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주일] 부활은 내가 꼭 경험해야 할 사건이다.(계 20:1~8)

  • 잡초 잡초
  • 166
  • 0

첨부 1


- 설교 : 정연수 목사

(계 20:1-6) 『[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3]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리라』
+++++++++++++++
설 교 본 문
+++++++++++++++
할렐루야!
부활의 아침, 아름다운 아침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영원한 생명에 안정적으로 투자하고 사십니까? 아니면 될지 안될지 모르지만 요행을 바라는 마음으로 투기하고 사십니까?
부활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 개념입니다. 우리 모든 신앙의 중심과 목표가 바로 부활에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는 바로 이 부활 하나를 바라보고 세상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투자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 15:19-20) 『[19] 우리가 이 세상만을 생각하고 그리스도께 소망을 걸었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 부활 이전에는 그리스도인이 없었다!
벤 부렌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예수 부활 이전에는 그리스도인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믿음, 그 믿음을 가질 때에 비로소 우리는 믿음의 사람, 즉 그리스도인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두 가지 부활이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부활이요 또 다른 하나는 사망의 부활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대로 표현하자면 하나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의 부활이요 또 다른 하나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으로의 부활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둘째 사망의 특징은 영원히 죽지 않는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죽지 않고 죽음의 고통을 당합니다. 그곳에서는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 됩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그러한 축복이 없습니다. 꺼지지 않은 불 못에서 영원히 죽지 않고 죽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소망하는 부활은 생명의 부활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의 부활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부활인데 바로 생명의 부활인 것입니다. 이 생명의 부활에는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두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첫째는 회복이고 둘째는 부흥입니다.
생명의 부활 속에는 회복의 능력이 있습니다. 부활을 통하여 모든 것들이 회복됩니다. 부활 속에 들어있는 회복의 능력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생명으로의 회복
부활을 통하여 모든 죽음이 생명으로 회복됩니다. 부활은 모든 죽음을 생명으로 다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셨습니다. 이제 다시 우리가 생명 없는 것을 붙들어야 되겠습니까? 생명 없는 것을 붙들고 그것을 어루만지면서 낙심하고 슬퍼하고 있는 우리에게 다시 사신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오신 것입니다. 다시 사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사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그분의 생명을 만지고 느끼고 그 분과 생명의 관계를 회복하고 기쁨과 희망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신앙과 삶이 회복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움으로의 회복
오늘 본문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은 마치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것처럼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상실했던 모든 깨끗함과 아름다움이 부활을 통하여 다시 회복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이 깨끗하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아름다워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미워질 때가 있고 흉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추하게 사는 사람도 없지 않아 많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모습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날에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의 모든 얼굴과 삶이, 인격과 성품이 아름답게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잃어 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 아름다움으로의 회복이 생명의 회복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완전함으로의 회복
죄로 말미암아 타락 한 세상은 불완전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늘 불안전하고 그래서 세상에서의 삶은 늘 불안하고 초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그러한 우리 인간의 모든 불완전함을 완전함으로 회복시킬 것입니다. 모든 불완전함이 완전함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는 눈물도 애통도 없습니다. 완전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부활 속에는 부흥의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부활은 단순한 회복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회복만으로도 큰 은혜가 되지만 부활은 부흥의 능력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회복과 부흥은 본시 창조의 원리요 원칙입니다.

모든 것이 주안에서 다 회복되고 있습니다. 사람도 자연도 다 회복되고 있습니다. 회복은 창조의 원리요 원칙인 것입니다. 부흥과 성장도 창조의 원리입니다. 밀알 하나를 심으면 그것이 30배 60배 100 배가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최소한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100배도 넘습니다. 하나님의 원칙과 질서 안에 있으면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시편 1편에도 보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하는 일마다 형통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매를 맺고 형통한 삶을 사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은 단순히 회복되는데서 그치지 않고 부흥하고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이라는 단어를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보통 부활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단어로 설명되어 집니다. Resurrection(부활). Restoration (회복). Revival (부흥)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날과 시한은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래가 될 것이지만 그 부활의 능력은 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지금부터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그리고 온전히 믿으면 이 땅에서도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덧입으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 부활의 능력은 회복과 부흥으로 우리의 삶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죽음과 실패는 생명과 성공으로 회복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악함과 추함은 선함과 아름다움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우리의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모든 삶은 완전하고 안전한 삶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는 진정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부활의 능력을 덧입기를 원하신다면 이 부활의 능력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알아야만 합니다. 이 놀라운 부활의 능력과 축복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돈은 귀하고 좋은 것입니다.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구원과 부활을 살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지식으로도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권세로도 구원과 부활을 살수는 없습니다. 구원과 부활은 오직 믿음으로만 살 수 있습니다.

오직 믿음의 부유함으로만 이 부활의 능력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문제는 이 믿음이 부유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참으로 가난하며 초라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것이 너무 보잘 것 없고 초라하여 부활의 능력을 덧입지 못하고 참으로 가난한 삶, 구차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삶
사람을 동물로 비유하여 분류하면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개형과 고양이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잘 따릅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 때문입니다. 개는 주인이 아홉 번 잘못하다가도 자신에게 잘해준 것이 한번 있으면 그 한번의 잘해준 것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억이 개로 하여금 사람을 잘 따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아홉 번 사람이 잘 해주다가 한번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 한번을 기억하고 그 기억이 사람을 잘 따르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실상은 고양이에게 개보다 더 많이 잘 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고양이는 사람을 잘 따르지 않습니다. 이런 구분은 실제 개와 고양이를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말과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그런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한번의 사랑을 받고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러 번의 큰사랑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사람을 나누겠습니까? 그것은 그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과 상처를 기억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대개는 사람들이 사랑을 기억하기보다는 상처를 기억합니다. 사랑은 금방 잃어버리면서 상처는 오래 기억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랑과 은혜를 받은 존재이기도 하지만 사명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는 은혜를 맡은 자들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들이 있고, 은혜를 받은 자들이 있고, 은혜를 맡은 자들이 있는데 받은 바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자는 은혜를 맡은 자입니다.

안 믿는 것은 아닌데 믿음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믿음이 영 시원치 않습니다. 평생을 믿어도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면 혹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열심히 믿으려고만 하지 말고 바르게 믿으려고 힘쓰라! 바르게 믿는 믿음은 은혜로 믿는 믿음입니다. 부활신앙은 죽음 후에 다시 사는 삶의 가치로 살기에 모든 것을 은혜로 해석하는 신앙입니다.

주님이 죽으셨을 때에는 제자들이 다 뿔뿔이 흩어져버렸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것을 사실로 알게되자 제자들의 인생은 180도 방향이 전환되었습니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꾸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슬픔이 기쁨으로 바꾸어졌습니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꾸어졌습니다. 옹색하던 사람들이 너그러운 사람으로, 겁쟁이들이 용기 있는 사람들로 바꾸어졌습니다. 생각도 바뀌었고, 행동도 바뀌었고, 가치관도, 모든 것들이 다 바뀌었습니다. 죽어도 다시 산다는 이 사실이 저들의 모든 것들을 다 변화시켜버렸던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는 사실 누구에게나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톨스토이의 부활이라는 작품이 왜 그렇게 감동을 줄까요?
그 책은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네플류도프 공작이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그는 겉으로는 근사하나 속으로는 정욕과 안일만을 추구하는 인생이며 그가 어린 하녀 카추샤를 농락했지만 인간의 죄성, 죄에 대한 불감증으로 아무런 가책을 모릅니다. 그러나 또 하나 부활에서 보여준 위대한 사상은 인간은 그렇지만 또 한편의 구석에는 진실을 향한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입니다. 네플류도프가 배심원이 되어 한 살인자 여자를 판결하는데, 그 살인을 한 여자가 바로 다름 아닌 자기가 농락하고 버린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저 여자가 그런 사람이 된 원인이 자기에게도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양심이 깨어나서 그는 인생에 U턴을 합니다. 즉 바르게 살겠다고 하여 양심에 모든 것들을 버리고 카츄샤와 함께 시베리아로 떠납니다.

톨스토이는 이 전환을 부활로 보았습니다. 이 책을 사람들이 많이 읽었고 당시 인류 최고의 책이라고 격찬을 했지만 사람들은 정작 회심, 부활하지 않았습니다. 톨스토이 자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이 위대한 부활을 읽었지만 10년도 안되어서 부정부패로 인하여 무신론자들인 공산주의자들에게 무너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도덕의 부활로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변화는 감동으로만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감동은 사람을 순간적으로는 움직이지만 변화를 시키지는 못합니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무엇인가요? 사실입니다. 오직 사실만이 사람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12명의 제자들이 다 180도가 변화되어서 새로운 삶을 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믿으면 우리의 죽은 양심이 깨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저 양심의 능력, 진리의 능력이 나타나서 우리가 나만 변화시킬 뿐이 아니라,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괴테는 노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부활을 사실로 믿기 전에는 나의 모든 것은 오류였다." 이 부활 신앙이 있어야만 우리는 허무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이 부활신앙이 있어야만 우리는 환난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이 부활신앙이 있어야만 우리는 고독도 죽음도 못된 생활도 청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산다는 이 소망 위에서만이, 참으로 바르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이기는,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놀라운 길을 가르치려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 부활의 신앙을 굳게 붙잡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힘들고 어려운 세상에 굴하지 아니하고 꿋꿋하게 세상과 맞서서 당당하게 세상을 정복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알의 밀알은 그 자체로서 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은 땅에 심겨지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면 어느 시점에 가서 다 말라 죽게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땅에 심겨질 때 땅 속에서 썩게 되고 새 생명으로 배태되면서 싹이 돋아나고 줄기가 생기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씨의 형태는 없어졌지만 그것이 소멸된 것이 아니고 변형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표상에서 부활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은 현세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부활은 완전히 소멸된 후 새로운 것의 창조가 아니라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삶의 의미며 목적입니다. 부활은 삶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복음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이 있습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세상은 잠시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 같은 세상이요 이 세상 너머에 영원한 세상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연연하다가 영원한 세상을 놓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을 놓치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 세상을 놓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욕심 때문에 저 세상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죽어서 갈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서도 맛보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 속에 들어있는 회복의 능력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