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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주일,종려주일] 저주를 짊어지신 예수 (갈 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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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저주를 짊어지신 예수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갈 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구약성경을 보면 창세기 3장 이전과 이후의 상황이 전혀 다른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이전은 인류의 타락 이전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만물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하시고 기뻐하셨습니다.(창 1:31) 
  그런데 3장 이후, 즉 타락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셨습니다. 사람도 타락 전에는 이름 그대로 사람이지만(창 2:15,19) 타락 후에는 그냥, 흙 혹은 육체(肉體)라고 하였습니다.
(창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 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肉體)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 십 년이 되리라 
  하나님의 영이 떠나므로 육체(肉體), 곧 금수(禽獸)처럼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치가 하락되어 수에 칠 가치조차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2:22) 너희는 인생(人生)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귀한 것들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모두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고 급기야는 폐기처분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걸작품들이 깨지고 고장나서 못쓰게 된 중고품(中古品)이 된 겁니다. 
이렇게 

1. 모든 인간(人間)은 율법(律法)아래서 저주(詛呪)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인간(人間)은 하나님의 법(法)을 지키지 못해서 범법자(犯法者)가 되었고 그 결과 저주 아래 살게 됐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창세기 3장을 보면 선악과를 범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임합니다. 
(창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먼저 모든 사람에게 인생고(人生苦)의 저주가 임했습니다. 여자(女子)에게는 잉태하는 고통과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남자(男子)들에게는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땀흘리며 파김치가 되도록 일을 해야만 가족을 부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게 인생고의 저주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환경도 저주를 받았습니다.
(창 3:17-18)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요즘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폭염(暴炎), 가뭄과 홍수 등 이상기온,  기근(饑饉), 지진(地震), 전쟁(戰爭), 사스의 재난(災難) 등의 천재지변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연환경의 저주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질병(疾病)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위하여 지음 받은 인간이 사단에 의하여 죄악의 병기(兵器)로, 범죄(犯罪)의 도구로 쓰여집니다. 고장난 인격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이 심각합니다. 지난주간 어느 초등학교 교장이 목을 메고 자살(自殺)을 하였습니다.
  궁극적인 저주(詛呪)는 인간 누구에게나 닥치는 사망(死亡)과 심판(審判)의 저주입니다. 아무도 저주의 죽음에서 제외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律法)은 공의롭고 냉정합니다. 모든 법을 다 지키다가도 한가지만 어겨도 범법자가 됩니다. 이 저주는 자식에게까지 대대로 유전(遺傳)됩니다. 
  인간(人間)은 이 같은 저주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여러 가지 욕심(慾心)을 내봅니다. 명예와 지위, 권세도 가져보고 많은 물질(物質)도 소유해 봅니다. 술, 마약, 성적 쾌락에 취해봅니다. 다 부질 없는 짓입니다. 
  마치 달리는 관광차 안에서 마시고 취하고 흔들고 즐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관광차는 조금 있으면 한강 물로 떨어지게 되고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습니다. 그러니 그게 무슨 즐거움이며, 무슨 낙(樂)입니까? 불붙고 있는 중앙로 역을 향해 질주하는 전동차와 같습니다. 죽음과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운명이 이와 똑 같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탄식(歎息)하고 있습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런데 여기, 절망(絶望) 중에 있는 인간에게 한줄기의 희망의 빛이 보입니다. 뱀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 중에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기에 여자의 후손이 나오고 가죽옷이 나옵니다. 누구 얘기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福音)이 여기 있는 겁니다. 창세기에 있는 원시복음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2. 예수께서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시므로 인류의 저주(詛呪)를 담당하시는 겁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이 짊어지게 된 저주가 예수에게로 옮겨졌고, 예수께서 인류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는 겁니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사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속량이란 '대속(代贖)과 같은 뜻으로 값을 대신 지불하고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 13절을 읽겠습니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한 노예(奴隸)가 있었습니다. 그는 엄한 주인 밑에서 매일 매를 맞고 학대를 받았습니다. 아무리 주인의 마음에 들도록 열심히 일을 해도 주인은 뭐가 그리 불만인지 노예를 매일 두들겨 팼습니다. 노예는 너무나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죽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웃에 부자(富者)가 이 노예를 불쌍히 여겨서 거금(巨金)을 주고 그 노예를 샀습니다. 그리고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이제 노예(奴隸)가 아니라 자유인(自由人)입니다. 드디어 행복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짓고 마귀의 노예가 되어 상하고 찢기고 매맞아 어느 한군데도 성한 곳이 없는 여러분과 나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속죄(贖罪)해 주시기로 작정하신 겁니다. 구약(舊約)시대에는 흠 없는 어린양을 제물로 속죄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매번 드려야합니다.
  하나님은 단번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는 제물을 계획하셨습니다.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흠 없는 자기의 독생자를 제물로 삼고자 한 겁니다. 세례요한이 말 한 대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本體)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가지신 분이 희생양이 되신 겁니다. 여러분, 속죄양이 죽는 모습은 참으로 불쌍한 겁니다.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거니까요. 예수님이 이번 주간, 고난 주간에 이런 고난(苦難)을 당하십니다.

  로마 군병들에게 체포되어 끌려가신 예수님은 온갖 희롱과 멸시를 다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군인은 예수의 손에 들려졌던 갈대를 빼앗아 예수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은 날카로운 쇠붙이와 뼈 조각이 달린 채찍으로 수없이 맞았습니다. 채찍에 맞을 때마다 살점이 떨어지고 붉은 선혈(鮮血)이 흘렀습니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가시면류관을 씌웠습니다. 얼굴에도 피가 흘렀습니다. 
  사형장인 골고다 언덕에 이르자 군사(軍士)들은 십자가 형틀에 주님의 사지(四肢)를 벌리게 하고 손과 발에 쇠못을 박았습니다. 얼마나 아팠을까요? 못을 다 박고 십자가 형틀을 일으켜 세울 때 예수님의 손과 발은 몸무게를 못 이겨 찢어졌습니다. 찢어진 못 구멍사이로 붉은 피가 쏟아졌습니다.
  예수님은 고통 때문에 발에 힘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고통은 더 컸습니다. 군병(軍兵)들은 예수님의 옆구리를 긴 창으로 찔렀습니다. 이것이 저주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저주를 우리 대신 받는 겁니다. 예수는 숨을 몰아쉬면서 소리 쳤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이 찢어졌을까요. 사랑하는 자식을 저주의 십자가에 매달았을 때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아들 둘이 불타 죽은 쉬몰크 목사에게 너는 죄 없는 내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할 때 내 마음을 생각해 봤니? 물으셨대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지은 찬송이 431장입니다.
    ♠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끝내 예수는 6시간 동안 그 모진 고통을 당하다가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 때만은 하나님도 예수를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철저하게 심판하시는 공의(公義)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한 인간에 대한 진노(震怒)를 십자가에 달린 예수께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3. 십자가(十字架)만이 저주의 멍에를 끊고 영원(永遠)한 복(福)을 회복시켜줍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십자가의 형벌(刑罰)과 저주(詛呪)는 내가 받아야할 저주요,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저주의 십자가나무에 달린 자가 되셨습니다.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가지 죄에 대하여 두 사람이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십자가(十字架)는 피뢰침입니다. 천둥치는 날 피뢰침 밑에 있으면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피뢰침이 대신 벼락을 맞아주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에 내가 또 저주받을 일은 없습니다.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定罪)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生命)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음이라
  그럼에도 십자가를 거부하면 지옥(地獄)의 저주와 심판이 기다라고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외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이제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영생(永生)이 보장되었습니다.
(요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復活)이요 생명(生命)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 5:24) 내 말을 듣고 또 나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永生)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死亡)에서 생명(生命)으로 옮겼느니라.
(롬 6:23) 죄의 삯은 사망(死亡)이요 하나님의 은사(恩賜)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것이 믿는 자들에게 약속된 아브라함의 복입니다.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을 받고 하나님을 모시고 살게 되었습니다.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갈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根源)이 되었습니다. 이 복이 여러분에게 임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도 복을 나눠주는 복의 샘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4. 이제 우리도 십자가(十字架)만 사랑하고 십자가만 자랑하며 삽시다. 

  십자가가 우리를 살렸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사랑하고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이요, 나의 신앙고백이 되어야합니다. 
(갈 6:14)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옛날에는 십자가가 저주의 상징이었으나 이제는 사랑과 희생의 상징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의 마음에는 이 십자가의 사랑이 새겨져 있습니다.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라는 명작(名作) 소설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 소설을 감명 깊게 읽으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 소설의 작가는 미국의 나타니엘 호손입니다. 17세기 중엽, 미국 보스턴에서 일어난 간통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늙은 의사(醫師)와 결혼한 헤스터 프린(Hester Prynne)이라는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 주인공입니다. 이 여인이 남편보다 먼저 미국(美國)으로 이주해 와서 살게 되었는데 곧 뒤따라오겠다는 남편은 2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이 여인은 펄(Pearl)이라는 사생아(私生兒)를 낳게됩니다. 
  엄격한 청교도(淸敎徒) 윤리가 지배하던 사회인지라 시민들은 이 여인의 부도덕한 행위가 자신들 모두에게 수치라고 여기며 이런 여자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고발(告發)을 하였습니다. 판사(判事)들은 이 여인에게 간통한 죄에 대한 형벌로 가슴에 간통(Adultery)이란 영어 글씨 첫 자인 'A'자를 달고 일생을 살라는 형을 선고합니다. 우리나라에 청소년을 상대로 한 성범죄자의 명단을 공개하고 사회 봉사명령을 내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드디어 수년 후에 그녀의 남편이 나타났습니다. 남편은 아이의 아비가  누구인가를 밝히고 회개(悔改)한다면 용서해주고 그녀의 가슴에서 수치스런  'A'자의 주홍글씨를 떼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끝내 간통한 상대 남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누군지 아세요?) 마을 사람들은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고 다니는 그녀를 멸시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묵묵히 이 모든 수치를 참아냅니다. 
  감금(監禁)상태에서 풀려난 이 여인(女人)은 마을에서 떨어진 숲 속 외딴 오두막집에서 살면서 삯바느질을 하면 아이와 함께 살아갑니다. 성실하게 일하였고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던 그녀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일감 주문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바느질로 고생을 해서 번 돈으로 가난한 이웃을 은밀히 돕는 일을 합니다. 자신은 매우 검소하고 절제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해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속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녀의 가슴에 달고 있던 주홍글씨는 더 이상 수치와 부끄러움의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겸손과 사랑과 섬김을 상징하게됩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사랑과 희생이 주홍글씨를 자랑스런 상징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만 해도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극악무도한 죄수(罪囚)을 달아 죽이는 소름끼치는 사형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심 다음부터는 오히려 사랑과 희생의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쁜 여인들도 십자가 목걸이를 달고 다닙니다. 그게 사형틀이라면 누가 달고 다니겠습니까? 국제 적십자를 의미하는 붉은 십자가 표시도 사람을 살리는 표시가 되어 전쟁 중에라도 어디든 그냥 통과시켜 줍니다. 병원 앰블런스나 119구조대 같은 데서도 십자가 표시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자랑해야합니다. 십자가를 말해야하고 증거 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십자가의 복음(福音)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의 빚을 갚는 겁니다. 
  전에 한 선교사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길렀답니다. 이 아이가 성장해서 초등학교를 다니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느 날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에 대하여 묻더랍니다. '내 어머니는 누구 신데 왜 나를 버렸느냐'고 말입니다. 그제 서야 선교사는 이 아이의 어머니에 대하여 얘기를 해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을 하고 그 동안 굳게 다문 입을 열었답니다.
  지금부터 10여 년 전 너무도 혹독하게 추운 어느 날, 선교사가 어느 가난한 지역을 선교하다가 애기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벌거벗은 엄마의 가슴에서 한 아기가 울고 있었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며칠 굶은 엄마가 우는 아이를 위해 젖동냥을 하러 나섰다가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쓰러진 겁니다. 아이를 염려한 엄마가 자기의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어서 아기를 싸매 주고 또 싸매 주고 했답니다. 결국은 엄마는 벗은 몸으로 추위에 떨다가 얼어죽고 말았지만 다행이 아이는 선교사에게 발견되어 죽지 않고 살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너라고 얘기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엄마의 장례를 치렀다는 얘기까지 해주었답니다.
  자기의 엄마에 대한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아이는 말없이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아이가 있는 것을 찾아보니 이 아이는 죽은 엄마의 무덤에 와 있었는데, 아이는 엄마의 무덤 앞에서 벗은 몸으로 울고 있었답니다. 아이는 흐느껴 울면서 자기의 옷을 하나씩 벗어서 엄마의 무덤을 덮어주면서 '엄마 얼마나 추우셨어요. 얼마나 견디기가 힘드셨어요.'   
  이것이 마땅한 인간(人間)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어린 아이도 엄마의 희생을 아는데 우리가 날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면 어찌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살을 주시고 피를 마시게 한 주님의 사랑을 어찌 잊을 수 있습니까?     

        141장을 부르겠습니다.
1.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2.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3.  주 십자가 못 박힐 때 그 해도 빛 잃고
  그 밝은 빛 가리워서 캄캄케 되었네
4.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와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5.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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