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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의 능력 (고전 15: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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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박영준 목사

***** 유명한 영국의 웰링턴 제독이 나폴레옹의 군대를 패배시킨 날, 영국군인들은 이 승리의 소식을 빨리 고국에 전하고 싶었습니다.
제1차로 배가 출발을 했습니다.
영국 땅에 배가 도착하기 바로 직전 그 군함 위에 크게 이런 글자를 붙였다고 합니다.
“웰링턴 제독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패배시켰다.”
그런데 그날 안개가 많이 꼈습니다.
해협에는 원래 안개가 많이 끼는데 그날도 안개가 짙게 깔린 것입니다.
그래서 뒷 글자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Wellington Defeated”라는 단어만 아주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Defeate는 문장에 따라 ‘패배시키다’는 뜻도 되고 ‘패배 당하다’는 뜻도 될 수 있습니다.
Wellington Defeated
Defeate = 패배시키다. 패배당하다
즉 승리했다는 말도 되지만 패배했다는 말도 됩니다.
그러니까 짙은 안개로 인해 웰링턴이 패배했다는 말만 보이고 그 뒤의 단어들은 안개에 가리워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 영국에는 “엘링턴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영국의 생사 위기가 달려 있던 이 전쟁에서 패배했다니 영국 민들의 절망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서서히 안개가 걷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배가 육지에 가까워 오면서 단어 전체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웰링턴 제독은 워터루에서 나폴레옹을 패배시켰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절망은 순식간에 놀라운 승리로, 소망으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순간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절망감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대와 자신들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는 제자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보혈은 그 절망감을 승리의 소망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부활은 바로 그러한 역사였습니다.

부활은 먼저, 절망감 속에 살아야하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해 사망의 형벌 아래 살 수 밖에 없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해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부활은 미래에 우리의 실제적인 부활 소망을 주시는 사건입니다.

고전 11:20절에서 그리스도의부활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하십니다.
그냥 열매라고 하지 않고 첫 열매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활의 시작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당신 안에서 부활의 역사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차원의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그 분의 몸은 신령한 몸이었습니다.
썩어지는 몸이 아니라 썩지 아니하는 몸, 욕된 몸 대신 영광스러운 몸, 약한 몸 대신 강한 몸, 영광스러운 몸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성적으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차원의 세상에서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생각할 수조차 없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의 부활에 대해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차례에 걸쳐 부활에 대해 예고하셨습니다.
먼저 요나의 표적을 통해서 인자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고 예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주님께 새로운 이적을 보여 달라고 요청할 때 이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저들을 향하여 이 요나의 표적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부활을 시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전 청결 사건을 통해서 이 성전을 허물면 사흘 만에 일으키겠다고 하시면서 부활에 대해 간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몇 차례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그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 의미조차도 몰랐습니다.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고린도교회는 이 부활에 대한 논쟁이 심했던 교회입니다.
다른 것은 믿어도 부활은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를 쓰면서 15장 전체를 할애해서 부활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이 아침, 이 시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의심하고 거부하고 반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압니다.
확신합니다.
그 믿음과 소망 안에서 증인으로서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웃긴다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믿습니다.
믿음이 생명력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세상의 괴로움도 없을 것이요 항상 준비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는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보세요.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나요?
모든 사람이 놀라고 두려워했습니다.
마리아, 베드로, 요한, 그 외 모든 제자들은 놀라고 또 놀라고 두려워했습니다.
심지어 도마는 믿지 못하고 내가 직접 주님의 부활하신 증거를 확인하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까지 했습니다.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았기에 준비하지 않았고 준비하지 않았기에 부활의 주님을 기쁨으로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확실한 신앙이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 옷이 주님을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서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확신하고 준비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 앞에 어떠한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싸워 나갈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많은 핍박이 있었던 교회입니다.
이 교회가 핍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굳게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부활 신앙 때문입니다.
이 신앙이 저들을 이기게 하고 승리케 한 것입니다.

*****한 장로님이 돌아가실 때 목사님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분은 죽으면서 어린아이같이 활짝 웃으면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이제 나는 이 공간의 세상에서 영원의 세상으로 가는 문으로 들어갑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아주 밝고 환한 웃음으로 잠들었다고 합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부활에 대한 온전한 믿음 가운데 살아가십시오.
저는 이 부활 설교를 준비하면서 교회 안에서는 더 이상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이요 진실이다’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것을 입증하려고 하기보다 어떻게 믿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이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미래에 우리 또한 이 부활에 참여한 다는 확실한 믿음 안에서 소망으로 삼고 준비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한 믿음과 준비가 없으면 우리는 그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활은 하게 될지 모르지만, 기쁨과 감사의 찬양으로 이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은총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모든 사람들이 이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문제는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입니다.
곧 천국이냐 지옥이냐의 차이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과 준비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준비하고 믿음으로 확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것이 현실이 되었을 때 기쁨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우리에게 미래의 소망을 줄 뿐 아니라 현재적으로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일한 부활의 능력 안에서 살아갈 근거가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곧 삶의 변화와 능력을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바로 현재적인 부활신앙을 말합니다.

우리가 부활에 대해서 생각할 때는 두 가지 시제로 연결합니다.
과거의 예수님의 부활, 그리고 미래의 부활, 이것이 대체적으로 전형화 된 생각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이요, 우리의 미래적인사건이면서 또한 오늘 현재 속의 부활 사건이기도 합니다.
부활은 오늘 우리에게 있어야 할 사건입니다.
부활은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차원의 삶입니다.
이렇듯 오늘우리의 삶 속에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부활의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은 완전히 새로운 생명의 차원으로서의 삶입니다.
나사로 같이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같이 수냄 여인의 아들과 같이 죽었다가 숨이 다시 돌아오는 곳이 아닙니다.
이들처럼 다시 살아났다가 언젠가 다시 죽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활에 대한 하나의 예표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새로운 차원의 생명입니다.
영원한 부활이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서 새로운 사람으로 살게 하시고자 하는 사건이 바로 부활의 사건입니다. 

***** 한국 초대교회 시절의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이 남긴 에피소드 가운데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분이 예수를 믿고 제일 먼저 한 일의 하나가 부고 장을 돌린 일이었다고 합니다.
‘김익두 사망’
이렇게 써서 자기 마을에 돌렸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반신 바의 했는데 어느 날 보니까 버젓이 마을에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그가 성경책을 가지고 다니며 전도를 하고이었다는 것입니다.
김익두가 사기를 쳤다고 생각한 마을의 불량청년들이 지나가는 김익두에게 ‘죽기는 뭘 죽어.’하며 물바가지를 씌웠더니 김익두 목사님이 물을 털면서 “김익두가 죽었으니 망정이지 김익두가 살았다면 넌 벌써 요절났다”고 말했습니다.
옛 사람 김익두가 죽음으로 새사람 김익두가 살아난 것입니다.

바로 이 삶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삶, 새로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능력을 이루는 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자, 그런데 우리는 지금 부활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영혼 구원은 받았는데 전인적인 구원에는 실패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으로서 힘이 없고 능력이 부족하면 우리는 현재적 부활의 삶을 이루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는다, 죽는다, 하지만 말로만 죽었을 뿐입니다.
고백으로만 죽었을 뿐 실제 삶 속에서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작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내가 살고, 내가 주장하고....

사데교회를 기억하십니까?
계시록에 나오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가운데 나오는 다섯 번째의 교회가 사데교회입니다.
<사데교회> =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지만 죽은 자”
이 사데 교회는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지만 죽은 자”라고 주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름은 살았다는 뜻이나 실상은 죽은 무기력한 교회로 책망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바로 그러한 이름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름은 거룩한 이름인데 실상의 죄의 어두음으로 추락하는 삶은 아닌지요?
나의 이름이 바로 그러한 이름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는 주님의 부활과 함께 새롭게 부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부활신앙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서야 부활입니다.
이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 받아 연합한자가 되리라.”(롬6:5)

바울의 고백과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나 자신을 십자가에 철저하게 못 박을 때 나는 주님과 함께 현재적인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할 때 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라진 자로서 내 자신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3)

우리의 변화된 의식, 변화된 인품, 삶의 내용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 미국에 후버 댐이라고 있습니다.
이 댐의 입구 게시판에는 댐 공사를 하다가 희생당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아주 신안 깊은 한 문장의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미국의 후버 댐>
“이들이 희생당한 이유는 사막에 장미꽃이 피어나고 골짜기에 생명의 강이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희생당하신 이유는, 메마른 영혼에, 부서진 인격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기 위해서요, 사망의 골짜기에, 영생의 생명의 강이,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우리는 미래에 부활의 삶, 천국의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의 부서진 인격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 부활의 능력을, 찬양하는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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