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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주일,종려주일] 형제 사울아 (행 9:10-1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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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릇된 자기신념을 섬기다가 졸지에 눈뜬장님이 되어, 다메섹 직가에서 기도하고 있는 사울을 찾아가 기도해주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해 아나니아는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아나니아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사울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를 익히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다메섹에 나타난 이유가 대제사장의 허락 하에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투옥시키기 위함임을 알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본문 15절의 말씀으로 아나니아의 이의를 일축하셨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여태까지의 행적을 보건대 사울은 주님의 대적자였음이 분명하건만,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사울을 가리켜 '택한 나의 그릇'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 한 마디에 아나니아는 사울에 대한 자신의 이의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즉시 사울을 찾아 나섰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반문합니다. 왜 보기도 싫은 그 사람을 만나야 하는가? 왜 그 사람과 함께 일해야 하는가? 왜 그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가? 왜 이 세상에 하고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필이면 그 사람이 내 곁에 있어야 하는가? 때로는 이와 같은 질문이 우리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 속에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없는 연고입니다. 그 해답은 오직 위로부터, 주님께로부터만 주어집니다. 왜 내가 그 사람을 만나야 하며, 그 사람과 함께 일하고, 그 사람 곁에서 더불어 살아야 하는가?-주님께서 그 사람을 내 곁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절대적인, 그리고 선하신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았기에 아나니아는 자신이 경원하던 사울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리고 본문 17절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아나니아가 직가에 있는 사울을 찾아가 그 앞에 섰을 때, 눈뜬장님이었던 사울은 아나니아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나니아는 그 가련한 사울에게 가만히 다가가 안수, 즉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그를 불렀습니다.
  -'형제, 사울아!'

  이것은 사울에겐 참으로 특별한 호칭이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형제라 불렀습니다. 그렇기에 사울은 아니니아의 형제가 될 수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믿는 형제들을 투옥시키던 그리스도인의 적대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아나니아는 그 사울을 '형제, 사울아'라고 불러 주었습니다. 사울의 행실과 상관없이 사울을 신앙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였습니다. 사랑이란 더불어 사는 능력이기에, 아나니아는 사울을 더불어 살아야 할 대상으로, 이미 자기 삶의 테두리 속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주님을 향해 이의를 제기할 정도로 전혀 사울을 형제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개과천선했다는 증거를 아나니아에게 보여준 것도 아닙니다. 정황상으로는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사울을 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곁에 사울을 있게 하신 것이 주님의 선한 뜻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을 형제라 부를 때 사용한 단어 아델포스(adelphos)는, 여인의 자궁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델퓌스(delphus)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같은 자궁을 모태로 하여 태어난 사람들만 친형제자매가 될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그저 형제라 한번 불러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울을 진정으로 친형제처럼 받아들였습니다. 사울을 자기 곁에 있게 하신 주님께서 사울을 가리켜 '택한 나의 그릇'이라 부르신 까닭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아나니아 자신이나 사울이나 모두 한 자궁에서 태어난 자였습니다. 바로 진리와 생명과 사랑의 원천인 그리스도란 자궁 말입니다. 그 자궁의 사랑과 생명으로라면, 사울을 자기 삶의 테두리 속으로 불러들여 형제로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본래 아나니아란 이름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란 뜻이라 했습니다. 아나니아는 조금 전까지 주님을 믿는 형제들의 적대자였던 사울을 더불어 살아야 할 형제로 받아들임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얼마나 은혜로운 분이신 지를 사울에게 실증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사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형제인 바울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바울 역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심지어는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핍박자들까지도 형제로 대했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역사는 새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나니아가 자신이 경원하던 사울을 한 자궁에서 비롯된 형제로 수용하지 않았던들 수반될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것,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자기 삶의 테두리 속으로 불러들이는 것, 한 사람이 곁에 있는 한 사람과 진정으로 더불어 사는 것, 한 사람이 한 사람을 그리스도란 사랑과 생명의 자궁으로 수용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결과를 초래하는 지를,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웅변해주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기록한 그리스어로 자궁을 가리키는 delphus에서 형제란 단어 adelphos가 유래된 반면, 구약성경의 언어인 히브리말로 자궁을 뜻하는 '라함(racham)'은 동시에 '긍휼'이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히브리어로 자궁과 긍휼은 구별되지 않습니다. 긍휼이란 자비, 즉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긍휼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자궁-'라함'은 보통자궁이 아니라 반드시 태아를 품고 있는 자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은 태아를 갖고 있지 않는 자궁인 '레헴(rechem)'과 구별하여 라함을 사용했습니다.

  태아를 지닌 자궁-라함이 동시에 긍휼을 뜻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태아를 품은 여인의 자궁을 생각해보십시오. 비록 핏덩이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궁은 이미 그 생명을 자신의 테두리 속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자궁은 자기 속에 있는 태아와 더불어 함께 살아갑니다. 자궁자신과 태아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부로 여깁니다. 자기 속에 들어있는 태아를 품고 감싸고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자궁은 잠시도 쉬지 않습니다. 그 태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탯줄을 통해 조금도 아낌없이 공급합니다. 자궁이 태아를 위해 행하는 이 모든 동작 혹은 역할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그것이 바로 긍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9장 15절을 통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계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열 달 동안 여인의 자궁은 자기 속에 품긴 태아를 위해 온갖 긍휼을 다 베풉니다. 그렇게 태어난 자식이기에 여인이 자식을 계속 긍휼히 여기는 것은 여인의 본능입니다. 태어난 자식이 설령 불구자라 할지라도, 강도 짓을 했다 할지라도, 지능이 모자란다 할지라도,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경원한다 할지라도, 어머니만은 그 자식에게 중단 없는 긍휼을 베풉니다. 그 자식은 자기자궁에서 태어난 자기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인이 자기자식을 본능적으로 긍휼히 여기는 것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우리를 더 더욱 긍휼히 여기신다 고백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 고백이 사실임을 십자가 위에서 증명해 주셨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대신 치러주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의 제물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당신이 죽으시므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하찮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우리와, 추하기 짝이 없는 죄인에 불과한 우리와, 더불어 살아주심을 의미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당신의 테두리 속으로 우리를 받아들여주셨음을 뜻합니다. 우리의 전 존재를 당신이 먼저 온전히 수용해주셨음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기적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기적도, 창조주께서 죄로 얼룩진 피조물을 당신의 테두리 속으로 불러주시고 더불어 살아주시는 이 기적과 견줄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생명의 자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과 생명의 자궁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당신의 긍휼을 끝도 없이 베풀어 주셨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친히 제물 되어 돌아가시기까지 말입니다. 그분께서 생명과 사랑의 자궁이 아니셨던들 결코 있을 수 없는 긍휼의 대 역사였습니다. 이 긍휼의 대 역사 속에서 아나니아도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습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아나니아 자신이 잘 알았기에, 그는 자신이 경원했던 사울을 찾아가 그를 형제로, 자기 삶의 테두리 속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사울이 수많은 사람을 형제로 수용하며 더불어 살게 된 것은, 생명과 사랑의 자궁이신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로서 밟아야 할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자이어야 하겠습니까? 생명과 사랑의 자궁으로부터 긍휼을 입은 자답게, 그 자궁의 도구가 되어 자신의 삶의 테두리 속으로 한 사람이리도 더 불러들이는 자, 한 사람이라도 더 형제로 수용하는 자,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자와 더불어 사는 자이어야 합니다. 마치 본문 속의 아나니아처럼, 그리고 그 이후의 사도 바울처럼 말입니다.

  몇 달 전 미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지는 21세기에 없어질 것과 계속 남아 있을 것을 예견하는 기사에서, 다른 것은 없어져도 바퀴벌레는 계속 살아남을 것으로 예견했습니다. 인간의 삶이 정말 바른 것을 추구하지 않으면, 그런 삶이란 실은 바퀴벌레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인간의 삶 속에서 결국 남는 것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내 삶의 테두리 속으로 받아들였는가 하는 사랑과 긍휼의 삶만 남습니다. 오직 사랑과 긍휼만 영원합니다. 바로 그것이 사랑의 열매요, 참 생명의 증거인 까닭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 중 누구를 존경한다면,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대단히 간단명료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삶의 테두리 속에 여러분을 진정으로 받아들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를 증오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여러분의 전존재를 수용해주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의 삶 또한 그와 똑 같은 관점에서, 하나님과 사람에 의해 평가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몸은 늙었어도 마음만은 아직 20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유해한 발상은 없습니다. 정상적인 의미에서 사람이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유해지고 넉넉해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노인이란, 그 그늘 아래 수많은 사람을 쉬게 해주는, 잎이 무성한 거목과 같은 자비로운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마음만은 도리어 나이와 역류하겠다는 것은, 타인을 위한 그늘이 되기를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이가 작을수록 자기중심적인 것이 인간의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으로는 백발노인이 되어도 자비나 자애와는 거리가 먼, 자식과는 말할 것도 없고 만나는 모든 사람과 부딪치기만 하는, 심술궂은 늙은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언제나 몸과 마음이 함께 나이 들어가야 합니다. 세월이 거듭 될 수록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자기 삶의 테두리 속으로 포용하는 넉넉한 거목, 아니 참 생명과 사랑의 자궁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부활절 일주 전인 오늘을 종려주일이라 부릅니다. 2천년 전 주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수많은 예루살렘 성민들이 뛰쳐나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열광적으로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나 왕을 향해 경의를 표할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민들은 주님이야말로 그들을 구원하실 만왕의 왕, 메시아로 여기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오늘을 종려주일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됩니다.
  동시에 오늘은 고난주일이라 불려지고 있습니다. 닷새 후인 금요일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기에 그 고난을 기리기 위합니다. 그런데 빌라도의 법정에서 주님을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쳐 외쳤던 자들은, 주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열광적으로 환호하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생명과 사랑의 자궁이신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인간으로 하여금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자들과 더불어 살 줄 아는 참 사람으로 바로 세워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이기심의 감옥에 갇혀 있던 인간들은 자기 이기심으로 주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다가, 바로 그 이기심 때문에 주님을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만약 주님을 구원자로 믿는 우리가 타인을 위한 사랑과 생명의 자궁이 되기는커녕 자기 이기심만을 위해 산다면, 오늘은 우리를 위한 주님의 고난을 기리는 고난주일이 아니라, 또 다시 우리 손으로 주님을 못 박는 가해주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우리를 위해 당하신 주님의 고난을 진정으로 기리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긍휼의 그늘을 제공하는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만이 주님의 긍휼의 자궁 속에서 우리가 거듭난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이 우리를 위한 주님의 고난을 기리는 고난주일이 될 것인가, 아니면 우리 손으로 또 다시 주님을 못 박는 가해주일이 될 것인가는 전적으로 우리 삶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자신이 경원하던 사울을 자기 삶의 테두리 속으로 받아들이기를 아나니아가 끝내 거부했다면, 그가 주님을 향해 밤낮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지언정 그는 주님을 새로이 못 박는 가해자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뜻을 좇아, 자신이 먼저 사울을 찾아가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말했습니다.
  -'형제, 사울아!'
  그에게 있어서 오늘은, 주님을 진정으로 맞아들이는 종려주일인 동시에 주님의 고난을 그 자신의 삶으로 기리는 고난주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의해 사울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고, 바울로 거듭난 사울에 의해 인류의 역사가 새로워졌습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형제로, 자기 삶의 테두리 속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바로 그와 같은 사람의 삶 속에, 생명과 사랑의 자궁이신 주님께서 부활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그 사람이 지금 내 곁에 있습니까? 왜 내가 그를 찾아가 만나야 합니까? 왜 내가 그를 내 삶의 테두리 속으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왜 내가 그와 함께 일해야 합니까? 왜 내가 그와 더불어 살아야 합니까?  바로 그것이 십자가 위에서 내 생명의 자궁되어 주신, 주님의 선하신 뜻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테두리 속으로, 하찮은 피조물에 불과한 나를 불러 주신 주님! 거룩하신 하나님으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나와 더불어 살아주시는 주님! 이 기적을 내게 이루어주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친히 제물되시사, 생명과 사랑의 자궁으로 긍휼을 베풀어주신 주님!
  주님을 내 생명의 주인으로 모시었사오니, 이 시간부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울을 형제로 받아들였던, 이 시대의 아나니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내 삶의 테두리 속으로 맞아들이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과 더불어 살 줄 아는, 생명과 사랑의 자궁이 되게 하옵소서.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 많은 사람에게 생명과 사랑의 그늘을 제공하는 거목이 되게 하옵소서. 그를 만나게 하시고, 함께 일하게 하시고, 더불어 살게 하셨음이, 주님의 선하신 뜻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해마다 맞이하는 오늘이, 주님을 나의 마음 속 더 깊은 곳으로 영접하는 참된 종려주일이 되게 하옵소서. 더 이상 주님을 못박는 가해주일이 아니라, 나를 위해 생명과 사랑의 자궁되신 주님의 고난을, 나의 삶으로 기리는 고난주일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나의 삶이 날마다 주님 부활의 현장이게 하옵소서.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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