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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첫 부활절의 현장 (눅 24: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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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이차세계대전 당시의 노르망디 해안 상륙작전을 두고서, 아이젠하워 장군은 자기 인생의 ‘가장 긴 날’(the longest day)이라고 회고했습니다. 비록 D-day가 인류 역사상 가장 가슴 졸이던 ‘최장의 날’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사상 최대의 날’을 꼽는다면 두말할 것 없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오늘이 될 것입니다. 그날 하루 동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벌어진 일들이 결국 과거와 미래에 걸치는 인류 역사의 중심 사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 날 그 현장에서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벌어진 일련의 드라마틱한 사건들을 참으로 생생하게 우리에게 증거해주는 기록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중심으로 첫 부활절의 실제 현장에서 아침과 오후와 밤에 각각 일어났던 일들을 상고해 보면서, 오늘 우리가 부활절을 지키는 자세가 과연 어디에 속하고 있는지, 아니 어디에 속해야 마땅할지를 다시 한 번 함께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1. 부활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라 해도 실망과 의심으로 눈이 어두워지면 불신앙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24장 13절로 24절에 기록하기를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지가 사흘째요 /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그 날」 즉 바로 부활 사건이 있었던 날에 두 제자들이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하면서 허탈한 심정으로 길 가던 중에 예수님께서 그들 곁으로 오셔서 동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시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고 있던 그들의 막힌 심령을 가지고서는, 지금 무슨 특별한 후광 따위도 없이 그야말로 온전한 육신을 입고 그들 곁에 온 행인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두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너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고 물어 보셨을 때, 그 중에 글로바라는 제자는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날 아침에 어떤 심적 상태에 있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잘 보여주었습니다. 19절에서 그는 예수님의 일생을 두고 그 말씀과 행하신 일에 능력을 나타내신 선지자였다고 증언했습니다. 20절로 21절에서 그는 그 예수님의 죽으심이 바로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전하면서,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랬던」 기대에 대한 실망감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22절로 24절에서는 그날 아침 여자들과 몇 제자들이 빈 무덤을 목격하고 놀라움과 혼란의 와중에 빠져 있다고 또한 말했습니다. 그의 대답은 예수님의 전 생애를 그 현장 가까이에서 목격했던 사람답게 정확하고 간결하게 요약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슬픈 빛」을 띠고서 그런 말을 전했습니다. 그는 그 훌륭한 예수님의 일생을 보았으면서도 예수님을 여전히 「선지자」 중의 하나로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 즉 메시아가 되어 주기를 소망할 줄 아는 수준까지는 되어 있었지만, 그 「구속」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직결되어 있다는 그 요점은 미처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빈 무덤’에 대한 증언까지 들었지만 그것은 그로 하여금 ‘놀라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사건이었을 뿐 부활을 믿게 하는 소식이 되지는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처럼 예수님의 생애 전체와 부활의 현장에까지 그렇게 가까이 있었으면서도 그날 아침 그 제자들에게 남아 있던 것이라고는 오직 슬픔, 실망, 그리고 놀라움이 뒤섞인 혼돈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눈이 일단 선입견의 색안경으로 가려지면 아무리 현장에 있어도 필요 없습니다. 교통사고 현장을 지나가면서 한쪽이 오토바이라든지 여자 운전사가 있는 것을 보면 그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르면서, ‘항상 오토바이가 말썽이야.’라든지 ‘역시 여자는 운전하면 안 돼.’하고 혀를 끌끌 차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서 자기 쪽의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 역시 꼭 같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구세주라면 내 먹고 사는 것부터 해결해 주셔야 할 텐데.’라는 마음만 앞서 있을 때에는 ‘부활’이라는 소식에 대해서 감동할 여지가 전혀 없어집니다. ‘예수님이 정말 구세주라면 이 땅에 정치적 정의부터 구현해 주어야 마땅하고, 빈자가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주어야 할 텐데 왜 구원이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하나?’라고 구세주에게 조언하고 코치할 생각이 들 정도가 되면, 왜 구세주가 부활해야 했는지 깨달을 길이 이미 꽉 막혀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세주에 대한 내 요구와 기대가 앞설 때 우리는 그 구세주께서 행하신 가장 위대한 부활의 현장 앞에서도 오히려 실망과 의심만 더 깊어질 것이며, 그처럼 영안이 가려진 사람은 이 놀랍고 기쁜 부활의 아침에도 오직 불신앙의 안개 속을 헤매며 다니게 될 뿐입니다.

설사 예수님의 전 생애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로 추앙하고 나름대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면 그 인생은 결국 ‘불신앙인’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밝고 아름다운 부활절에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는 모든 실망과 의심의 어두운 구름들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들을 걷어냄으로써, 지금 이 자리 바로 우리 곁에 와 계신 부활의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부활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도 성경의 증거를 통하여 부활을 가장 정확하게 믿을 수 있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24장 25절로 32절에 기록하기를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하는 것 같이 하시니 /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라고 했습니다.

그 글로바라 하는 제자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예수님께서는 「이 미련하고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에 관해서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그렇게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까닭은 단 한 가지,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 즉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성경을 어떻게 깨닫게 해 주셨습니까? 그것은 ‘반드시(must)’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그 후에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구약을 통해 메시아를 알고 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유대인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그 제자들도 메시아를 생각할 때 오직 ‘영광’에 들어가야 할 메시아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눅 24:21) 즉 어떤 값을 대신 치르고 자기들을 구원해 줄 자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값’이 그리스도의 ‘고난’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이 가장 중대한 포인트를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엠마오로 가면서, 구약 구석구석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내용 두 가지, 즉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죄’와 그들을 구원해 주려 하시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키려면 그 해답이 바로 ‘구세주의 대속적인 죽음’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이 요점 중의 요점을 파악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는 반드시 먼저 ‘고난’을 받고 그 후에 ‘영광’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 그러니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실망스런 사실이 될 수가 없으며 또한 그 후의 영광은 자연히 부활이 될 수밖에 없다는 바로 이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게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면서 그들에게 깨우쳐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성경을 풀어 주시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 그 두 제자들은 「속에서 마음이 뜨거움」을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는」 순간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아마 예전에도 항상 음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드리던 모습이 떠올랐든지, 아니면 그 손의 못자국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그들은 바로 그 순간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지만, 그 순간 예수님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본 순간은 그때였지만, 구세주께서 확실히 부활하셨다는 그 믿음 자체는 이미 길에서 말씀을 풀어 주시는 것을 들으면서 그들의 심령이 뜨거워지던 그때부터 굳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현장에 가까이 있었다고만 해서 그 사건 전모를 꼭 더 잘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야구장에 직접 가서 앉아 있는 사람보다 집안에서 텔레비전 중계를 보는 사람들이 그 경기 내용에 대하여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판정이 어려운 장면을 슬로우 모션으로 다시 볼 수 있는 것이라든지 해설자의 전문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다는 것 등의 이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직접 태풍을 만나고 피해를 당한 당사자들은 그저 눈앞의 폭풍과 폭우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높이 우주에 띄워 놓은 인공위성의 카메라를 통해서 보고 컴퓨터에 데이터를 입력하여 분석하는 사람들은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 태풍의 눈이 어디 있으며 가장 강력한 에너지가 어느 위치에 있으며 또한 그것이 앞으로 다른 어느 방향 어떤 지역으로 움직여 갈 것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바로 그처럼 부활 사건에 대한 핵심적인 단서, 종합적인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 줍니다. 그 성경 때문에 우리는 부활이라는 사건 앞에 그저 혼란에 빠지지 아니하고, 왜 구세주는 부활하셔야만 하는가 하는 그 당위성부터 제대로 깨닫게 됩니다. 그 성경 때문에 우리는 부활이라는 사건을 그저 불가능한 기적이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죄인을 살리시는 구원 사역에 얼마나 필수적인 핵심 사건이 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그 성경 때문에 우리는 부활이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의 전 구속사가 앞으로 주님의 재림까지 어떻게 흘러가게 되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성경을 ‘더디 믿는 자’는 설사 성지 순례 중 빈 무덤의 현장에 가 본다 해도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오늘 그 첫 부활의 현장을 생생하게 실황중계해 줄 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전 인류 역사를 조명하면서 그 부활의 의미를 해석해 주는 이 성경 말씀을 통하여 마음이 뜨거워짐으로써, 오늘 주님께서 친히 성찬의 떡을 떼어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순간 눈이 밝아져서 그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부활의 그 현장을 자신의 심령 속에 간직하게 된 사람은 참된 교회 운동의 핵심멤버가 됩니다.

이것이 그 첫 부활절 날 밤에 연이어 벌어진 너무나도 멋있는 대단원의 막이었습니다. 우선 누가복음 24장 33절로 43절에 보면, 그 두 제자는 이미 밤중이었지만 조금도 더 기다릴 수 없어서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열 한」 다른 사도들과 「그와 함께 한」 다른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가 보았더니, 거기 있던 자들도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 주신 것을 통하여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고 그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거기에다 이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도 자기들이 겪은 체험을 그들에게 말해 줌으로써, 이제 그 무리는 더 이상 그날 아침처럼 혼란의 분위기가 아니라 부활 확신의 분위기로 일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부활 신앙에는 아직까지 온전치 못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부활이 완전한 육체 부활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전적으로 확신하지는 못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기는 하셨는데 어쩌면 그저 혼령으로만 나타나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은 본문 36절 이하에서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이 보여 준 반응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문도 닫힌 상태에서(요 20:19) 예수님께서 홀연히 그들 중에 나타나시자 그들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런 제자들의 부활 신앙을 더욱 온전하고 확고부동하게 해 주시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당신의 손과 발을 만져 보라고 말씀하셨고, 제자들이 그것조차 우물쭈물하자 스스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어 보이심으로써 당신의 부활이 그저 혼령의 부활이 아니라 영과 동시에 완전한 육의 부활이심을 명백하게 그들 눈앞에서 증거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 후에 본문 44절로 49절에 기록하기를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아까 엠마오 도상에서 하신 것과 꼭 같이 다른 모든 제자들에게도 다시 한 번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심으로써, 지금 그들이 목격하고 있는 부활 사건을 이제 확고부동하게 신앙할 수 있도록 다져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그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이제부터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일러주셨습니다. 46절 이하의 말씀을 요약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된 복음을 온 세상에 ‘전도’할 것과, ‘사도’들이 이 일에 대하여 그들의 전파하는 설교와 기록한 신약 성경을 통하여 증인이 될 것, 그리고 이 모든 일을 해 나가기 위하여 ‘성령’을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는 바로 교회 설립의 기본 골격에 해당되는 것들입니다. 교회는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사도’들이 남긴 증언 즉 신구약 66권의 말씀을 그 기초로 삼았습니다. 말씀을 통해 주어진 복음을 땅끝까지 ‘전도’하는 일을 제일의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그처럼 성경이 기록된 과정이나 기록된 말씀을 읽고 깨닫는 일은 오로지 ‘성령’의 역사 없이는 될 수 없는 일이며, 복음 전하는 능력의 유일한 원동력 역시 성령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부활 신앙이 체험과 말씀을 통하여 확고부동하고 온전한 것이 되자마자 바로 그 신앙의 힘을 당신의 몸 되신 교회를 세우는 기반으로 즉시 사용하셨던 것이었습니다.

현장 검증은 주로 형사나 검사들이 하는 것이겠지만, 때로는 판사나 배심원들이 재판 도중에 사건 현장에 나가서 ‘현장 재현’을 직접 보기도 합니다. 비록 그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에 그 자리에는 없었다 할지라도 그런 식으로 그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의 전모를 자기의 뇌리에 선명하게 새김으로써 더욱 정확한 판결을 내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첫 부활이 일어났던 그 시간 그 현장에는 없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하여 그 부활의 현장을 그 누구보다도 뚜렷하게 자신의 심령 속에 각인시켜 놓은 자들입니다. 이런 체험적인 부활 신앙이야말로 교회를 참된 교회로 만드는 유일한 기반이요 알맹이가 됩니다. 이 ‘예수 부활’이야말로 교회의 사명인 ‘전도’의 주제가 되는 것이며, 교회의 터가 된 ‘사도’들이 죽기까지 증거했던 사실이며,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는 ‘성령’의 감화감동이 오늘날까지 택자들로 하여금 믿게 만드는 사상 최대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 신앙 없는 교인들이 모인 교회는 아무리 떠들썩하게 부활절을 지킨다 해도 실상은 주님의 육체 부활은 믿지 않는 가운데 그저 막연하고 추상적인 부활만을 믿는 외식과 불신앙 가운데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자랑할 말이 있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원래 다 이름과 얼굴과 성격과 사는 모양이 각각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증거하는 성경 말씀과 감화감동시켜 주시는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서 바로 이 예수 부활 사건을 현장에 있었던 그대로 자신의 심령에 뚜렷하게 새김으로써, 부활을 믿되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온전하게 믿는 교회, 부활을 전도하되 땅끝까지 모든 족속에게 힘 있게 증거하는 교회를 함께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는 저와 여러분은 예루살렘의 현장에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빈 무덤에 가보지도 못했고 천사들이 나타나 증거해 주는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조금도 낙심하거나 의심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날 바로 그 현장에 있었던 제자들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다 믿고 확신하게 된 것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구세주에게 바라는 자기 개인 욕심의 색안경으로 눈이 어두워진 사람은 아무리 부활 현장에 가까이 있어도 절대로 그 부활을 믿을 수도 반길 수도 감사할 수도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성경 말씀만 가지고서도, 예루살렘에 성지 순례를 가는 것보다도 더 실감나게 이 날을 지킬 수 있으며, 부활의 현장을 몸소 답사해 보는 것보다도 더욱 뚜렷하게 이 사건을 목도하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신구약 66권이야말로 예수 부활이라는 이 위대한 테마의 전후 인과관계를 명쾌하고도 일목요연하게 풀어주는 해설서로서, 성령께서는 오늘도 다른 환상이나 자료를 사용하지 않고 바로 이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 각 성도들이 부활 신앙으로 ‘마음이 뜨겁게’ 되도록 역사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듣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는 우리야말로, 이천 년 전에 바로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보다도 이 부활 사건을 훨씬 더 정확하게 보고 완전하게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성경 증거를 통하여 예수 부활을 믿게 된 신자들은 ‘그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던’ 두 제자들처럼 반드시 교회에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에 자기 눈으로 예수님의 육체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데도, 왜 우리가 이날 ‘예수 부활’을 함께 기뻐하고 함께 찬송하고 함께 감사하려고 모이게 되었겠습니까? 성령께서 우리 모두로 하여금 이 예수 부활이라는 위대한 사건을 직접 ‘현장 검증’하도록 만들어 주셨고, 이미 저와 여러분의 심령 속에 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현장이 결코 지워질 수 없도록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성경과 성령을 통하여 예수 부활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이 부활절을 통하여, 실망과 의심으로 가득 찬 ‘방황의 현장’을 벗어나서,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증거하시는 말씀을 깨닫는 ‘뜨거운 마음의 현장’에 이르고, 이제 이 교회를 중심으로 모인 ‘부활 증거의 현장’에서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라고 온 세상을 향하여 크게 함께 외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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