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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주일,종려주일] 예수의 사형선고 (마 2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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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유병의 목사
 
  1865년 4월 14일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하염없이 피를 흘리며 암살을 당해 죽었습니다.
평화를 위하여 노예해방을 위하여 싸웠던 숭고한 평화주의자였기에 그의 죽음은 전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가 사망한 후 시신이 일리노이스의 스프링휠드로 운송되었습니다. 장사행렬이 한 간선도로를 지날 때 한 흑인부인이 작은 아들을 높이 쳐들고 “ 꼬마야! 잘 봐두어라. 너를 위해 돌아가신 분이란다.” 울먹이며 아들에게 링컨의 정신을 기억시켜 주었습니다. 비록 그는 죽었지만 링컨은 죽은 것이 아니라 생명이며 살아있는 정신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정신은 무엇일까요? 기독교의 생명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과 부활을 앞에 두고 최후의 7일의 행적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이 고난주간 혹은 수난주간에는 빵과 소금과 식물과 물 이외에 일체의 육류음식을 금하고  금식을 하며 예수님의 고난의 발자취를 기억하고 구별되게 지냈습니다.

레오도시우스의 시대는 공사 간 모든 업무를 휴무하고 법정까지도 폐쇄하고 죄수와 노예를 사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기사를 읽으면서 경건하게 고난주간을 지키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지상생활의 마지막 일주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고난의 길 슬픔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고난주간의 의미는 퇴색되어 버리고 변질되어 그리스도인으로서 구별됨이나 고난에 동참하는 의식도 없이 한낮 종교행사정도로 행해지고 있는 모습이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훗날 성숙하여 이렇게 전해줍니다.
(벧전2: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님의 고난 가운데 최대의 절정은 십자가입니다
오늘 종려주일아침  사형선고를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고자합니다.
예수님은 부당하게 고발되어 법정에서 심문을 받고 부당한 선고로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게 됩니다. 법정에 고발 자는 누구이며 예수를 죽일 것을 요구한 무리는 누구이며
의로운 주님께 사형선고를 내리는 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1. 예수를 고발한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을 죽일 것을 요구하고 고발한자들은 누구입니까? 살인강도나 악당들이 아닙니다.
2절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다고 주님께서 지적하셨습니다.
이는 교만과 독선 권위주의에 젖어있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4절에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들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언행 불일치자들입니다.
5절에는 저들은 모든 행위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몸에 경문을 넓게 하며 옷 술을 크게 하였다고 그들의 외식을 지적하였습니다.  허영과 외식의 사람들입니다.
6,7절에는 잔치의 상석에 앉아 랍비라고 인사 받는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우월주의자 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일곱 번이나 반복하여 저주를 선언하셨습니다.(13, 15, 16 ,23, 25, 27, 29)

주님은 바로 이러한 무리들에게 죽여 달라고 고발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진실하였기에 거짓된 외식자들에게 고발을 당하셨다 주님은 겸손하셨기에 교만한 우월주의 자들 허영과 독선자들에게 고발을 당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역시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외식과 독선과 세속과 교만 가운데 있어 세인들에게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의 길을 걸어가지 않기 때문에 욕을 먹습니다. 종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에 존경을 잃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의 모습을 버렸기에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 사형선고를 한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께 사형선고를 내린 자는 빌라도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접수받고 여러 차례 만나 심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 아무런 혐의 점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를 사형선고를 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그가 현실에 집착하였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현실주의자는 현실과 야합과 대중과 영합하고 권력과 타협합니다.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고 비겁한 결단을 내립니다. 제사장의 권위 군중의 함성에는 귀를 기울이지만 세미하게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는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살기위해 조금도 굽실거리거나 야합과 타협과 비겁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18:37에 봅시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라고 외쳤습니다.

빌라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존심에 억압되어 “나는 너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고 하면서 예수를 내리치며 무릎을 꿇게 하고 그 머리를 쳤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 할지어다, 라고 조롱하였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갈대를 오른 손에 들려주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희롱하였습니다. 침을 뱉고 뺨을 때리고 수염을 잡아 댕깁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타협하지 않고 묵묵히 당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께 사형선고를 내리고 이일에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대야에 손을 씻었습니다.
그는 양심의 세미한 소리에 외면하여 밤에 그 아내에게 주신 계시의 말씀에도 외면하였습니다. 결국은 예수님께 사형을 선언했습니다.

주님은 왜 이렇게 죽으셔야만 했을까요?
(요일2:2)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이번 주간 고난 주간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고발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외식과 교만과 독선의 죄를 벗겨버리는 기간이여야 하겠습니다. 
빌라도의 현실과 권력과 대중에 영합하려는 아부와 타협과 야합의 악습을 버리고
대중의 함성보다는 세미한 양심의 소리와 하나님의 계시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진리를 택하였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조용히 묵묵히 따르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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