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고난주일,종려주일] 너희 왕을 보라 (삼상 10:17-24, 요 19:14-16, ..

  • 잡초 잡초
  • 425
  • 0

첨부 1


- 설교 : 김오동 목사

1.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의 33년 생애 중 마지막 3년 간 메시야로서 공생애를 가지셨는데 그 마지막 한 주간이 예수님의 전 생애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한 주간을 우리는 성주간 또는 고난 주간이라고 합니다. 이 한 주간동안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계셨으며 메시야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속죄의 대업을 완성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 십자가에 빌라도가 붙인 죄 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습니다. 십자가는 그 왕의 보좌요, 그가 쓰신 가시관은 왕의 면류관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왕으로서 마지막을 장식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바로 왕으로서의 승리의 입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시에 그런 형식을 취했습니다. 물론 나귀 새끼를 타시고 들어가셨으나 그것이 바로 그 왕의 성격을 나타내 줍니다. 그는 평화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왕이 가는 길에 화려한 카펫 대신 자기들의 옷을 벗어 깔아 드렸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하면서 왕을 맞이하는 예를 갖추었습니다. 옛날 구약의 스가랴 선지자는 이 사건을 미리 예언했는데 "보라 너희 왕이 너희에게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 교회는 해마다 부활절 전 주일을 종려주일로 지킵니다. 이미 주님은 그 옛날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데도 아직도 우리가 이 절기를 지키는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이 사건이 옛날 거기서 있었던 사건이었음과 동시에 오늘 우리에게도 꼭 같은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이 왕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요구했습니다. 심지어 당시 유대인들은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 왕이 없다"고 하면서 까지 예수 왕을 거부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왕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되기를 거부하고 포기했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집어 팽개치듯, 가룟 유다가 주님 제자 직을 짓밟아 버렸듯이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도 왕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 우리 마음 문 열기를 요구하시는 주님 앞에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해 드렸습니까? 아니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왕으로 모시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우리 교회에 주님이 왕으로 임재하시고 역사하십니까?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향하여 "보라 너희 왕이 너희에게 오시는도다"라고 하시는데 우리 교회는 문을 활짝 열고 주님을 왕으로 모실 수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지금 겉으로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나이다"라고 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예수님 외에 다른 왕을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과연 오늘 나와 우리에게 왕은 누구이신가 이것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종려 주일을 지키는 의미인줄 믿습니다.

2. 오늘 구약 성경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무엘이 유대인의 맨 처음 왕인 사울을 백성들에게 소개하는 장면입니다. 거기서 사무엘은 마치 오늘 빌라도처럼 백성들에게 사울을 내세우면서 "너희의 왕을 보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왕의 만세"를 불렀습니다. 이리하여 역사상 최초로 이스라엘은 왕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위해 세운 왕은 그 백성을 모든 전쟁과 재난에서 구원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선정을 베푸는 일이었습니다. 사울은 처음 얼마동안은 왕의 직무에 충실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곧 그는 그 왕권을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했고, 백성들의 기대를 짓밟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위하여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새 정치인들처럼 순전히 자기 위주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왕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왕을 택했습니다. 그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믿음의 왕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참 왕이셨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 뜻을 이루기만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이 왕위를 영원히 잇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역대 다윗의 후손들이 하나같이 다윗처럼 선정을 베풀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후손, 왕"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폐기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의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붙잡고 그 다윗의 후손, 왕이 오시기를 고대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메시야 대망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스라엘은 나라가 망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어지고, 백성들은 외국으로 포로 되어 끌려갔습니다. 다윗 왕조가 끊어지는 듯 했습니다. 그러기를 여러 세기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마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마1:1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는 말씀이 나타나게 됩니다. 인간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마침내 이루어졌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종려 주일을 지키면서 세상이 다 없어져도 없어지지 않고 우리에게 하신 모든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볼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어라". 아무리 세상이 어둡고 또 여러분의 삶이 고달플지라도 여러분의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신다는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신약 성경을 펼치면서 마태복음을 읽어보면 맨 처음에 왕을 찾아 나선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이 저 유명한 동방박사들입니다. 그들은 동방에서 별을 연구하였습니다. 그 동방은 지금의 이란이나 터키지역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은 "왕의 별"이 출현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당시 디아스포라로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을 통하여 저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민24:17에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온다"고 하는 예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왕의 별"을 알아보게 된 비결이었습니다.

계22;16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광명한 새벽 별"이라고 했습니다. 그 옛날 동방 박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왕의 별을 알아보았듯이 오늘 우리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예수께서 오늘 우리에게 광명한 새벽 별이심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들이 동방에서 예루살렘까지 가는 길은 먼 길이었고, 또 험한 길이었습니다. 쉽게 용기 내어 출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그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정리하고, 마침내 왕을 찾아 나서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말씀에 사로잡히는 사람만이 왕을 찾는 이 영적 모험, 영적 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렇게 말씀을 따라 위대한 출발을 한 박사들도 역시 인간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상식과 판단에 의하여 왕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찾아갔습니다. 그것도 마치 호랑이 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왕궁으로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실수로 인하여 자칫하면 왕으로 태어나신 예수께서 헤롯의 칼날에 화를 당할 뻔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말씀이 아니라 여러분의 생각이나, 세상적인 판단에 이끌리게 되면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 이런 위기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이 땅에서 우리 주님이 겪는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모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우리 교회가 바로 여기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는 새로운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 와중에도 헤롯은 성경학자들을 왕궁으로 불러모으고 성경을 연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여기서 왕의 탄생지를 밝혀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이었습니다. 여기서 비로소 박사들은 바른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왕을 찾아 알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준비해서 간 예물을 드렸습니다.
왕을 뵙고 난 박사들에게 천사의 지시가 내렸습니다.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것은 박사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왕을 만나 뵌 박사들은 자기들의 목숨이 위험에 처하는 것도 돌아보지 않고 다른 길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를 정말 만난 사람들은 그 길이 달라집니다. 사람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만이 우리를 우리 왕이신 예수께로 인도해 줍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이 왜 이렇게 정로에서 벗어나 있는지 아십니까? 저나 여러분이나 할 것 없이 다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내 생각이나 경험에다 절대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의 타락은 말씀을 버린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말씀과 신앙은 정비례합니다. 말씀을 버리는 것이 바로 우리 왕을 버리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바로 우리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4. 그런데 예수님의 공생애가 끝나는 이 마당에 빌라도가 아주 의미 심장한 말을 합니다. 그것은 가시관을 쓰신 예수, 매를 맞아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을 군중들 앞에 내 세우고는 "너희 왕을 보라"고 했습니다. 도저히 왕이라고 할 수 없는데 빌라도는 예수님을 왕이라고 소개합니다.
동방박사들은 저 초라한 베들레헴 어느 집에 있는 아직 빨간 어린 아기를 보고 왕으로 인정하고 그 앞에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그에게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습니다.

지금 빌라도 앞에 서 있는 죄수 예수를 왕이라고 소개할 때 그분이 정말 왕이라고 인정한 사람이 누구였겠습니까? 제자들마저도 버리고 도망간 현실에 과연 누가 예수를 왕으로 인정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대답을 듣기 위해 우리는 오순절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성령 충만 받은 제자들이 뛰쳐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 베드로의 설교가 사도행전 2:에 나타나있습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이렇게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옛날 시편 2편에 그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그러니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 왕에게 입 맞추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 우리 왕을 정말 나의 왕으로 믿고 모시고 섬길 수 있는 길은 우리도 역시 우리 개인의 오순절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전 12:3에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오늘 종려 주일을 당하여 우리가 예수 우리 왕을 모시기 위하여 먼저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제까지 귀로만 듣던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욥과 같이 정말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해야합니다. 그리하여 바로 지금 이 시간 주님 앞에 무릎꿇고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확실하게 여러분의 신앙을 고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