 자식들이 고난을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피해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강박적 사고가 내 모든 힘을 신경에만 쏟기 때문에 신경과민에 걸립니다. 그래서 늘 수면 부족의 상태가 되고 이유 없는 우울증에 걸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변덕이 대단히 심합니다. 마음의 갈등이 뼛속 깊은 곳에 들어가기 때문에 번민 가운데에 있습니다. 시편 32편에 뼈가 쇠하여 지고 여름 가뭄처럼 그 진액이 말린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여러분, 자석을 땅에 끌고 다니면 여러 것들이 모여서 큰 덩어리를 형성합니다. 인간이 고난과 고통과 해결되지 않는 모든 마음의 아픔들을 그냥 자석처럼 끌고 다니면 다른 고통들이 끌려 다녀서 큰 덩어리를 만들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정복하는 데 다른 사람의 허락까지 받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해 가운데에 삽니다. 내 마음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데에 다른 사람의 허락이 필요한 줄 압니다. 내 마음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데에 다른 사람이 꼭 개입해야 하는 줄 압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 길의 첫 장애물은 자신이 세워놓은 정신적인 자기 마음의 장애물입니다. 내 마음의 장애물은 남이 세워놓은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의 장애물의 기준도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들어 놓은 마음의 장애물에 내가 짓눌리고 내가 계속해서 강요받습니다. 내가 만들어 놓은 내 마음의 장벽과 장애물. 이것이 피해자들입니다. 이것이 눌려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는 곳에는 자유 함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내 마음에 있는 모든 장벽과 장애물을 다 깨고 나오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과거가 어떻든, 우리의 경험이 어떻든, 우리의 지난날의 고통이 무엇이든 오늘 하나님의 영으로 자유 함을 받으십시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인간이 자기를 믿는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세상에 못 믿을 것은 이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마음을 자기가 믿을 수 없습니다. 자기의 능력이나 자기의 지식도 믿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못 믿을 자기에 근거해서 이웃을 비판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어떤 때는 교만하고, 어떤 때는 절망하고 비굴해집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해 보면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대표적인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 베드로는 정말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도 주책이 없다 할 정도로 실수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저는 베드로를 생각할 때마다 내가 베드로를 닮았는지, 베드로가 나를 닮았는지 모르겠지만 좌우간 많이 닮았다고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도 자신을 한번 베드로에게 투사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5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그를 크게 칭찬하시고 '베드로'라고 하는 귀중한 이름을 주십니다. 베드로는 헬라말로 '페트로스( )'인데, 이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반석, 즉 돌이라는 뜻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이런 말씀으로 그를 축복합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예수님께로부터 그와 같이 엄청난 칭찬을 듣고 보니 베드로는 스스로가 우쭐해졌을 것입니다.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신이 비참하게 허물어지는 것을 그는 느껴야만 했습니다. 그는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되고, 주님으로부터 큰 책망을 받습니다. 본문 23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보고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십니다. 조금 전만 해도 '베드로'라고 하셨는데, 지금은 '사단'이라고 하십니다.

왜 사단이 있느냐?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사단을 만드셨는지, 어째서 사단이 있도록 허락하시는지, 오늘 이 시간에는 구구한 설명을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사단이 왜 있어야 하는지를 알게 될 때가 있을 것을 믿고, 사단이 있다는 그 사실에서부터 출발합시다. 사단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단의 시험에 들기 때문에 문제이지, 사단의 시험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사단이 제아무리 많은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유혹이 아무리 많고 드센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가 유혹을 이길 수만 있다면 유혹은 있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단의 유혹은 누구에게라도 있고 어디에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사단의 유혹이 있었다면 두말할 것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광야 40일 동안에 그토록 엄청난 사단의 시험을 겪으셨습니다. 하물며 우리 같은 사람에게야 얼마나 많겠습니까?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마귀는 네 가지 방법으로 사람을 시험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는, "누구든지 죄를 지으니까 너도 죄를 지어라. 너만 죄인이냐, 다 죄인인데…"라고 유혹을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정도의 짓이야 뭐 어떠냐, 별것 아니다"하고 약간의 죄는 괜찮다고 유혹을 합니다. 셋째는, "한번만 죄를 지어라" 속된 말로 '한탕'만 하라고 유혹을 한다는 것입니다. 범법자들이 대부분 이 '한탕' 때문에 교도소에 갑니다. 넷째는, "아직도 날은 많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이 다음에 기회를 보아서 회개를 하면 그만 아니냐!"하고 유혹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귀의 유혹은 참으로 무섭고 간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훗날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닫고 베드로전서 5장 8절 말씀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에덴동산에서부터 겟세마네까지, 골고다까지, 그리고 성자라 불리는 사람들로부터 속세에 사는 모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사단의 유혹은 집요하게 따라붙습니다. 성전 안에도 있고,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그 시간에도 사단의 유혹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경건 속에도 사단은 역사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단이 유혹을 하는 데는 성역이 없습니다. 사단은 어디에나 뛰어들어서 쉬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혹합니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늘 깨어서 조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사단의 역사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먼저, 사단은 사랑하는 자를 통하여 역사합니다.
많은 제자들 가운데 하필이면 왜 베드로에게 나타났습니까? 가룟 유다가 아니고 이 순간에는 왜 베드로에게 나타났습니까? 사랑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관계라는 것이 때로는 함정이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관계, 내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일이라면 시험될 리가 없습니다. 내가 지극히 좋아하는 것,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바로 그것에 시험의 여지가 있고 함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원수가 집안 식구니라"하는 경고의 말씀도 하셨습니다. 우리네 어른들도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가르쳐왔습니다. 좋은 일에는 흔히 마(魔)가 끼어 들기 쉽다는 말입니다. 교회도 부흥될 때에 사단의 시험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따라 바로 살아보고자 뜨겁게 믿으려고 할 때에 사단의 유혹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여 큰 일을 해 보고자 마음먹고 출발을 할 때에 사단의 시험이 있습니다. 내가 칭찬을 받을 때, 내가 성공을 했을 때, 내가 영광을 누릴 때, 바로 그런 순간에 사단의 무서운 시험이 있습니다. 사실, 부흥하지 않는 교회에는 시험도 없습니다. 그냥 가만히 놔두어도 문 닫을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더 잘 믿으려는 도전이 없는 사람에게도 사단은 시험하지 않습니다. 그냥 가만히 놔두어도 스스로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오거든 그것 때문에 시험에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내 믿음이 그 만큼 더 성장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이시고 기뻐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가 하면 둘째로, 사단은 넘어지게 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못하게 막습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를 가로막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훼방하는 것, 이것이 사단의 유혹입니다.
다음으로, 사단은 나로 하여금 사람의 일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엄숙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알고 보면 결국 자기를 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망이 있고 불평이 있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한다고 하다가도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성이 나서 말썽이 많습니다. 사실은 칭찬 들으려고 그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만히 생각하여 보십시다. 칭찬들을 생각을 하지 않고 했다면 누가 무슨 소리를 한들 상관이 있습니까? 정말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한 일이라면 아무런 잡음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할 때에도 언제나 조심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자기를 위하고,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할 때에 문제가 있습니다. 현재의 고통만 생각하고 장차 올 영광은 생각지 못할 때에 문제가 있습니다. 시험은 이런 경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지 못할 때에 사단의 유혹에 빠집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를 완전히 부정하고 주님을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내 안에 있는 육신의 욕심과 이생의 자랑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십시오. 그렇지 않고 주님을 따르면 그는 영락없이 마귀의 시험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중국의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노(魯)나라에 복부제라고 하는 사람이 신부라고 하는 마을에 원님으로 있었습니다. 어느 해 가을 추수 때가 되었을 때에 제(齊)나라 군사가 이 마을에 쳐들어왔습니다. 마침 들에는 곡식이 누렇게 익어 있었습니다. "저 아까운 곡식을 전부 원수한테 뺏기게 되었구나"하고 마을 사람들이 술렁거렸습니다. 그래서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적이 쳐들어오기 전에 내 것 남의 것 가릴 것 없이 아무나 가서 빨리 거둬 오는 게 좋겠습니다"하고 원님에게 아뢰었더니 원님은 "안 된다. 불을 질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쟁 때이건 평화 시절이건 간에 백성에게 남의 것 공짜로 가지는 버릇을 들여놓으면 나중에 이것을 고치는 데는 10년이라도 어렵다" 옳은 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경우에는 도둑질도 괜찮다느니, 저런 경우에는 남을 속여도 괜찮다느니 하면서 자기의 그릇됨을 합리화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환경에 따라서는 남의 것을 가져도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불한당(不汗黨)이 따로 있습니까? 불한당이란 문자 그대로 '땀(汗)흘리지 않는 무리'를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기억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피땀 흘리지 않고 번 돈은 내게도 이롭지 않고 가정이나 자손에게도 해롭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공짜를 바라지 마십시오. 로또에 인생을 걸지 마십시오. 복권 문화가 발달된 나라치고 건강한 나라가 없습니다. 내가 정당하게 수고하고 땀흘리지 않고서 대가를 바라는 사람이 바로 불한당 같은 사람입니다. 왜 일본 사람들이 불한당입니까? 가만히 있는 우리네 땅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니까 불한당인 겁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이런 불한당 같은 사람이 없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베드로의 고백 속에 사단의 시험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분명히 베드로 나름대로는 예수님을 위한다고 한 짓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사단의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역사적인 자각이 없이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역사는 돌아보지 않고 내 명예만 위하는 그런 마음에 사단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만류를 하고 나섰는지는 잘 모르지만 충분히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이적 능력을 생각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베드로의 생각에는 빌라도나, 헤롯 왕이나, 가야바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풍랑을 잠재우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이 십자가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능력이 있으십니다. 십자가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리고 또 "내 충성이 있지 않습니까? 만에 일이라도 십자가를 지시게 된다면 제가 지지, 주님께서 지시도록 내버려두겠습니까?"라고 자신의 충성을 과시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또 "나라를 회복하는 때가 아닙니까? 이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메시야의 나라가 이루어질 판국인데, 오직 보좌에 앉으실 생각이나 하셔야지요." 이렇게 생각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보는 성경, 자기 나름대로 이해했던 메시야의 나라만 생각하고 예수님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치적인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과 메시야의 나라는 꼭 일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내 사업의 성공과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잘 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을 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실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때도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때로는 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자기 나름대로 가진 메시야관(觀)에 근거해서 예수님께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아주 중요한 뜻을 찾아내게 됩니다. 죄송하지만 조금 성서학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에 22절에 '붙들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붙들다'라는 말은 헬라말로 '프로스라보메노스( )'인데 '라보메노스'만으로도 붙들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성경의 이 내용은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가로막아 서면서 "주여, 그리 마옵소서"하고 만류하는 것이 됩니다.

또 "간하여 가로되"라고 하는데 이때 쓰인 헬라어 '에피티만( )'의 뜻도 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에피티만'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었다는 구절에도 쓰였습니다. 따라서 얼마나 강한 표현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의 베드로는 예수님께 부탁을 드린 것이 아니라 "절대로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어림도 없습니다" 라고 거의 강압적으로 말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셨는데, 오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고 있습니다. 큰일 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베드로를 보고 "사단아, 너는 네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을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베드로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정치적 욕구 따위에만 얽매여 있는 동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중한 진리를 알아들을 귀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음 문이 열려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를 져야 하겠고 삼일만에 부활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얼마나 소중한 말씀인데, 이 말씀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덮어놓고 자기 말만 합니다. 언제나 욕심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모릅니다. 교회에 나와 앉아서도 딴 생각만 합니다.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해서 엉뚱하게도 예수님을 꾸짖다가 큰 책망을 받게 됩니다.
"사단아, 너는 네 뒤로 물러가라."

이 말씀은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베드로가 하고 있는 말을 단순히 베드로의 이야기로 들으신 것이 아닙니다. 일시적인 개인의 실수라고 보시지도 않습니다. 사단의 역사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훼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 이 거룩한 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지시는 십자가인데, 베드로는 하는 수 없이 지시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실수입니다.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이 나를 유혹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시험에 빠뜨린다고 생각합니다. 정작 내가 남을 유혹하는 것으로는 생각지 못합니다. 내가 사단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실수를 합니다. 베드로 자신이 사단이 되어 지금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가로막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가 깊이 생각하여 보십시다. 내가 남을 유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남을 타락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천국 열쇠를 가진 자가 천국 열쇠는 고사하고 남이 하늘나라에 가려고 하는 것마저 방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방해하고 비판하고 좀먹고 있는 것은 아니냐 하는 점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시는데, 원문의 뜻을 보면 이렇습니다. "내 인도자가 되려 하지 말고 내 뒤를 따르는 수종자가 되라" 예수를 앞질러 가면서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하고 하나님의 뜻마저 제멋대로 해석하여 원망할 생각 말고, 뒤로 물러가서 주님을 따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입니다. 그 위에 교회를 세울 반석이지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책망하십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다음에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주님을 위하여 많은 고생을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침내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 충만함을 받은 다음에 3천 명의 군중들 앞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똑바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요, 만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원해서 지시는 것이라고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벗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할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가 따로 있고, 사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이 베드로가 될 수 있고, 반대로 사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에 나는 베드로입니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온전히 질 때에 나는 베드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보다 내가 먼저 앞서가는 순간 나는 사단입니다. 나 자신의 욕망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가로막혀 있다면, 그때 나는 사단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살아가시렵니까?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감으로 인하여 칭찬 듣는 베드로의 인생을 살아가시렵니까? 아니면, 세상의 정욕과 육신의 자랑을 좇아 살아감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가로막는 사단의 인생을 살아가시렵니까?
자신의 지난 날을 돌아보면서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서 사단의 뒤를 좇는 인생이 아니라, 베드로의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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