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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엠마오와 예루살렘 (눅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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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링컨 대통령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우리가 기억하기를 화려한 미국의 16대 대통령으로 전 세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역사 인물로 인정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성공보다는 실패의 이야기가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우선 어릴 때, 성정과정에서 어머니를 일찍 잃어서 정신적 안정이 문제가 되는 분위기에서 성장을 했습니다. 평생을 두고 어머니 사랑을 충분히 다 받지 못한 것이 그의 마음에 괴로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정치에 뜻을 두고 최초로 주의회에 입후보하였으나 첫 번째 낙선되었습니다. 그래서 ‘아, 나는 정치에 아마 은사가 없나보다. 사업을 하자!’라고 생각을 해서 사업가가 되려고 노력을 했는데 그만 동업자를 잘못 만나는 바람에 실패를 해서 17년 동안 그 빚을 갚아주는 일에 온갖 고난을 다 겪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사랑하는 처녀가 생겨서 마음에 안정을 찾는가 했더니 그 처녀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래서 또 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국회의원이 되자!’하고 하원 의원에 출마를 했는데 또 떨어지고, “US Land Office”라고 하는 토지국이 있습니다. 거기에 국장으로 임명받기를 바라고 노력했는데 거기서도 또 실패를 하고, 나중에 ‘모르겠다! 상원 의원에 한번 출마를 해보자!’ 상원 의원에 출마를 했다가 또 떨어지고, 부통령 선거에 도전했으나 또 떨어지고……. 이런 수없이 많은 실패 이후에 16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어 짧은 역사를 살고 암살당해 죽게 되는 링컨의 일대기였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비슷한 사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 나타난 두 사람의 신분은 예수님의 제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는 12제자 외에도 70인 제자를 두고 계셨습니다. 이 사람들의 말 속에 그들의 소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21절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소원은 “영광스런 이스라엘의 회복”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승천하시는 자리에서도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라고 물어보게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은 어떤 것이었는가? 이 백성들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우리 민족은 하나님의 특별 선택권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맞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세계에서 가장 크게 되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세계만방에 창대케 하리니 너희는 가장 유명한 백성이 되고 가장 잘 사는 복 있는 민족이 되고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복의 근원의 축복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기초로 해서 즉, 주인으로 하여 다른 민족을 다스릴 것을 약속하였다고 아브라함의 후손은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와 같은 민족의 빛이 가장 찬란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시절이 다윗과 솔로몬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 약 100년 정도의 역사는 그 주변 모든 국가들이 때를 따라 비단과 보석을 가지고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쩔쩔 매서 가장 빛난 민족의 영광이 나타났던 시절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 남방의 나라 시바의 여왕이 온갖 보물을 싣고 솔로몬을 찾아와서 그의 지혜를 찬양하고 “우리나라를 침략하지 말아주십시오.”라고 평화를 구하러 왔는데 솔로몬이 시바의 여왕을 그냥 데리고 살아버려서 자식을 낳았는데도 이웃나라에서 아무 소리도 못하는 초강국의 위용을 떨치던 역사가 그들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가 이 시대에는 어떤 상황이었나? 아니, 빌라도라는 로마인이 멀쩡하게 총독의 자리에 앉아서 호령을 하고, 하나님의 나라 그림자인 예루살렘은 마치 화려한 유니폼을 입고 준마를 타고 껄떡거리며 다니는 로마 군인의 퍼레이드 장소와 같이 그렇게 되어 버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자존심이 아주 말이 아닙니다. 유대인들, 특별히 예수님 측근의 사람들이 예수에게 기대한 것은 바로 이 문제의 해결자로 영광스런 이스라엘의 회복, 이것이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대감이었습니다. 만약 그때가 되면 그 일을 위해서 몸을 바친 예수님 주변의 사람의 개인의 성취도 눈부시게 빛이 난 기회가 올 것을 기대하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대했던 예수님은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로마를 쫓아내기는커녕 로마 군인들에게 숱한 매를 맞으며 온갖 조롱을 당하고 로마 군인이 내려치는 무지한 망치에 못을 박히고 창으로 옆구리를 쿡쿡 찔리면서 비명을 지르며 돌아가셨어요. 그들은 이제 민족적 희망이나 개인의 모든 소원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까지 출세는 고사하고 생명유지가 위태로워졌습니다. 오늘 말씀에 때는 저녁이라 서산으로 넘어가는 태양이 저녁노을을 만들어서 온 세상을 붉게 만드는 그런 시간에 이제 대지 위에 어둠의 장막이 오게 될 쓸쓸한 무렵, 이스라엘의 꿈과 자신들의 희망이 마치 떨어지는 저 태양과 같이 사라지고 캄캄한 민족 앞날과 위태로운 자신들의 운명을 슬퍼하면서 힘없이 낙조를 바라보며 터벅터벅 패잔병의 모습으로 고향을 찾아가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게다가 근일 예루살렘에는 어떤 여자들이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을 냄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의 분위기는 더욱 무섭고 불안한 공기가 감돌게 되어서 그들은 신변의 위험마저 느끼게 되어 빨리 예루살렘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 판단되어 엠마오로 피난을 가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전체의 말씀을 몇 가지 초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저희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였다.” 지금 그들은 실망의 엠마오 길을 가다가 웬 사람이 하나 끼어들어서 셋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년 동안이나 보아왔던 그의 얼굴은 알아보지 못하고 그토록 많은 설교를 들어왔는데도 그의 음성을 모르고 함께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의 제자들이면서 함께 가는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는가? 이미 그들의 마음이 예수에게서 떠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부활하신 예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예수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서더라.” 지금 그들은 실망의 포로가 되어있고 성공이 깨어진 슬픔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나도 죽을지 모른다!’는 예루살렘의 공포 분위기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에 눈이 가려져서 옆에 있는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와 함께 길을 가면서도 이 세상 것에 너무 많이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그런 것에 눈이 가려져서 옆에 계신 예수를 보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모스크바에 갔을 때 어디를 갔었느냐 하면 유리 가가린 동상 앞에 갔었습니다. 모스크바 거리에서 제일 화려하게 번쩍거리면서 서있는 동상은 유리 가가린의 동상이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우주인인 그는 러시아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가 우주여행을 최초로 마치고 돌아와서 아주 분명하게, 또 자신 있게 한 기자회견의 유명한 말이 온 세계에 방송되었습니다. “나는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나서 우주를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하나님은 없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우주인들은 갔다 와서 정반대의 말을 했습니다. 알드린이 공산권 헝가리 대학생들에게 말할 때, 대학생들이 “달나라에서 처음으로 무엇을 느꼈느냐?”고 질문을 했을 때 “예, 저는 달에 가서 제일 먼저 한 말이 “할렐루야”이었으며, 이 우주 안에 하나님의 숨결이 가득한 것을 제가 달나라에 가서 처음으로 느낀 기분입니다.” 또, 글렌은 “우주를 바라보고 지구를 떠나서 지구를 바라봤을 때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신 것을 보았노라.” 이런 말을 남김으로 같은 우주인이면서 같은 것을 경험했는데 그런 차이를 가져왔습니다. 왜 그랬을까? 마음이 다른 데 있으면 그렇습니다. 유리 가가린은 그의 마음이 기독교 국가를 반대하는 마음을 가진 반기독교 사회주의 교육에 물든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눈은 철저하게 가리어져서 하나님의 숨결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가가린은 공교롭게도 그 말을 하고 6개월 만에 죽었습니다. 글렌은 70세가 넘어서 “내가 다시 한번 미국이 나에게 기회를 준다면 우주여행을 다시 한번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그곳에 가서 하나님의 숨결을 다시 한번 체험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70세에 선택이 되어서 우주여행을 다시 한번 하고 돌아왔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히브리 민족의 영원한 실패는 메시아를 메시아로 보지 못한데 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졌고, 또 하나는 그들의 메시아관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메시아관은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인류 구원의 메시아 역할을 그들은 보지 못하고 유대 나라 민족 해방자 역할로 기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들 욕심에 맞춰서 메시아를 보았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시는데 이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영토에 속하는 20,014평방미터  밖에 되지 아니하는 이스라엘 그 한 나라만을 위해서 일하시기를 바라는 그들의 그릇된 메시아관이 예수를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 왕국을 계획했고 거기에 따라오는 성취와 행복의 조건들을 욕심스럽게 개인적으로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예수를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다음에, 그들의 눈이 가리워진 것은 예수에 대한 믿음이 불신의 믿음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여자들이 말하기를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을 퍼뜨린다고 그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제자들은 평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었어야 됩니다. 그들은 평소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 설교로 들었습니다. 평소 예수님의 부활 예언의 설교를 믿었다면 그 소문을 듣고 그들이 왜 엠마오로 가겠습니까? 거기 예수님이 그들을 책망하시는 말씀이 나타나 있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25절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들이 믿음이 있었다면 그 소문이 반가웠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예수의 말씀대로 예수는 부활하셨도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하신 곳을 찾아갔어야 되는데, 선지자들의 말한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말씀에 대한 신뢰가 없었기 때문에 부활의 주님을 찾아 나서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소문이 더욱 두렵고 공포 분위기를 가져와서 도망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소문으로 인한 핍박이 더욱 심해질 것이 두려워서 빨리 몸을 피하느라고 엠마오, 아무도 없는 시골을 찾아가서 몸을 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현대 인간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 우주의 모든 만물을 가지고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는데 그 길을 보지 못하고 나는 죽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면서 아주 열심히 인류가 다같이 멸망할 무덤을 열심히 파고 있는 존재들이다.” 맞아요.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예수의 부활 예언에 대해 믿음이 있었다면 사태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천사들이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이제 예수님은 그 미련한 제자들을 변화시키는 작업을 하시게 되는데 두 가지 일을 하십니다. 하나는 성경을 풀어 설교를 하십니다. 긴 설교를 하셨습니다. 27절에 보면 “이에 모세와 및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설명하시니라.” 설교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여기 두번째로 나타나는 현상은 “저희의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니” 그랬습니다. 가리웠던 눈이 말씀을 듣고 밝아진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로고스’즉,‘말씀’이라고 그랬습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과 계셨으며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니라. 그런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님 자신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풀어주었습니다. 설교를 해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성찬 예식을 해주셨습니다. 이 축복 기도라는 것은 소홀하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아멘’으로 마음에 받아들이면 자기에게 오는 복이 됩니다. 예수님은 축사로 그들의 눈을 띄웠습니다. 마리아는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처녀 잉태를 예고 받았을 때에 뭐라고 합니까? “마음에 두니라.” “말씀대로 이루어지리이다.” 그래서 그대로 됩니다. 이 축사, 축복 이런 것이 필요 없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왜 그것을 하셨으며 2,000년 동안 기독교 역사에 끊임없이 그것이 왜 내려오겠습니까? 이제 예수를 알아본 제자들은 가던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 사람들은 결국 엠마오와 예루살렘을 세 번 왕래하게 된 사람들이 됩니다. 첫 번째 여행은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로 간 것입니다. 이 여행은 예수를 바라본 희망의 여행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 개인의 성취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그런 발걸음으로 예루살렘을 향했던 것입니다. 두번째 여행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옵니다. 자기들의 기대는 이제 완전히 실패했고 환멸과 공포감, 좌절과 실망의 여행길이었습니다. 세번째 여행은 엠마오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예수에 대한 새로운 이해, 즉 올바른 메시아관을 정립하고 사명의 길을 다시 떠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여행을 할 때 방향 감각을 언제나 “해 돋는 편을 향하여”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명감은 위험하다고 예루살렘을 피하지도 말고 안전하다고 엠마오로 피난의 길을 떠나지도 말고 언제나 해 돋는 편을 향하여 석양이 지는 저 엠마오로 가지 말고 해 돋는 아침 예루살렘을 향하여!

오늘 말씀은 부활 후 사건인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우리 상식에 어떤 행동을 취하셔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 생각으로는 이렇습니다. 빌라도 앞에 한번 나타나시면 어떨까? 그러면 빌라도가 얼마나 벌벌 떨겠습니까? “봐라! 네가 사형 판결을 내린 내가 여기 다시 살아났느니라.” 그러면 로마는 물러가야 합니다. 헤롯의 법정이나 가야바 법정에 당당히 나타나셔서 “너희가 빌라도 앞에 가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렇게 소리 지르던 나를 보라! 다시 살았느니라.” 그러면 어떤 반응이 일어나겠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저 예루살렘 광장에 찬란하게 나타나셔서 “보라! 내가 다시 살아났느니라.” 대 예루살렘 군중집회를 소집하고 베드로가 사회를 보고 열두 사도가 단상에 올라와 앉고 예수님을 돕던 마리아들이 특송을 한번 부르고 예수님을 강사로 보기 좋게 예루살렘을 뒤집어엎는……, 왜 그런 것을 한번 안 하셨을까?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은 마치 남이 볼까봐 두려워서 숨어 다니는 분위기로 나타나고 계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이미 예수님은 지나간 3년 동안 그렇게 화려하게 나타나셨습니다. 일만 명이 넘게 보이는 군중집회를 하루 종일 며칠씩 하시고 그들이 배가 고프다고 하니까 기적을 발해서 그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게 해주고, 주님을 찾아왔던 모든 환자는 어떤 경우에 있어도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다 현장 치유, 기적 치유를 다 받았고, 어떤 때는 죽음의 자리에서 사람을 살려내고 변화산에서 수천 년 전 하늘나라로 간 모세와 엘리야를 불러내어 말씀 나누시는 신비를 보여주고 안 한 것이 없으시잖아요? 너무나도 화려하고 장엄한 신비적 기적 창출의 집회와 목회를 지나간 3년 동안 예루살렘과 갈릴리를 중심해서 온 나라를 다 뒤집으셨습니다. 결과는 그들이 예수를 죽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게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누구에게도 나타나지 않으시고 대중 집회를 안 하시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도움이 될 사람들에게만 부활해서 찾아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런 것은 그만 두겠다. 이미 그것은 지난 3년 동안 내가 다 했던 일이다. 이제는 나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줄 제자가 필요하다. 누구에게도 안 나타나시고 평소 자기와 굳게 약속하였던 제자들만을 찾아서 사명을 재확인시켜주시는 작업만 하고 계십니다. 낙조에 슬픔의 고개를 떨구었던 제자들은 새벽이 다가오는 예루살렘의 아침 해를 바라보며 25리 길을 다시 걷기 시작하죠?

여러분은 오늘 아침 어떤 실패의 괴로움을 가지고 교회에 오셨습니까? 우리는 때로 세상 조건에서의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실패는 아닙니다. 그것은 부활의 주님이 실망의 엠마오 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말씀과 함께 축사를 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또다시 중단이 없는 순례의 길을 저 해 돋는 편을 향해서 갈 수 있습니다. 같이 가면서도 예수를 보지 못한 제자들, 교회에 와서도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가는 심령들! 오늘의 말씀이 주님을 만나는, 눈이 밝아지는 기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는 때로 실망의 빛으로 저 엠마오로 향할 때가 있습니다. 떠오르는 저 예루살렘의 아침 태양을 뒤로하고 말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저희는 각기 실패의 고난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는데 눈이 가리어져서 주님을 만나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 말씀을 통해서 가리어졌던 저희들의 눈이 밝아지고 무디어졌던 저희 심령이 새로워져서 주님을 만나고 가던 길을 돌이켜 저 아침 해가 떠오르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희망의 발걸음을 돌리게 하옵소서. 이 나라 국민 대표자가 되려고 했던 1천명의 낙선자들이 엠마오로 가지 아니하고 아침의 예루살렘을 향해서 국민 화합에 도움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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