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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 말씀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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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필재 목사

염세주의 철학에서는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 말할 때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태어났으면 가장 빨리 죽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 이런 말을 합니다. 인간은 오래 살수록 고난이 많아지도록 되어 있다는 논리를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몸에 건강이 오래 살수록 점점 더 나빠지고 번민이 많아지기 때문에 인간은 세상에 존재할수록 고난만 커지도록 되어 있다는 말을 합니다. 나중에는 우리가 앉았다 일어나는 것조차도 힘이 들어 “아이고, 다리야.”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되면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하는 그런 때가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시한부 인생을 삽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가는 길을 나도 갈 뿐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생명체 가운데 우리 인간만이 언젠가는 내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간다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뜻이 있고 그 자체가 인간 고난입니다. 성경에 보면 죽음에 대한 일반적 진리가 나타납니다. “순서대로 왔다가 순서 없이 가는 것이 인생이고 누구든지 가야 되는 숙명적 사건이고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자기 몫이고 내 의사대로 연장할 수 있는 힘이 전혀 없으며 예고를 하지 아니하고 찾아온다. 그리고 이 사실은 누구나 다 싫어하는 사건이다. 슬픔과 공포가 허무감을 주는 인간 최대의 적이 곧 바로 이 사망이 된다.” 차라리 다른 동물들과 같이 죽음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이 그냥 살아가다가 그냥 죽으면 오히려 행복할 지도 모릅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죽음의 사건을 미리 알 수 있는 지식을 허락하셨는가? 그 이유는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고 영생의 교리에서 찾을 수 있는데 미리 알려주신 것은 미리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됨의 가치가 죽음의 가치를 미리 알기만 하고 해결 방법이 없을 때 인간됨의 가치는 무가치하다. 분명히 죽음을 초월하는 어떤 능력과 영생이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미리미리 준비하라고 미리 알려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삶과 죽음에 대해서 아주 분명한 정의를 가지고 있죠?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지상에서의 모든 사명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비록 일찍 갔다고 하여도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섭리는 거기서 끝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잘 믿고 살다가 가신 모든 형제들은 하나님이 주신 자기 사명을 완수하고 가신 분들이 됩니다. 반면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일이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비록 나이가 100세가 되었어도 그래도 무엇인가는 내 인생의 영적 의미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인간 예수의 죽음과 하나님 아들로서의 부활 사건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먼저 이 부활 사건을 우리가 정의할 때, 인류의 역사 안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죽었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 사건이 더러 나타납니다. 나사로도 죽은 지 며칠이 되어 썩어 냄새가 나는 상태에서 예수님이 다시 살려내는 그런 기록이 나타나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예수님이 다시 살리신 복음서 기록을 볼 수 있고, 또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장례식 과정에서 예수를 만나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을 부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기 편하게 편의상 부활했다고 하는 것이지 진정한 부활의 의미는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런 사람들은 다시 살아나기는 했어도 얼마동안 살다가 다시 죽었습니다. 이 부활은 한번 부활한 이후에 영원히 다시 죽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를 말할 때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2,000년 전 예수의 생존시 3년 동안만 존재하다가 소멸된 종교활동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마지막으로 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일할 사람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 성경의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수제자의 평가를 받던 베드로마저도 어느 틈에 예루살렘을 도망쳐서 나라의 끝인 갈릴리 호수에 와서 옛날 직업 어부의 생활로 신속하게 돌아간 내용을 우리가 보지 않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무덤같이 되어버린 제자들의 사명감이 다시 소생이 됨으로 복음 전파가 시작되는 역사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대한 몇 가지 정리가 필요합니다. 가장 기억해야 될 부활 사건의 진리는 오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사건은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미리 선포하신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에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니” 제자들에게 분명히 죽고 삼일 만에 살아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마가복음으로 가면 8장 31절에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또 마가복음 9장 31절에 가면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이렇게 또 나와 있습니다. 누가복음으로 가면 24절 7절에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이렇게 분명하게 예수님이 선포하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예수를 죽인 사람도 그 말씀은 기억하는 기록이 나타납니다. 27장 62~64절에 보면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하는 예수의 예언은 예수를 죽인 사람들까지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공식화된 주님의 예언 발표였습니다. 예언의 말씀대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부활은 미리 말해준 공식 설교였습니다.

예수님의 예언 설교는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것이 있고 긴 시간에 이루어진 것이 있고 아직도 기다리는 것이 있고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예언하십니다. 아주 짧은 시간을 예언합니다.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세 번 네가 나를 부인할 것이다.” 베드로가 죽어도 그런 일은 안 하겠다고 말했지만 몇 시간 만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베드로가 주님에게 그런 경고를 받았을 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 몇 시간을, 새벽이 지나갈 때까지만, 닭 울기까지만 긴장했을 것 같은데도 그렇게 못하고 예수님의 예언대로 몇 시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예언의 능력입니다. 열두 제자를 상대로 예언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고 도망갈 것이다.” 아무도 그 말씀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다가오니까 말씀대로 다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가룟 유다에 대한 예언도 아주 분명하게 했습니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누구입니까?”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그러면 유다가 그 말을 듣고 정신을 가다듬고 마음을 고쳐먹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되는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돈 받고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그런 예언들은 몇 시간, 혹은 24시간 안에 성취된 예언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에 성전 건축의 웅장함을 자랑했습니다. “이 성전은 46년 걸려서 건축한 이러한 성전입니다.” 예수님이 예언하셨고,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아니하고 다 무너질 것이다.” 몇십 년 후에 로마군에 의해서 그대로 또 성취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아직도 기다리는 예수님의 예언이 있죠? “내가 다시 오리라.” 재림 예언입니다. 기독교는 예수의 말씀을 복음으로 고백하는 종교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려는 마태의 강조점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의 예언 말씀을 초점화하는 것으로서 “그가 어떻게 살아났다는 것이냐?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에 대해서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나이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된 것이다.” 그것이 마태의 강조점입니다.

부활 사건의 두번째 특징이 나타납니다. 아무도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평소 예수님을 가깝게 모셨던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의 무덤을 보려고 왔다고 그랬습니다. 마가복음은 좀더 자세하게 이들의 목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한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유대의 장례 문화는 납골당 문화이기 때문에 무덤의 관 뚜껑만 보면 시체는 언제나 볼 수 있는 문화로 오랫동안 내려왔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신 것도 그런 환경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지금 마리아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것조차도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는 기대감이 아닙니다. 죽은 시체이지만 향품이라도 발라드리려고 안식일이 지나간 밤중을 기다렸다가 안식일이 해제되는 시간인 새벽을 이용해서 평소 주님을 향했던 아름다운 여인들의 마음의 표현이 이렇게 나타난 것뿐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기대한 사람은 하나도 안 나타납니다. 마가복음 16장 11절에 보면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리라 하신 그 시간의 개념이 “내가 3년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아니면 “30년 후에 살아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모르겠는데 3일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시간의 길이를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그 말을 어떻게 신뢰해야 되는가? 적어도 그 3일이라는 시간은 기다렸어야 합니다. 그 짧은 3년이 아니고, 30년이 아닌 3일의 약속을 한 사람도 믿지 아니했다는 것이 예수 부활 사건의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더구나 열두 사도는 지난 3년 동안 예수님 주변에서 그를 통해서 표현된 수없이 많은 기적 창출의 현장 목격자들입니다. 베다니의 나사로가 동네 친구였는데 죽어서 무덤에서 썩어 냄새가 나는 현장 상태에서 소생이 됩니다. 권세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서 수많은 동네 사람들이 조문객으로 와서 헌화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살았던 현장에 그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나인성이라는 동네 청년 장례식은 행길가에서 있었던 일로 예수의 말씀에 의해서 장례 운구 행렬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소생해서 살아났잖아요?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이 오병이어를 가지고 5천명 이상이 먹고 열두 바구니나 남은 것을 거둔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들, 바로 본인들입니다. 그러면 그 많은 초능력 체험을 보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렇게 많은 시간에 “3일 후에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씀을 한 사람도 믿을 수가 없었다는 이해가 어려운 상황이 부활 사건의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여러분, 우리 갈보리교회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수준만 하여도 그렇게 많은 일을 우리가 주님과 함께 체험하고 나서“내가 3일 만에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은 많은 교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떠나지 아니하고 3일 동안 그 자리에서 금식을 하면서 무덤을 지키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길어야 3일인데 넉넉히 할 수 있는 일이죠. 그런데 예수님 주변의 그 많은 제자들 가운데 하나도 그 사실을 믿지 않고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오늘날 2,000년 지난 예수의 부활 사건을 세상 사람들이 믿겠습니까? 누가 믿느냐 믿게 하여 주는 자만이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죽음의 자리에서 살아난 사람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불치의 질병에서 현장 치유를 받았는데, 기적 체험자가 많았는데 그들 중에 하나도 믿지 않았어요. 예수님을 통해서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듣고 이는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하던 은혜 받은 자들 가운데도 하나도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신뢰가 없었어요. 그것이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 다음에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당시 사람들이 확인된 사건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약 300년 동안 계속해서 박해의 시대를 살아왔던 것이 교회사입니다. A. D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 때 비로소 박해가 사라지고 숨을 쉬고 나왔습니다. 300년 이상을 끝없는 박해 속에서 기독교가 살아왔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사건 이후 유대 나라 안에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로 직결됩니다. 초대 교회 스데반 집사 는 돌에 맞아 현장 직결 처형되었어요. 야고보도 순교당하고 베드로 투옥되고……. 견딜 수 없던 성도들이 이웃 나라 다메섹으로 탈출하였더니 사울이 그들을 체포할 수 있는 법적 영장을 발부 받아 군사들을 이끌고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베드로서를 보면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끝없는 박해 역사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생사의 갈림길에 서면서 어떻게 초대 교회 신자들은 날마다 숫자가 늘어 가는가? 무슨 힘이 그들을 죽음을 각오하게 했을까? 적어도 300년이라는 긴 역사를 끝없는 박해의 역사를 살아왔는데 왜 예수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많아졌는가? 예수 부활의 목격자들의 증언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이렇게 말했어요. 나중에 예수의 증언자가 된 이후에 예수에 대해서 증언을 할 때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다시 살아나신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태반이나 살아있다. 그러면 그들의 증언을 어떻게 할 것인가? 목격자들의 증언은 진리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들의 역사에서 아주 재미있는 동화책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 뜻이 무엇인지 다 기억합니다. 목격자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목격자들의 증언의 힘이 실려서 어떤 핍박과 박해가 다가와도 보이지 않는 힘으로 확산되어서 그 중에서도 계속해서 복음은 확산된 것입니다. 오늘 10절까지 읽었는데 11절 이하를 계속 읽어 가면 예수님의 무덤을 굳게 지키던 로마 현역 군인들의 증언이 나옵니다. “파수꾼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이것은 파수꾼들의 양심선언이에요. “여보시오. 우리는 예수의 무덤 지키는 현장 체험자요. 빌라도 총독의 현장 임무 수행자요. 잘 지키고 있었소. 그런데 그 예수는 다시 살아났소.” 그러면 대제사장들이 할 일이 무었입니까? “아, 정말이오?” “그렇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할 거요?” “아, 그러면 그는 정말 메시아요. 우리가 잘못한 거요. 가자! 부활의 메시아를 맞으러 가자.” 해야 되잖아요? “돈 주면서 거짓말해라. 너희들이 잘 때 도둑질해 갔다고 그래라.” 안 믿을 사람은 재림주가 오셔도 안 믿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4~17절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9절 오늘 말씀에 여러 여자들이 예수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고 그랬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3절에서 33절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마가복음 16장 14절 열 한 제자가 한 곳에 모여 있을 때, 누가복음 24장 41~42절 제자들 앞에서 육체 부활의 증거를 구운 생선을 잡수시면서 증거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 갈릴리 바닷가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 베드로와 대화하시고 고린도전서 15장 6절의 기록은 오백여 명이 일시에 보는데서 승천하셨다 그랬습니다. 이 목격자들의 증언이 핍박을 무릅쓰고 예수의 복음을 확산시킨 것입니다. 본 자는 말을 해야 합니다. 목격자들의 현장 목격은 진리입니다.

기독교의 기초가 되는 부활 사건에 대해서 반대의 논리는 2,000년 동안 끊임없이 있어왔습니다.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는 L. 월리스의 작품! 그는 기독교의 진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허구성을 만들기 위해서 책을 쓰기 시작했어요. “예수의 부활은 허구성이다!” 예수의 부활을 부정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성경을 보면서 예수의 부활의 허구성을 드러내려고 작업하는 도중에 성령을 체험했어요. 그래서 그리스도를 부정하기 위해서 쓰던 글을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쓰는 글로 바뀌게 되었으니 그것이 그 유명한 “벤허”라는 작품이에요. 필라델피아에 가시면 “불멸의 네 군목”이라는 기념관이 있습니다. 2차 대전 때 해군으로서 전쟁 도중 미국의 군함 한 척이 바다에 침몰하게 되었을 때 모든 수명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살기 위해서 바다로 탈출했으나 구명조끼가 모자랐어요. 그런데 그 함대에서 장병들의 신앙을 위해서 일을 하던 네 명의 목사, 군목들이 자기들이 입었던 구명조끼를 모두 벗어서 다른 병사들에게 입혀서 탈출을 시키고 네 명이 갑판 위에서 손을 잡고 “우리는 죽지 아니하고 영원히 살 것입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배와 함께 침몰 당하여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서 영원히 살아있는 “불멸의 네 군목” 이라는 기념관이 세워졌어요.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철학의 도시 고린도에 가서 전도할 때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우리는 거짓말쟁이로 탄로가 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자가 될 것이다.” 그렇게 말했어요. 마르다를 향해 예수님이 질문하셨어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그렇게 믿으시는 분들은 “아멘”합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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