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주일] 살아나셨느니라 (눅 24:1~12)

  • 잡초 잡초
  • 177
  • 0

첨부 1


- 설교 : 김성철 목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누가복음 24:5-6)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은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자기의 새 무덤에 안장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하고 다시 살아났다고 하면 큰 혼란이 일어 날 테니, 사흘까지 굳게 지켜야 한다면서, 무덤을 지킬 군사를 요청했습니다. 빌라도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파숫군을 세우고 돌문을 인봉하여 굳게 지키게 했습니다(마27:57-66)

주님을 섬겼던 여인들은 안식일이 촉박함으로 예수님의 시신에 미처 향유를 바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향품을 사두었다가 그 향유를 발라드리기 위해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 무덤을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무덤의 돌문은 굴려 옮겨져 있었습니다. 무덤에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근심할 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그 여인들 곁에 서서 ‘주님께서 살아나셨느니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여인들에게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알려주는, 천사의 말을 들음으로 부활에 대한 확신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과 확신은 우리를 새롭게 하는 능력입니다. 천사의 말은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천사들은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했습니다.
이 책망 섞인 물음은, 예수의 죽음을 기정 사실로 여기고, 장례의 마지막 정리를 위해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로 부활의 주님을 보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을 비롯하여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깊은 좌절과 함께 혼돈, 그리고 헤어날 수 없는 절망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예수 부활을 믿을 수 없었던 그들은 주님이 다시 살아나시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살아나신 예수님을 죽은 자로만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시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기에 그 말씀을 기억하지도 않았습니다. 무덤을 방문한 여인들도 같았습니다. 이들의 희생과 헌신의 행동이 아름다운 헌신으로 평가할 수 있겠지만, 신앙적인 면에서는 불신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는 천상의 말은,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여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보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여인들은, 무덤이 비어 있고, 예수님의 시신이 그곳에 없는 사실을 목격했을 때, 다시 사신 주님을 믿어야 했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부활하시리라는 말씀을 수없이 들었었지만, 그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구원의 역사는 죽음의 역사로만 보면 안됩니다. 사망권세를 정복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 실망과 슬픔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는 부활의 주님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동행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성서에서는 “눈이 가리워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였다” (눅24:16)고 했습니다.

주님의 삶을 추종하며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는 용기를 가지고 있을 지라도, 부활의 주님과 함께하는 신앙이 아니면, 그곳에는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을 즐거워하며 예배하는 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깨끗하게 바르게 희생하며 살지라도, 부활의 주님과 함께 하는 신앙이 아닐 때에는, 예수 생명의 삶을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그곳에는 마치 빈 무덤을 찾아 장례의 마무리를 위해 희생하는 여인들의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바른 신앙의 삶은, 다시 사셔서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을 기뻐하고, 그 분을 예배하며 즐거워하며, 그 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과거에 계셨지만 지금은 죽어있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나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믿음이 되지 마십시오.

천사들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죽은 예수님과 빈 무덤만을 보지 말고,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보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사건은 인간이 만든 논리적 영역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 있는 확실하고 분명한 영역입니다.

신학자 브루너는 부활과 성육신의 역사는 유사한 점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 어느 것이나 믿음으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고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늘 위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보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믿으면, 사람이 되신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인간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올라가신 것을 믿을 때에는 하나님 되신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함께 함으로 하늘의 능력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봄이 오면 앙상했던 나무 가지에 물이 오르면서 새로운 싹이 돋아납니다. 이러한 자연의 부활역사를 보면서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만은 유독 믿지 못합니다. 그것은, 늘 생각하는 고정 관념을 가지고서 결코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라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고전 15:19) 어거스틴은 ‘알기 위해서 먼저 믿으라’ 고 했습니다. 살아나신 주님을 믿어야 부활의 삶이 내게 알려지고 부활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사상적 부활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사상적으로 새로워집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생활의 부활로 받아 드립니다. 그러므로 선하고 착한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사상적이고 생활적인 부활 그 이상입니다.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부활인 것입니다. 생명의 부활을 잃어버리면 사상적 부활이나 생활의 부활이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생명의 역사는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 임하는 영광의 역사이고 권능의 역사입니다. 그 진리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루마니아의 작가 ‘C.V. 게오르규’의 ‘25시’라는 대표적인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선량한 농부 ‘모리츠’를 주인공으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낀 약소 민족의 고난과 운명을 그린 작품입니다. 24시간이 지나가면 희망의 날인 새로운 1시가 오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이 약소국가 루마니아에는 24시가 지나도 새로운 1시가 오지 않고 고통과 절망의 시간이 계속되는 25시로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루마니아 뿐 아니라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절망의 25시로 걸어가는 우리에게 소망의 시간인 새로운 시간 1시를 주고 계십니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하는 삶에는 25시의 삶이 아니라 새로운 1시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25시의 죽음의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1시로 살아 나셨느니라”고 말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살아나셨느니라’고 말하는 천사의 말대로 부활의 확신과 그 능력에 있기를 바랍니다.

천사들은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여인들과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생활하시면서, 다시 살아나시리라고 하신 말씀을 믿지 못함으로, 그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빈 무덤을 확인하고서도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전혀 해보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번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22에서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 제사장 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하셨고, 18:31-32 에서는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에게 넘기어 회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제자들의 깨닫지 못함을, 성경은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 18:34) 고 기록했습니다. 제자들은 믿지 않기에 살아나리라는 말씀이 감추어진 말씀이 되었고, 예수님이 다시 사셨음에도 기억할 수 없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이후에, 또 다시 우리에게 기억하도록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살아나시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였던 제자들처럼, 부활이후의 예수님의 말씀을 잊고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남겨주신 기억해야 할 마지막 말씀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 말씀은 마태 복음 28:18-20의 말씀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또 다른 말씀은, 천사가 승천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남겨준, 주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말씀은 복음 명령과 복음의 삶, 그리고 항상 함께 하시리라는 말씀과, 다시 오시리라는 말씀입니다.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살아 계신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살아 나셨느니라’는 말씀으로 살아감으로 예수 생명을 가지고 사는 생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십자군 전쟁 때의 일입니다. ‘로자린느’ 라는 귀족이 십자군으로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남아서 집을 지키다가 사악한 하인에게 속아서 모든 것을 잃고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절망 중에 방황하던 부인은 어느 촌락에서 따뜻한 사랑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습니다. 부인은 그 동네에 살면서 닭을 길렀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하게 되어, 부활하셔서 함께 하시는 주님을 확신하는 부인은, 마을 사람들의 사랑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달걀을 삶고 색칠을 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때 부인은 달걀 위에 자기 집 가훈인 “주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을 믿자” 라는 글을 써 놓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떤 소년이 병든 어머니를 찾아서 가는 길에 이 마을에 우연히 들렸다가 부활절 달걀을 얻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그 달걀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려고 생각하며 길을 가는 중에 병들어 쓰러져 있는 늙은 병사를 발견했습니다. 그 병사는 허기에 지쳐 몸을 잘 가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그 달걀을 병사에게 주었습니다.
병사는 소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서 그 달걀을 받아 드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자기 집의 가훈이 그곳에 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병사는 다름 아닌 ‘로자린느’ 였습니다. 그는 그 소년에게 자초지정을 물어서 그 달걀의 출처를 알아냈습니다. 그 동안 전쟁 후, 사방으로 아내를 찾아 나섰다가 찾지 못하고, 허기진 채 쓰러져 있다가, 달걀에 적힌 그의 가정의 가훈을 보고 극적으로 아내를 찾게 된 것입니다.
이 부부는 다시 결합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 가정의 새로운 역사는 부활의 신앙을 확신하며, 함께 하시는 주님을 고백하는 달걀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전해지고 전해져서 결국 부활주일에는 색칠한 달걀을 나누어주는 풍습이 된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달걀에서 새로운 병아리가 부활하듯,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죄와 죽음의 절망적인 삶을 살아 계신 주님 안에서 용서와 구원의 소망의 삶으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믿음이 되지 마십시다. 부활의 주님의 생명과 능력을 가지고 사십시오. 그리고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십시오. 그러므로 인생의 승리자가 되십시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