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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돌을 굴리세요! (막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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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흥규 목사

<'죽어서 선인장 꽃으로 피어난 여인' 이야기>
미시시피의 한 작은 마을 무덤 위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는 선인장이 있습니다. 한 여인이 암과 싸우다가 세상을 떠난 1977년부터 선인장이 생겼습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파니 루 해머(Fannie Lou Hamer, 1917-1977)입니다. 해머의 무덤에는 "나는 진절머리 나는 일에 진저리가 난다"--"I'm sick and tired of being sick and tired."--라는 유명한 비문이 적혀 있습니다. 

해머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주(州)의 가장 가난한 동네의 한 소작농에서 20명의 형제 자매들 중에 막내로 태어난 흑인 여성이었습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흑인 노예였으며 여섯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해머 여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재능은 노래하는 일이었는데 유난히 흑인 영가를 잘 불렀습니다. 1963년 그녀의 나이 45세가 되었을 때 해머는 자기의 일생을 뒤바꾸어 놓은 연설을 들었습니다. 자기와 같은 흑인도 백인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시민이 되어서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해머는 유권자 등록을 하려고 했지만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자라는 이유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해머는 투표권을 얻기 위하여 글을 배워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애썼지만 번번이 문자 해독 시험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피눈물나는 노력 덕분에 마침내 유권자 등록에 성공했으며 난생 처음 투표권을 갖는 기쁨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해머가 부치는 땅의 백인 주인이 해머가 투표권을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이내 협박을 해왔습니다. 만일 해머가 투표권을 고집할 경우 해머 부부가 소작하는 땅 전체는 물론이고 몇 개의 농기구마저 다 빼앗겠다는 협박이었습니다. 해머가 주인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투표권을 포기하지 않자 주인은 해머가 부치는 토지와 농기구 일체를 몰수했습니다. 밥줄을 끊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 때 한 유권자 등록을 위한 시민 단체에서 해머의 용기에 대해서 듣고서는 그 단체를 위해 함께 일하자고 제안해왔습니다. 결국 해머니 이 민권 단체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각지를 돌아다니며 백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장소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체포당하기가 일수였으며 심한 구타까지 당했습니다. 그와 같은 증오와 폭력, 야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해머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해머는 "백인들이 자기를 미워한다고 해서 자기 역시 똑같이 백인을 미워할 경우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해머는 독학으로 간신히 문자를 해독한 가난하고 무식한 흑인 여성이었지만 자신의 생애를 미국 남부의 인종 차별과 용감하게 맞서 싸우는 일에 바쳤던 것입니다.

해머가 무덤에 묻힌 뒤 한 그루의 선인장이 생겨나더니만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었습니다. 선인장이 사막 한 가운데에서도 눈부신 꽃을 피우듯이 사람들은 이 선인장이야말로 불의와 증오의 거친 사막 한가운데에서도 찬란하게 피어오른 한 용기 있는 여성을 상징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세 여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다음 예수님의 무덤을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들은 여성들이었습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 짓눌려 천대받았던, 나약한 여성들이 무덤을 먼저 찾았던 것은 예사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남자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진 가운데 여성들이 예수님을 끝까지 지켜주었다는 사실은 참 놀랍지 않습니까?

목회를 하다 보면 종종 사람을 소개받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새신자를 소개받을 때 "앞으로 크게 쓰일 재목입니다. 관심 가져 주세요."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앞으로 교회에서 큰 일꾼이 될 분이니 눈여겨 봐달라는 선의의 부탁이겠지요. 이런 분들은 대개가 학력이나 지위가 높다든지 아니면 재력이 상당해서 뭔가 힘이 있는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세상에서도 이처럼 한가닥하는 사람이니 목사님이 잘 지도해주시면 아주 훌륭한 교회 일꾼이 되리라는 기대 때문에 하는 말이겠지요.

저 역시 그런 분들을 소개받을 때마다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저렇게 실력이 대단한 분이,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은 분이 믿음이 들어가서 은혜 받으면 참 좋은 일꾼이 될 수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은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까지 목회 해오면서 이런 기대가 그대로 실현된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대단한 사람이니 교회에서도 대단한 일꾼이 되겠구나 기대한 것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것을 목회경험으로 깨닫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왜 그럴까요? 성경에 나오는 신앙적인 이치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했고 예수님을 참으로 목숨 다해 따랐던 사람들은 힘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높은 권세와 지위 가졌던 사람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엘리트들은 너나할 것 없이 주님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자기 실력을 믿고 자만했지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가르침에 귀기울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오히려 세리나 창기들이 예수님을 더 믿고 따랐습니다. 무엇보다도 가냘픈 여성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의리와 지조를 지켜주었습니다. 이런 이치가 성경적인 것을 알아차린 뒤 저는 "아, 하나님께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통하여 위대한 일을 하시는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무덤에 갇혀 계실 때 제일 먼저 무덤을 찾은 여인들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니까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 새벽에 해가 막 돋기 시작한 그 때에 세 사람의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이유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정독(精讀)해보면 이들이 사전에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했다는 근거는 그 어느 곳에도 찾을 수 없습니다. 정반대로 염려와 두려움과 불신 한 가운데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무덤이 비어 있고 천사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믿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세 사람은 왜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것일까요? 본문 1절에 보면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드리려고 무덤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어떤 행위도 소용이 없겠지만 여자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발라서 썩는 냄새를 몰아내게 할 요량으로 무덤을 찾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한 여자들이 이제 돌아가신 예수님에 대하여 마지막 의식을 치르기 위하여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갔던 것이지요.

그런데 세 여자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을 때 염려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가두고 있었던 무덤을 막아 놓은 큰돌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시신을 장사 지낼 때 동굴 같은 곳에 시신을 안치해 놓고 무덤 문을 큰돌로 막아 놓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대인들이 석실고분(石室古墳)이라고 해서 돌무덤에 왕들을 장사지낸 적이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은 집채만큼 큰돌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연약한 여자들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돌이었습니다. 여자들은 예수님의 무덤 앞에 도착은 했지만 무덤을 탁 가로막고 있는 저 큰돌을 누가 굴려줄 수 있을는지, 이것을 걱정했던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무덤 앞에 놓인 큰돌을 염려하고 무덤을 향하여 가고 있었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눈을 들어 무덤 쪽을 보니 그 엄청난 돌이 굴려져 무덤문이 환하게 열려있었던 것입니다. 여자들은 힘센 장정이 좀 나타나서 돌을 굴려주었으면 좋겠다 은근히 기대 섞인 마음 반(半), 또 돌을 굴리지 못해 그냥 돌아가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반(半)이 뒤범벅이 되어 있었는데 이미 돌이 굴려져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영어 성경을 보면 4절의 "심히 큰돌이 굴려져 있다"는 표현이 수동태--"the stone, which was very large, had already been rolled back."--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저절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되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이 큰돌을 옮기신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가로막는 세 개의 큰돌들을 굴려냅시다!>
여러분, 오늘 부활주일을 맞아 세 사람의 여자들과 예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큰돌에 우리의 주의(注意)를 집중해봅시다. 저는 이 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돌, 부활(영생)과 죽음을 가로막고 있는 돌, 신앙과 불신앙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돌로 이해를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무덤 앞에 놓인 큰돌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예수님의 시신에 대하여 걱정하고 있었던 여자들과 이미 부활하셔서 무덤에서 사라진 생명의 주님이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큰돌을 굴려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큰돌을 굴려낼 때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곁에 찾아오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세 여자는 무덤 앞에 놓인 돌을 굴리기 전에 먼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세 개의 돌들을 굴려내야 했습니다. 여러분, 그 세 가지 돌들이 무엇입니까? 오늘 부활주일을 맞아 여러분도 이 돌들을 다 굴려내시기를 바랍니다. 

① 염려의 돌을 굴려야 합니다.
세 여자는 예수님 무덤 앞을 가로막고 있는 큰돌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이 큰돌을 굴려내 주겠는가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염려는 곧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을 뿐 아니라 그 큰돌을 굴려내셨습니다. 여자들은 아직 부활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오늘 이 부활절 아침에 여러분의 마음을 가로막고 있는 염려의 큰돌을 굴려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염려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크고 작은 염려 속에 하루 하루를 살아갑니다. 염려가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 잠 17: 22은 마음의 근심이 뼈를 마르게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살이 빠지는 정도가 아니라 뼈가 마를 정도로 큰 고통을 안겨 준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염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우리는 진짜 부활 신앙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희랍어로 '염려한다'는 말은 본래 '마음을 나눈다'(to divide the mind)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마음을 헤집고 들어와서 염려를 만든다는 뜻이지요. 여러 가지 세상적인 욕심들이 찾아와 우리 마음의 주인이 되려고 해서 그 주인들을 다 섬기려고 하다보니 마음이 세 갈래, 네 갈래, 다섯 갈래 분산이 되어 염려의 포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아서 마음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 우리 마음의 주인을 오직 하나님 한 분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염려를 이기는 방법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염려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염려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염려를 주께 맡겨버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벧전 5: 7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려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믿으시고 예수님께 여러분의 모든 염려를 다 맡기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굳게 막고 있는 염려의 큰돌을 굴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의 무덤 앞에 놓인 큰 바윗돌을 굴려내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염려의 돌도 굴려내실 줄로 믿습니다! 

② 두려움의 돌을 굴려야 합니다.
무덤 앞에 놓인 큰돌이 굴려진 것을 발견한 세 여자는 무덤 안에 들어갔습니다. 무덤 안에 들어갔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은 온데 간데 없고 웬 젊은 남자가 흰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청년의 모양을 했던 것이지요. 당연히 여자들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천사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셨다는 말씀을 했을 때 여자들은 몹시 놀랐습니다. 8절 말씀을 보세요.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극도의 두려움 속에 빠졌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크고 작은 두려움이 다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 앞날에 대한 두려움, 세상에 대한 두려움, 두려움이 다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게 되면 그 두려움의 종이 됩니다. 요즈음 '일진회'라는 학원가의 폭력 서클 때문에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 앞에 서면 어리고 순진한 학생들은 두려움을 가집니다. 두려워하는 대상 앞에 포로가 되어서 꼼짝을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주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순교자들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 엄청난 폭압(暴壓) 앞에서 조금도 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까?

세 여자는 아직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속에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의 큰돌을 굴려내게 해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두려움보다 훨씬 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두려움을 맡아주실 줄로 믿습니다!

③ 불신앙의 두려움을 굴려야 합니다.
세 여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한 채 무덤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마지막 예우로 부패하는 시신에 향료를 발라드리기 위하여 무덤을 찾은 것뿐입니다. 이것은 이들이 예수님과 자기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큰돌을 염려했다는 사실에서 나타나지 않습니까?

생각해보세요. 무덤 안은 좁고, 어둡고, 무엇보다 죽은 시신이 갇혀 있으며 썩어서 냄새가 진동하는 곳입니다. 반면에 무덤 밖은 넓고, 밝고, 신선한 공기와 더불어 생명이 충만한 곳입니다. 생명이 충만한 무덤 밖에서 죽음으로 가득찬 무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는 사실, 이것이야말로 여자들이 아직도 부활의 확신이 없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불신앙의 큰돌을 굴려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어서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도저히 무덤에 갇혀 계실 분이 아니라 부활의 주로서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시 무덤 안으로만 들어가려 할 뿐 무덤 밖에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은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게 하는 불신앙의 돌을 굴려내십시오. 그리하여 무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무덤 근처를 서성거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무덤 안에 계시지 않고 우리의 삶 한 가운데 계십니다!

  본문 6-7절을 보세요. 청년의 모습을 한 천사가 세 여자가 말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여기 무덤에서]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바로 여기가]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는지라."

주님은 무덤에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이미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셔서 바로 그곳에서 제자들을 만나겠다는 것입니다. 갈릴리가 어딥니까? 보통 사람들이 활기찬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삶의 현장 한가운데가 아닙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거기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이와 같이 생생한 삶의 현장 한 가운데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 더불어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일을 행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불신앙 때문에 무덤 주변을 방황해서 안됩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불신앙의 큰돌을 굴려내야 합니다. 사실 불신앙의 큰돌이 염려와 두려움을 갖게 하는 가장 큰돌입니다. 이 거대한 돌을 먼저 굴려낼 때 주님의 빈 무덤을 볼 수 있으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에 먼저 가 계신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 하나님께 불신앙의 큰돌을 굴려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결어: '구르는 돌'과 '돌 굴리는 사람'>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큰돌들이 있습니다. 염려의 큰돌, 두려움의 큰돌, 무엇보다도 불신앙의 큰돌이 이리 굴러다니고 저리 굴러다닙니다. 우리는 이 돌들을 굴려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을 어지럽히며 굴러다니는 이 돌들을 굴려낼 때 빈 무덤이 보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갈릴리, 즉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 한 가운데 역사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부활주일 아침에 우리의 마음 속에 굴러다니는 돌들을 굴려 내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거치게 하는 돌'이 아니라 '돌을 굴려내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그리하여 여러분의 마음을 꼭 틀어막고 있어서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일체의 돌들이 다 굴려내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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