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주일] 빈 무덤 - 부활의 증거 (시 16:8-11, 고전 15:55-58, 눅 ..

  • 잡초 잡초
  • 360
  • 0

첨부 1


- 설교 : 김오동 목사

1.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부활절 인사말이 있습니다. 눅24:34 말씀인데 우리 성경에는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주께서 정말 다시 사셨습니다!(The Lord is risen indeed!)”라고 감격과 흥분이 넘치는 외침입니다. 부활에 대한 확인이요, 고백이요, 선포입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동방교회에서는 부활절이 되면 목사와 교인들이 그리고 성도들 서로 사이에 부활절 인사를 나눕니다. 크리스마스 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하듯이 부활절 때는 한편에서 “주께서 다시 사셨습니다!”라고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정말로 다시 사셨습니다!”라고 화답한다. 그런 다음에 다함께 “할렐루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함께 실시).

감리교의 위대한 설교가였던 생스터(W.E.Sangster)목사가 1960년 부활절 때 목에 이상이 생겨서 부활절이 되었는데도 교인들 앞에서 부활절 설교를 할 수 없었던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생스터목사가 사랑하는 딸 Magaret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부활절 아침에 깨어났는데 목에 이상이 생겨서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라고 외칠 수 있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건 너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이 무엇인지 아느냐? 목소리는 나오는데도 전혀 외치고 싶지 않다면 그야말로 끔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해마다 맞이하는 부활절이기 때문에 금년에도 그렇게 맞이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까? 바라기는 금년 부활절에는 정말 부활하신 주님을 새롭게 만나서 부활의 은총이 넘치고, 부활의 새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처음부터 주님의 부활에 대하여는 부정하고 거부하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때 당국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은폐하기 위하여 금품을 살포하면서 까지 헛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우리가 잠잘 때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훔쳐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더 우스꽝스런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정말 죽었던 것이 아니라 기절을 했다가 3일 만에 정신이 들어 어디론가 살아졌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당시 제자들, 특히 예수님을 사모하며 따라다니던 “예사모(예수님을 사랑하는 모임)” 사람들이 그 사모하는 감정이 도를 넘어서 헛것을 봤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 그로부터 200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불신자들이야 더 거론할 것도 없고,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우리 주님의 부활을 그대로 믿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그 인생이 180도로 변화된 사도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오늘 우리의 믿음은 다 헛것 일뿐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와 우리 신앙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하는 반석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서는 의사요, 문학가요, 화가요, 역사가요, 선교사인 누가가 저자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서 처음에 보면 그가 이 복음서를 기록하게 된 경위를 눅1:1-4에 설명해 놓았습니다.

(1)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들이 전하여 준 것”(1:2)을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정확한 사실에 입각한 기록이란 말입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 11절을 보면 “허탄하다”는 말이 나오는데 누가라고 하는 사람은 그 이력으로 볼 때 절대로 허탄한 것을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2) 눅1:3절에는 “차례대로 썼다”고 했습니다. 당시 숱하게 유포되고 있었던 부활절 이야기 가운데 과장된 이야기들은 배제하고 정말 그날 거기서 있었던 일만을 정확하게 기록했다는 말입니다. 역사가다운 작업입니다.

(3) 눅1:4에는 이것을 기록한 목적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데오빌로가 이미 배워서 알고 있는 신앙의 진리에 대한 확신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독자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무슨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 아니라 믿고 구원받는 진리를 선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2005년도 부활절을 맞으면서 오늘 우리들도 이 부활의 복음을 새로 듣고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처럼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2. 그러면 저 빈 무덤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1)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제자들이 마음속으로 체험하고 변화 받은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객관적인 사건, 즉 예수님의 체험이라 그 말입니다. 저 제자들이 “주께서 정말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라고 한 말은 처음 들을 때는 그것을 믿지 못했는데 빈 무덤과 부활 주님 상봉 후에는 정말로 그 놀라운 사실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날 저 성금요일과 부활절 그 사이에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모든 상황은 “끝”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절망적인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시 안식일이었던 그 토요일은 제자들에게 정말 어두움과 슬픔, 절망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시간에 무덤 속에서 생명으로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빈 무덤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성도 여러분의 사정이 저 금요일-부활절 사이의 토요일과 같은 어두운 현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여러분의 전부가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하나님은 여러분이 절망이라고 알고 있는 그 상황에서 소망으로 생명으로 역사하고 계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 오늘도 부활하셔서 살아 역사하시는 우리 주님의 은총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소 아니 매우 어둡고 어렵더라도 제 3일을 믿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부활의 승리와 기쁨을 주실 줄 믿습니다.

(2) 저 빈 무덤은 예수님의 몸이 부활한 것을 말해 줍니다. 단지 영혼 불멸이 아니라 몸의 부활을 증거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살려 준 나사로는 부활의 예표는 되지만 그것은 부활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후에 나사로는 다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활이 아니라 소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할 것으로” 말 그대로 영의 몸,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여기서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 육신을 가지고 사는 이 존재, 이 삶이 얼마나 존귀하냐 하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 주님은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의 그 보혈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내 몸에 이루어지게 될 엄청난 영광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내 삶이 어떠하든지 상관할 것 없이 그것은 그대로 내일의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아직 온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이미 부활의 생명과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내 속에는 죽음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우리 주님이 주신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비록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결코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성도 여러분, 이 승리와 영광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3) 빈 무덤은 십자가에 달리신 바로 그분이 부활한 것을 말해 줍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자주자주 십자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를 말씀하실 때는 반드시 동시에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고 약속하신대로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저 빈 무덤은 주님의 약속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거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모든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어 집니다. 그러므로 어렵더라도, 괴롭더라도 신실하신 주님의 약속을 붙잡고 인내하므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그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여러분에게 응답해 주시고 이루어주십니다.

3. 여기서 빈 무덤은 오늘 우리에게 강하게 사고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부활신앙에 입각한 사고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회개하는 일입니다.

(1) 빈 무덤은 죽음에 대한 기존의 사고를 바꾸라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죽음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간 것은 부활을 예측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준비해 가지고 갔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생애도 그 죽음과 함께 끝이 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메시지가 들렸습니다. 그것은 죽음이 우리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는 그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바로의 학정에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켰듯이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그 세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있느냐...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했습니다.

(2) 빈 무덤은 예수님께 대한 우리 생각을 바꾸라고 요구합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길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단지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난 제자들은 예수님께 대한 기존의 생각이 180도로 바뀌어 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의심 많은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나서 그 앞에 무릎 꿇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행5:31에 보면 베드로가 설교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다”고 했습니다.

저 빈 무덤은 오늘 내가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단지 선지자 정도로 알고 있습니까? 저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처음에 그랬듯이 단지 한 위인 정도로, 또는 선생 정도로 알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립보 가이사랴 도상에서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확실하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3) 저 빈 무덤은 미래에 대한 우리 생각을 바꿀 것을 요구합니다.

행17:31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여러분, 십자가에 달리신 그 예수가 이제는 보좌에 앉으셔서 만국을 심판하실 심판주가 되셨습니다. 그때는 헤롯이라든지 빌라도라든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마음대로 끌고 다니고 정죄하고 십자가에 처형했으나 그날에는 우리가 예수를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됩니다. “믿고 선을 행한 자는 영생의 부활, 믿지 아니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주님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주님은 여러분에게 누구이십니까? 그날 주님 앞에서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고 거부당할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닙니까?

부활하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주로 확실하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소망을 안고 주님 뜻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복된 소식을 널리 전하는 사명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