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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주일,종려주일] 인자의 온 것은 (눅 18:31~눅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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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사람이 무슨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에는 본인이 직접 그 현장으로 찾아가게 됩니다. 별 것 아닌 일이라면 집안의 자녀를 시키든지 회사 직원을 대신 보내어 처리하겠지만, 외국 여행 갔다가 돌아오는 아내를 마중할 때에는 그래도 남편이 직접 나가야 하고 사운이 걸린 중대한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사장이 직접 바이어(buyer)를 만나보아야 합니다. 그처럼 남편이 몸소 공항까지 마중 나와 줄 때 아내 쪽에서도 더욱 뜨거운 감동과 애정이 생기는 것이며, 회사 사장이 직접 나와서 극진한 대접을 베풀어 줄 때 바이어 쪽에서도 거래 성사에 더욱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원래 성자 하나님이셨던 주님께서는 ‘화육강생’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통하여 스스로 이 세상에 오셔서 친히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저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만물과 만인을 다스리시던 하나님이셨으니 무슨 일이든지 다른 사람을 시켜서 하실 수 있는 분이셨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몸소 이 땅까지 찾아오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수난주간 제1일에 해당되는 ‘종려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왕 중의 왕이시며 주 중의 주 되신 성자께서 친히 이처럼 우리에게 가까이 찾아와 주신 그 신기한 의미를 반드시 깨닫고 새겨야 할 날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왜 이 세상에까지 직접 찾아와 주셔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주님의 수난 주간 직전에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 구원의 길을 여는 대속 사역을 반드시 성취하기 위하여 친히 세상까지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 31절로부터 34절에 기록하기를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은 일반적으로 예수님께서 ‘세 번째’ 수난을 예고하신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실상은 누가복음에서만 해도 일곱 번째 수난 예고에 해당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 즉 구약 성경에 예언된 사실들이 「인자」에게 즉 ‘메시아’에게 그대로 응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메시아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 로마 제국을 대항하는 민중 혁명을 일으킬 메시아가 아니라, 오히려 그 「이방인」들에게 수난과 죽임을 당할 메시아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그 메시아는 「삼일만에 살아나는」 부활로써 자신의 메시아 됨을 만천하에 증거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이상한 메시아 선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소리였습니다. ‘구세주’라는 사람이 지금 자기네들에게 현실적으로 가장 큰 고통을 주고 있는 로마 압제로부터 무슨 구원을 베풀어 주기는커녕, 도리어 그 원수들에게 비참하게 고통 받고 죽게 되는 것이 어떻게 자기네들에게 구원이 된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조차 그런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귀와 마음에 ‘감추어지고’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할 말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후에 부활하신 후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십자가만이 진짜 구세주의 위대한 사역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체포되어 공회 앞에 서게 되었을 때 베드로는 말하기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게 한」 유일한 이름이라고 당당히 증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요 석학이었던 사도 바울 역시 자기가 이전에 알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치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대속 사역’ 즉 당신의 몸을 대신 죄값으로 희생시키심으로써, 죄인의 무조건 용서를 가능케 만든 이 하나님 구속사의 핵심 사건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사역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결코 다른 사람에게 대신 시킬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구약의 수많은 희생 짐승들을 통해서는 도무지 될 일이 아니었고 열두 제자들 모두를 한꺼번에 십자가에서 죽게 한다고 해도 이룰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직 구세주께서 친히 현장에 오셔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틀림없이 완성하셔야 했을 정도로 이 ‘대속 사역’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 전체의 성패가 달린 중요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대기업의 회장이 직접 현장에 나오면 사원들 모두가 일단 긴장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그 회장이 자기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몸소 그 작업을 실시까지 해 본다면 그것을 보면서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을 사원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의 대속 사역을 행하시기 전까지 우리들은 하나님의 구속사란 것을 그렇게 실감나게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자신에게 죄 용서란 것이 왜 필요한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 죄인들 사는 곳에 하나님의 성자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바로 우리 눈앞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이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좀 정신이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세주께서 친히 이렇게까지 몸소 행해 주시는 것을 본다면 우리의 닫힌 마음이 좀 열리고 교만한 심령이 좀 낮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원 역사의 주인 되신 구세주께서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아니하고 스스로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죽음까지 당하시면서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이 놀라운 사건을 보면서, ‘천하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해 준’ 이 위대한 대속 사역을 깨닫고 감사하고 전파하며 수난 주간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 얻을 수 있는 신앙을 고백하게 하시기 위하여 친히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이어지는 누가복음 18장 35절 이하 43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여리고성을 지나실 때였습니다. 그 동네 길가에서 구걸하던 한 소경이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일까?’ 하며 궁금해 했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소경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때 아닌 고함소리에 상을 찡그리면서 시끄럽다고 야단을 쳤지만, 그 소경은 더욱 소리 질러 예수님을 부르며 자비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소경을 당신 앞으로 데려 오게 하신 후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그 소경은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고, 예수님께서는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그 소경이 예수님께 대하여 과연 어떤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까? 이 사건의 전모를 그냥 대강 읽어보면 소경의 언행에서 무슨 ‘믿음’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소경은 우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그 소경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른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표현은, 혈통적으로 다윗의 자손 된 사람이면 아무나 다 불러 줄 수 있는 말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메시아의 또 다른 칭호로서, 오직 메시아를 부를 때만 쓸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여리고의 다른 동네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즉 ‘나사렛이란 동네 출신의 예수라는 사람’으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소경은 곁의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가르쳐 줄 때 그대로 부르지 아니하고 그 대신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불렀던 것은, 그가 이미 평소부터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믿고 있었음을 명백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 소경은 또한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는 메시아이신 것도 믿고 있었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예수님께서 물어 보셨을 때, 그는 평소처럼 돈 한 푼 달라는 따위의 적선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자기 눈을 뜨게 해 달라는 소원을 드렸던 것입니다.

상대방을 보통 사람으로 생각했더라면 그 소경이 이런 소원을 말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미친 놈’이란 소리나 듣고 쫓겨날 것이며, 그보다는 동냥이나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백배 더 낫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그 소경 자신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께 자기 눈을 뜨고 보게 해 달라고 소원했다는 것은, 그가 이미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능력까지 조금도 의심 없이 믿고 있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선언하시면서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친히 오심으로써 사람은 하나님을 친히 자기 눈으로 뵈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화육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실상은 그 얼마나 뚜렷하고 밝은 것이었던지, 비단 눈뜬 사람뿐 아니라 눈먼 사람까지도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적적인 시력은 바로 ‘신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요구하는 제자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친히 우리에게까지 찾아오신 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친히 만나고 볼 수 있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듣고서도, 예수님을 보고서도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믿을 수 없다면,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다른 구원의 길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소경까지도 보고 고백할 수 있었던 예수님이 그 눈에 도무지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도대체 무슨 다른 방도로 구원 얻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야말로 그리스도이시며 자기를 도우실 수 있는 능력의 구세주임을 분명히 믿는 신앙이 우리의 영혼의 눈을 밝히 뜨게 해 주며, 바로 그 신앙만 가지면 육신과 영혼의 구원을 함께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수난주간 동안, 완전하신 인간으로, 구원의 지혜와 능력이 충만하신 구세주로 이 땅에 나타나신 이 하나님의 독생자를 더욱 가까이 만나봄으로써,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뚜렷하게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직접 만나서 그들로 하여금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하게 만들기 위하여 스스로 화육강생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절로 9절에 기록하기를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 유명한 사건 역시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 일어났습니다. 삭개오를 가리켜 「세리장」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자기 밑에 다른 세금 징수원들을 많이 부리고 있는 세리 우두머리를 뜻합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과 그 동쪽 인접 지역을 연결하는 상업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활발한 도시였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자기 관할 구역 안에서 독점적으로 마음대로 착복할 수 있는 자리가 세리였는데, 더욱이 그런 부유한 지역의 세리장이었으니 삭개오는 정말 「부자」라도 큰 부자였을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이야기할 때, 삭개오가 열심을 내어 예수님을 보려 했다는 점만 강조하기 쉽습니다. 키가 작은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뽕나무 위에 올라가는 열성까지 보이면서 예수님을 만나려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려 했다기보다는 예수님 편에서 오히려 삭개오를 적극적으로 찾아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삭개오는 그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즉 그가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마음은 그저 호기심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세리란 직업은 온 동족으로부터 미움받는 것이었고, 항상 동네 사람으로부터 따돌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동네 사람들이 삭개오 집에 찾아가는 예수님을 보고 「수군거리며」 말하기를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라고 비난한 것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삭개오로서는 자기 같은 사람을 예수님께서 특별히 만나 주시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할 처지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삭개오 자신이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보시면서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반드시 해야 하겠다 (must)’란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삭개오가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예수님 편에서 자기 같은 사람과 교제해 주시겠다고 먼저 말씀해 주실 줄은 꿈도 꾸지 못했는데, 온 동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너무 좋았던 것입니다.

그처럼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와 주셨을 때, 삭개오의 인격과 심령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까? 그는 예수님께서 무어라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는데도, 자기편에서 스스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로 갚겠다」고 서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삭개오의 모습이야말로 바로 「구원 받은」 자의 증거이며 「아브라함의 자손」 즉 진짜 택함 입은 사람의 증거라고 선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죄인을 찾아와 주시기 전에는 우리 모두가 다 자기 죄에 대해서는 전혀 둔감한 자들이었습니다. 남이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티’까지 들추어내면서도 자기 잘못에 대해서는 ‘눈 속에 있는 들보’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법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니 ‘양심적인 인간’이니 해도, 실상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철면피의 탈을 쓰고 살던 ‘세리’와 오십보백보의 차이에 불과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제 잘난 줄 알고 살던’ 우리 앞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그저 곁에 있는 사람들끼리만 비교해 보던 우리들이 이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순결 100퍼센트의 ‘어린 양’과 자신을 나란히 비교해 볼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게 무슨 비교가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내 곁에 서시는 바로 그 순간 내가 얼마나 더럽고 추하고 악독한 죄인인지는 첫 눈에 뚜렷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죄인을 가리켜 죄인이라고 굳이 정죄하실 필요조차도 없으십니다. 그냥 죄인 곁에 찾아와 주기만 하셔도, 제아무리 낯 두껍고 뻔뻔스러웠던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앞에서는 그 굳어 있던 얼굴이 새빨개질 수밖에 없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하신 예수님 앞에 자신을 비교해 봄으로써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약하고 악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처럼 못난 죄인을 먼저 찾아와 주시고 끝까지 사랑으로만 대해 주시는 우리 예수님을 이번 수난 주간 내내 자신의 심령에 모셔 들여 놓고서, 그 앞에서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함으로써 용서를 받고 새 생활의 결단을 서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성자 하나님이신 우리 예수님의 신분은 이 낮고 천한 세상까지 몸소 찾아오실만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정말 무슨 일이든지 당신의 천사를 보내셔서 대신 하게 하실 수도 있었고, 그냥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얼마든지 시킬 수도 있는 권위를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구속사의 최고의 위치에 계신 구세주께서 이 구속사의 현장인 세상까지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왜냐하면 남에게 맡길 수 없고 오직 직접 완벽하게 성취시켜야만 할 중요한 일이 있었고, 꼭 직접 만나서 감동시키고 변화시켜야 할 소중한 대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을 두고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말씀 19장 10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밝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 즉 스스로의 교만과 패역에 빠져서 하나님의 자녀의 지위를 잃어버렸던 자들을 직접 만나 주심으로써, 그들의 마음이 감동을 받아 회개하고 변화를 받아 믿음을 가지도록 해 주려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려」 하는 이 중차대한 일에 절대로 착오나 실수가 없게 하기 위하여 아예 친히 그 죄인들이 죽어가는 현장에까지 오셔서 십자가의 대속사역을 완벽하게 처리해 주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놀라운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은 반드시 그 화육하신 성자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고 구원 얻을 수 있는 믿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신데도 이처럼 친히 낮고 천한 우리를 먼저 찾아와 주셨으며, 우리 같은 죄인이 아니라 지극히 순결하고 거룩하신 구세주이심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우리 곁에 가까이 함께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구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십자가 대속 사역’을 친히 완성해 주시려고 우리에게 찾아오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뵙고, 그 구원 능력을 믿는 ‘소경’의 신앙고백을 드리며, 그 사죄 은총을 입는 ‘삭개오’의 회개와 서원을, 이번 고난주간을 통하여 매일 주님 앞에 바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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