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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주일,종려주일] 버림 받은 예수 (막 15: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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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한 세기의 가장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1980년 3월에 프랑스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 폐수종으로 입원했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이 병원에서 발악하며 보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찾아온 사람들을 향하여 고함을 치며 절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 곁에 있는 아내에게 조차 묻지 못 했습니다.
그는 현대인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자유라는 수많은 수필과 글을 남겼지만 그의 마지막의 실로 비참했습니다. 그는 자유에 대해 많은 글을 남겼지만, 죽음 앞에서는 그 자유를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공포에 꽁꽁 묶여서 발버둥치며 절규하고 있었습니다.
1980년 4월 16일, 입원한지 한 달 만에 몹시 괴로워 하다가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프랑스의 신문들은  사르트르의 죽음에 대하여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 외쳤던 그의 말로가 어떻게 이렇게 비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 어느 독자는 신문에 이렇게 투고 했습니다.
“샤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샤르트르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습니다. 그는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늘 말해왔지만 죽음 그 다음에 돌아갈 고향이 없었습니다.
반면 독일 고백교회 신학자인 다트리히 본 훼퍼는 세계 대전 중에 독일의 수용소에서 나치에 항거하다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어느 날 한 간수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는데 그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자기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감방에 있던 자기의 동지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동지 여러분! 이제 나에게는 죽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고 시작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하신 아버지의 집에서 만날 때까지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마지막 인사를 하고 감방을 나서는 그에게는 놀라운 평안과 기쁨이 넘쳐 났습니다. 그 감옥에 있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충격과 감동으로 보았습니다. 본 훼퍼,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있었습니다.
죽음은 두 가지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목숨의 끊어짐 곧 심장 기능의 멈춤으로서의 죽음입니다. 타고난 생명의 죽음 곧 명줄이 끊어진 죽음입니다. 이것은 동물로서의 죽음입니다. 이런 것은 “동물이 죽었다.”나 “사람이 주었다”나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죽음이 있나요? 있어요. 그것을 사람으로서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삶의 죽음입니다. 명줄은 붙어 있지만 그의 삶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죽음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민이, 살고자 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죽음을 진지하게 묻습니다.
사람은 잘 죽어야 하는데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잘 산다는 것은 좋은 옷 입고,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여기서 잘 산다는 것은 제대로 사는 것 즉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으로 보면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들이 곧 제대로 죽게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스스로의 생명을 얼마든지 지킬 수 있는 분입니다. 많은 대적자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 했지만,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생명을 살리시는 주님이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이십니다. 그렇기에 얼마든지 죽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그분이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그분 스스로의 죽음입니다.
요한복음 10:17-18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느니라.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스스로 목숨을 버릴 때 죽으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분이 죽으셨다.
그렇다면 스스로의 삶을 포기했다는 것인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셨다고 자신의 삶을 포기하신 것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철저하게 ‘나’ 곧 예수다운 삶을 사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다운 삶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소서” “나의 뜻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그러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셔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 잔이 지나가게 해 주옵소서” 하는 내가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어렵다고들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내가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결혼. 결혼은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자리에서 ‘우리’가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결혼했음에도 ‘내’가 여전히 살아있으면 ‘우리’가 깨지고 맙니다. 맨날 싸우고 그러다 보면 깨지고 마는 겁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우리의 신앙은 어떠하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좇기 위해 자신을 포기 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렇게 외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인데 그 아버지께 자기를 버리셨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요한복음 16:31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아니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그런데 그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비유.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버렸지만 아버지는 그 둘째 아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버리셨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7:11,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알겠느냐?” 그런데 예수님은 그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나?” “이렇게 나를 버리실 건가?” 이 정도가 아닙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절규를 하십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얼마나 괴로우셨으면 그렇게 외치셨을까?” “얼마나 괴로우시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셨다고 까지 생각하셨을까?”
우리 그럴 때 있잖아요?
정말 힘들고 어려우면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나보다.” 온갖 고통과 좌절과 절망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영 버리시지 않은 건가 그렇게 생각할 때도 있잖아요.
또 우리가 하는 일마다 실패 했을 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할 수 없을 때, 아무리 기도해도 병이 낫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버렸구나.” 그런 생각 들잖아요.
또 사회가 혼탁하고 어지러울 때, 폭력이 난무하고, 강도가 들끓고, 살인이 성행하고, 성폭력이 예사로이 저질러질 때, 악한 권력이 인권을 유린하고 자유를 억압할 때, 부자들은 떵떵거리고 잘도 사는데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굶주리고 시달릴 때,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린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랬을까요? 예수님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외치셨을까요? 고통과 좌절과 패배의식과 절망이 절정에 달해서 하나님은 자기를 버렸다고 절규하셨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그런 것들을 다 각오하셨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그분은 이미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새삼스럽게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기에 이런 일 당한다고 생각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셨습니다. 그분은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의 고통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좌절 가운데 있는 아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실패했을 때, 실패 그 너머의 성공을 보게 하시고 우리의 무릎을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그분은 어지러운 죄악이 만연한 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고통을 씻어주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희망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성고이요 힘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나가고 계십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그렇기에 고린도후서 4:7-9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잇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 하며,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는 것”은 비록 질그릇 같은 우리지만 우리 안에 보배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그분의 심히 크신 능력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고 울부짖었을까요?
사실 예수님을 버린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렸어요.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같은 유대의 지배계층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수많은 무리들, 그리고 병 고침 받고 그에게서 비로소 사람으로 인정받았던 밑바닥 계층의 사람들까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예수님을 죽여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외쳤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과 같이 하겠다고 죽어도 예수를 모른다고 하지 않겠다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의 스승 예수님을 돈 받고 팔았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누가 그 오른편이나 왼편에 앉을 거냐고 다투던 제자들은 다 도망갔어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가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과 제자들에게서 버림 받았는데도 한번도 이들에게 버림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너희들 왜 나를 버리고 도망가느냐?”하지 않으셨고, “베드로야 너 왜 나를 모른다 하느냐?” 하지 않으셨어요. “내가 너희 병을 고쳐 주었는데 내가 너희를 사람답게 대우해 주었는데 왜 나를 죽이라 하느냐?” 하시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사람에게 버림을 받으셨으면서도 사람들이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셨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예수님께 있어서 사람은 누구며 하나님은 누구실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사람 따로, 하나님 따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잘하면서 사람에게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면서 사람에게는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사람과 하나님은 따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대하는 것과 하나님 대하는 것을 나누어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 있어 사람과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였습니다.
그렇기에 이웃을 통하지 않고서 하나님께 곧장 가는 길은 없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에게 화해하라고 가르치셨고,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언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해서 사람들을 멀리 하시던가요? 오히려 예수님은 사람들을 더 가까이 하셨습니다. 눈 먼 자 눈뜨게 하셨고, 앉은뱅이 일어나게 하셨고, 듣지 못 한 자 듣게 하시고 말하게 하셨습니다. 나병환자, 중풍병자 등 병자를 고치셨고,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내 쫓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따라다녔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람과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였으며, 그렇기에 사람에게 버림 받은 것은 곧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과 하나님을 때어서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모든 행동을 하나님 앞에서 묻고 검토하고 평가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의 겸손과 성실과 진지함인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승패는 하나님 앞에서 결정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때 그것은 진정한 인정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면 그것은 진정한 인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엄청난 일, 곧 죽은 사람을 살렸다 하더라도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그것은 별 의미가 없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늘 당신이 말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이요, 당신이 하는 행동은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3:44-45에서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하신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일에 대해 하나님의 평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싸움입니다.
신앙생활은 곧 하나님과의 싸움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나의 뜻대로와 아버지의 뜻대로의 싸움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싸움은 하나님의 뜻을 꺾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자는 젓이고, 이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싸움에서 졌다는 것은 악마의 뜻에 굴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과의 밀착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버림 받았다고 생각하는 예수님에게 있어 여전히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신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뜻이었습니다. “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옵소서”하는 이 예수님의 뜻을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입니다.
신앙은 그것을 먼저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싸움에서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끌어안을 수 있는 그것이 곧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왜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셨습니까?
만약, 예수님을 버리지 않으셨다면,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는 잔이 그냥 지나가게 하셨다면,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요?
그랬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버리셨어요. 온갖 고난을 겪고, 마침내 십자가 형틀에서 비참하게 죽게 하셨어요.
예수님은 철저하게 버림받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없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건설 될 수 없거든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것도 말씀으로, 그야말로 말만하면 다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병자 고치시는 것, 귀신 쫓아내는 것, 심지어 죽은 자 살리시는 것도 말씀만 하시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아닙니다. 진정한 생명을 주는 것은 말로 되는 것 아닙니다. 생명은 생명을 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피는 피를 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희생과 죽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거든요.
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하셨습니까? 그 분의 죽으심으로, 그분의 피 흘리심으로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 단번에 드림 바 되셨고,”
히브리서 13:22, “그러므로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대속의 뜻을 새롭게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버림 받으신 것은 그 자신이 버림 받으므로 여러분과 저가 버림 받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엔리비젤의 “밤”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엔리비젤이 직접 겪었던 이야기를 소설로 쓴 것인데, 어느 날,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에서 유대인이 교수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어른은 빨리 죽었지만 어린아이는 목에 밧줄이 걸린 채 오랫동안 발버둥치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유대인들 “우리 하나님은 어디계시냐?” 그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런 처참한 일이 어떻게 벌어 질 수 있느냐?” 그러나 한 유대인이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저 나무에 매달려 발버둥치고 있지 않느냐?”
함께 죽으시는 하나님. 이것 아니면 인간에게 구원이 없습니다. 함께 죽으신 하나님이 부활하실 때 함께 죽은 그리스도인들도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대신 죽으신 하나님”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물론, “대속”이라는 말은 “대신 죄 값을 치루었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드려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대신 생명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밥상을 예수님께서 차려 놓으시면 가서 먹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을 은혜요 믿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대신 죽으심”보다는 “함께 죽으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주제, 특히 1-8장까지 “너희는 모두 죄인이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누구든지 모두 죄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너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그리고 부활하셨다.”는 겁니다.
로마서는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너희도 죽었다는 것이고, 또한 예수님께서 살아나심으로 너희도 살았다는 겁니다.
로마서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게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지고 자기는 죽은 것, 그런 것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죽는 자와 함께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살아나실 때 함께 죽은 자들 또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대신” 이라기보다는 “함께”라는 의미가 큽니다.
이것을 아셔야 해요.
누구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면, 우리는 죽음에서 다시 사신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 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3:12,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13절, “그러므로 우리도 진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

우린, 행복한 교회 행복한 가정 행복한 사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고통과 희생과 죽음에 함께 할 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과 죽음에 버려 대속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예수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예수님은 죽음에 버리신 것 같지만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다시 살리셔서 죽음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역시 죽음을 이기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참하십시오.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내 뜻 내 원, 내 뜻들이 버림 받아야 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절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랬어요.
십자가 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절규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하나 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뜻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내 뜻 버리면 하나님과 하나 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승리가 있고 그때 우리는 승리를 체험합니다.
자신 있게 십자가 지십시오.
주저 말고 주님과 함께 죽으십시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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