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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의 산 증인이 되라 (요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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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덕휴 목사

예수님은 2000년 전 이 땅에 오셔서 부활을 통해 죽음은 끝이 아니며 하나님 주신 새로운 생명 속에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부활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존립자체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부활신앙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믿을 수 있으며 주님의 고통과 죽음, 우리들이 겪는 일상의 고통에 담긴 구원적 의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고전: 15:14). 부활이 없다면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우리는 불의와 쉽게 타협하고 죽음 앞에 절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 하느님의 생명 안에 영원히 살리라는 믿음을 간직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현실이 어둡고 고통스럽더라도 구원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희망을 두고 악의 세력을 이겨나갈 수 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부활은 죽음의 어두운 세력을 이긴 영원한 생명 그 자체입니다. 부활은 거짓과 미움을 이긴 진실과 사랑의 승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삶의 끝이 결코 죽음이 아니요, 영원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할렐루야'를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큰 감격과 영원한 기쁨이 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용서받고 그 죄 값을 청산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고 의인으로서 사단 마귀의 세력를 물리치며 담대하고 굳건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을 주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십자가의 피로 대신 갚아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전설이나 소설이 아닙니다. 이는 실제로 있었던 전대미문의 위대한 사건이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확증과 소망을 주는 사건입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스스로 고백하기를, "내가 역사를 연구하면서 오직 한가지 진실로 받다들이는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이라고 하였습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과거에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현재 받아들이고 지금도 살아 계심을 역사가 증명하고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주님의 부활을 확증하고 기뻐하며 찬미드리는 가운데 우리 모두 은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영혼의 부활
러시아 최고의 극작가 톨스토이의 부활이라는 소설을 여러분은 잘 아실 줄 믿습니다. 그것은 두 남녀 주인공 카츄샤와 네흘류도프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재판소의 배심원으로 나온 주인공 네흘류도프 공작은 재판정에 나온 비련의 여주인공 까츄샤를 만납니다. 그녀는 누구입니까? 바로 청년시절에 자기가 정욕의 대상으로 유린한 순결하고 아름다운 그 카츄샤였던 것입니다(원작 읽기http://paxpia.com.ne.kr/Study/BuHoal/CaLai.html).
하녀 겸 양녀였던 그녀는 네흘류도프의 아이를 임신을 하고 그 일로 인하여 결국 집을 쫓겨나 타락해 버렸습니다. 법정에서의 배심원 네흘류도프는 그 타락의 원인이 자기의 무책임한 행동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깨닫는 순간을 우리는 신학적으로는 회심의 단계라고 합니다. 네흘류도프라는 한 귀족이 이제 까츄샤라는 한 창녀를 따라 머나먼 시베리아 유형을 자청하여 떠나면서 춥고 그 황량한 시베리아의 끝없이 넓은 벌판에서 바라던 용서의 정신과 사랑으로 영혼의 부활을 발견한다는 내용이 바로 한 소설가가 바라 본 인간부활의 참상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활이 주는 메시지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서 은혜 받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여러분
이 세상에는 주님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죄인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자체가 벌써 죄인 된 몸으로 태어났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8장 1-8절에 보면 주님께서 "감람산으로 가시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1-8).

땅위에 글자를 쓰시던 주님이 오죽 답답했으면 죄 없는 자 나와서 죄 있는 자를 돌로 쳐라고 하셨겠습니까? 아마도 소설 부활의 여주인공 카츄샤는 이 여자를 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여자만이 죄인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임을 시인 할 줄 압니다.

전도서 9장 2절에 보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꼭 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죄 없는 사람이나 죄 있는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깨끗한 사람이나 더러운 사람이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나 제사를 드리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선한 사람이라고 해서 죄인과 다를 바 없고 하나님 앞에서 맹세를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맹세를 꺼려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고 하였습니다(전 9:2). 소망 중에 살아있음이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한다는 말씀(전 9:4)은 바로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주인공 네흘류도프처럼 인생의 쓰라림을 경험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주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인하여 내 안에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는 우리는 주님의 값없는 구속의 피 값에 덧입어 구원받으시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믿으시면 아멘하고 은혜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죄 있는 분으로 여기셨읍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무죄선언을 받게 되었읍니다"(고후 5:21). 주님의 피 값으로 인하여 우리는 죄 있는 몸으로 태어나서 죄 없는 몸으로 다시 태어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 된 몸을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상에 매달아 놓으시고 이제 그 대가로 우리를 무죄방면 하신 겁니다. 이제 죽어 마땅할 우리가 아니라 유죄확정에서 하나님특사로 사면처리 하신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아담의 죄과가 임퓨테이션, 즉 전가(轉嫁)되었던 죄인의 몸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까? 이 세상에 그 누가 자기 하나밖에 없는 친자식을 죽여가면서 양자 된 남의 자식을 살리겠습니까?

이제 사도 바울은 확신에 찬 영혼의 목소리로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찬송가 460장을 함께 부르시겠습니다.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1절). 아멘. 

동족 상잔을 경험하던 시절 손양원 목사님이 비록 사랑하시는 두 아드님을 공산당에 내놓으셨지만 그는 결코 먼저 내 아들아 주님을 위해서 내가 먼저 죽어 주어야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고 먼저 그들이 그 아들을 죽인 후에야 하나님께 감사드렸다는 사실입니다. 손목사님의 두 아드님의 순교는 참으로 우리 기독교 현대사에 길이 남을 신앙의 귀감이 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만, 하나님이 사랑하는 독생자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내 놓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과거 2000년 전의 사건이었지만 우리는 현재 바로 이 자리에서 역사적 사실로서 받다들이고 있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이 부활의 은총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2. 부활의 확증
부활의 은총은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부활할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을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3:1-10에서 이렇게 가르쳐 주십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요 3:1-10).

그런데 성령을 어떻게 받아라고 성경은 말합니까? 그냥 믿으면 받습니다. 아멘 !
그런데 뭔가 너무 싱겁지나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2). 결국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바로 말씀을 듣고 아멘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0).

오늘 우리는 사흘간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보이지 않는 말씀을 따라 확증하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사실을 믿는 믿음이란 실제 우리가 주님께서 부활하셨기를 바라는 것, 바로 주님의 부활 자체를 실체적 존재사실로써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정의(定義)를 히브리서 기자는 간결하게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히 11:1). 우리가 믿는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말씀을 확인하여 증거 하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백해졌습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이 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이 세상 땅 끝까지 증거 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행전1장 8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선교명령이라고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주님께서 하신 너무나 많아서 그분의 모든 행하신 일을 우리는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요한은 그의 기쁜 소식 맨 끝 구절에 주님의 엄청난 분량의 구원사역과 천국전파의 내용을 모두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하였습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

우리가 살면서 주님의 하신 일을 모두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주셨기에 우리가 주님의 하신 일을 모두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기록되기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모하고 말씀을 그리워하면 못할게 없습니다. 할렐루야!

제아무리 주님의 행하신 일이나 모든 이 세상적 일마저도 보혜사 성령님만 가슴에 품으면 우리가 평소에 기억하고자 하는 모든 사실을 다 생각나게 하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산 소망을 믿으라
사랑하시는 형제님 여러분,

생명이라는 것은 잠시잠깐 왔다가 가버리는 안개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야고보 사도는 말하기를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그 옛날,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이렇게 인생을 노래합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의 거처가 되시지만은,

모세의 기도 시편 90장 10절에서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하면서, 그 짧은 년 수이지만 우리의 행사를 견고케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고 또한 사는 날이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하였는데 그 살아온 나날들을 자랑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비탄스러운 줄을 모르고 자랑한다고 모세는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인생은 짧습니다. 일본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을 평정하고 나서 자신을 이렇게 돌아보았습니다.

"인생 50년 지나온 길 되돌아보니 꿈이요 환영(幻影)이로다"

  아무리 진시황이 불로초를 먹고 마시고 하였어도 50년 밖에 못살았습니다. 우리는 이 짧은 세월 속에서 무엇을 할 것입니까? 인생의 목적을 죽은 꿈에 걸겠습니까? 아니면 영생을 얻는 산 소망을 찾아야 하겠습니까? 오직 주님의 부활의 증거와 믿음만이 우리를 산 소망의 은혜의 강으로 안내하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시는 형제 여러분 그리고 이 땅위에 주님의 제자의 길을 가시는 모든 형제 여러분
인생에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왜 나만 이렇게 사는가?" 라고 우리는 불행해 합니다.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헬렌 켈러 여사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헬렌 켈러는 더도 말고 딱 삼일간만 세상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삼일만,
첫날은 자신을 평생 사랑으로 가르친 설리번 선생님과 친구들 그리고 산과 들을 산책하고 저녁노을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겠다고 했습니다.
둘째 날은 복잡한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박물관에 전시된 역사적 작품을 보며 인류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 미술관에 가서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서 예술의 신비를 감상하겠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날 그녀는 극장으로 가서 그곳에서 공연되는 오페라를 감상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밤이 되면 아름다운 불빛 속에 늘어진 상점 안에 진열된 예쁘고 아름다운 상품들을 쳐다보다 집으로 돌아가 다시 그녀의 눈이 감길 때 하느님께 3일 동안의 귀중한 경험과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마무리 기도를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보는 눈을 가지고 볼 것을 봅니까? 들을 귀를 가지고 들을 것을 듣습니까? 말할 입을 가지고 꼭 해야 할 말을 합니까? 우리가 현재 불행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두다 세상적 욕망이 부른 죄의 씨앗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말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너무나 평범하지만 고귀한 이 말씀을 우리는 다 알지 못하기에 언제나 부족함에 쫓기고 쫓으면서 한 세월을 다 소진하게 됩니다. 어디까지 갈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얼마만큼 할 것인가? 모두다 안개와 같습니다.

인생은 초로요 초로는 인생이라고 합니다. 
행복의 비결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믿음이 참으로 깊은 한 노인은 밝게 웃으면서 말합니다. "내게 행복의 비결이 하나 있지요"라고 하면서 노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나이에 어찌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고통을 당할 때마다 저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부활의 새벽을 맞지 않았습니까. 저는 고난이 다가올 때마다 마음속으로 "사흘만 기다리자" 고 다짐합니다. 그때부터 제 삶이 한결 행복해졌어요."
노인이 누리는 행복의 근원은 부활의 소망이었습니다. 봄이 오면 앙상한 나뭇가지에도 새순이 돋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이렇게 다짐하기를 기원합니다. "사흘만 기다리자"! "사흘만 기다리자"!

이렇게 각오를 하지만 우리는 세상적으로 살면서 고난을 받을 때는 주님의 십자가를  망각하고 세속적이고 육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돌변하여 고통스러워하고 인내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몰라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겪으셨던 사흘간의 고난 그리고 그 후에 나타나는 십자가의 영광은 바로 우리의 영광이며 우리의 부활 사건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을 이 자리에서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맺음
  2차대전의 영웅 처칠이 영국의 수상이 되자 고등학교 모교에서 초청을 하였습니다. 당신의 후배를 위하여 귀감이 될만한 말씀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교장선생님이 정중히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처칠은 단상에 오르면서 딱 이 말만 했습니다.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즉,  -never give up ! never give up ! never give up !
이렇게 단 3초만에 연설을 마치고 단을 내려왔습니다.

  우리는 결코 인생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성공의 비결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다르십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을 믿지 마시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옛날 구약시대에는 예언자나 사사를 통하여 말씀하셨지만 지금은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연고로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주님께서 내게 임재하심을 믿으시면 바로 그 말씀이 주님이 하시는 말씀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껏 나를 지탱하였던 나 자신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온전히 주님을 영접하시면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는 것을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우리는 내 안에 인류사에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 아니 부활의 산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임을 확증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과 모든 사고방식마저도 이제 분명히 그리스도와 함께 가는 제자이자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습을 입술에 시인하는 찬미의 열매를 맺도록 하십니다.

그리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 하여 모든 이를 구원시켜야 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시는 제자 디모데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5-16).

나의 하는 행실을 모든 사람이 보고 배운다면 나도 보람될 뿐만 아니라 보고 배운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사람이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특권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특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귀를 가지고 있어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형제가 있습니까? 이 시간이 지나면 바로 우리는 주님의 부활의 산 소망을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모든 율법과 선지자를 대신하는 기쁜 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지고 그 길을 갈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주의 종이 감히 주님의 부활의 산 소망이라는 주제로 삼가 말씀을 증언하였나이다. 행여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한 것이 있거든 거두어 주시고 함께 합력하여 부활의 산 소망의 선을 이루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만을 생각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내 안에 오직 그리스도의 산 소망만이 자리잡게 하시기를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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