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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왜 울고 있느냐? (행 10:34-43, 골 3:1-4, 요 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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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탤런트 이은주 씨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에 우리나라에서 자살자 수(數)가 2.5배로 급증했다고 하는 소식입니다. 사는 것이 힘들고 고달파서 가뜩이나 살고 싶지 않던 사람들이 이은주가 죽는 것을 보고서는 ‘에라, 모르겠다. 이참에 나도 죽어버리자!’고 하면서 덩달아 목숨을 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원래 근본적으로 오래 살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 세상이 좋다’는 말이 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래오래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보약도 먹고 운동도 하면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진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하나뿐인 목숨을 함부로 다룰 수는 없는 일입니다. 사람 맘대로 죽기도 하고 다시 살아날 수도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기분이 나쁘거나 사는 재미가 별로 없을 때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어서 저 세상에 가 있다가, 세상사는 재미가 괜찮다는 소식이 들리면 다시 살아나서 이 세상에 돌아올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지금처럼 목숨을 유지하려고 아등바등 대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건강을 보전하고자 그렇게 애쓰지도 않을 것이고, 인생사는 것이 고달프다고 해서 투덜대지도 않을 것이며, 먹고사는 문제로 인해서 그토록 고민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단 한 번뿐입니다. 그리고 내 목숨이라고 해서 내 맘대로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한 번 인생을 그 나름대로 살아보고 난 다음에 ‘어이쿠 잘못 살았구나!’하고 후회가 되어서 다시 태어나 새롭게 고쳐 살 수도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우리 인간의 죽고 사는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하루라도 더 살고 싶어 안달하고 있는 모습이 측은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는 우리 인간의 맘대로 할 수 없는 일인데도, 어쨌든 사람들은 오래 살고 싶어서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습니다. 징그러운 굼벵이도 잡아먹고, 살아있는 곰의 쓸개즙도 빼어먹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떡합니까? 아무리 손사래를 치면서 죽음이 싫다고 거부하더라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죽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죽을 때가 되면 죽어야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죽음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원수 중의 대원수입니다. 그 죽음이라는 것이 육체적이고 생리적인 죽음을 말하던지, 아니면 가치나 의미에 있어서의 죽음을 뜻하든지, 어쨌든 모든 죽음은 우리 인간에게 영원한 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옛날 한 여인이 동굴로 된 어떤 무덤 앞에서 아주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그토록 존경하고 사랑하면서 섬기던 그의 선생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다가,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져서 그녀는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선생님의 시신에다가 향료를 발라드리고자 안식일이 끝나고 난 저녁에 다른 두 여자와 함께 선생님이 묻히신 무덤에 찾아갔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자, 평소 마음속으로 선생님을 존경하던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그가 죽으면 묻히려고 준비해두었던 무덤에다가 선생님을 모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녀 일행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무덤 입구를 막아놓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신을 누군가가 가져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누가 주님의 시신을 무덤에서 가져갔어요. 주님을 어디다 모셔두었는지 모르겠어요.”하고 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녀의 말을 듣고 따라와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무덤 안에서 예수님이 입으셨던 수의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냥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했으리라는 것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미 예언되어 있었고, 주님께서도 생전에 여러 차례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리라는 것을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물론, 무덤 앞에서 울고 있던 그녀도 주님의 부활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제자가 돌아간 다음에도 그녀는 무덤 앞에서 마냥 슬피 울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울다가 그녀는 무덤 안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 안에는 흰옷을 입은 두 천사가 서 있었습니다. 그 천사들이 “왜 울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누가 우리 주님을 모셔갔는데, 그분을 어디에 모셔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하고서는 우연히 뒤돌아다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누군가가 서 있었습니다. 사실 그는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며 존경하던 바로 그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가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왜 울고 있는 거요? 누구를 찾는 거요?”하고 묻자, 그녀는 그가 동산관리인 줄로 알고 “당신이 그분을 가져갔으면 어디에 모셔두었는지 말씀해주세요. 제가 모셔가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 곧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셨습니다. 그제서야 막달라 마리아는 그가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고서는 “선생님!”하고 소리쳤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 최대의 원수인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부활하셔서 맨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 앞에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 살다가 드디어 간음죄를 지었다는 명목으로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막달라 마리아, 그녀는 예수님에 의해서 극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예수님만을 따라다니면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지극정성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돌아가셨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살 소망조차 잃어버렸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그녀는 주님이 묻히셨던 무덤에 찾아가서 그처럼 슬퍼하면서 울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가장 천하고 불쌍한 인생을 살아야만 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맨 처음으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중요한 의미를 이 사실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 유명한 복음전도자인 무디선생이 젊었을 때에 장례식설교를 부탁받고서는 예수님의 장례식설교대로 해보기 위하여 복음서를 두루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무디는 성경에서 예수님의 장례식설교를 도무지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죽었던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났다는 기사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디선생은 읽고 있던 성경을 내려놓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크게 외쳤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참생명이시기 때문에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첫째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의 죄를 지음으로써 우리 인류를 지배하고 있던 사망의 세력이었는데, 이제 둘째 아담인 예수께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물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죽음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말하기를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에 우리도 함께 다시 살아났다(골3:1)’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난날에 가지고 있던 세상에 대한 모든 미련과 염려를 다 버린 다음, 하나님께 우리 인생을 맡기고 그 말씀에 따라 살게 될 경우, 우리가 그렇게 원하는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이 세상일을 염려하느라고 시간을 보내지 말라(골3:2)’고 했습니다. ‘마치 죽은 자가 이 세상에다가 미련을 두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 대하여 조금도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늘에 있는 풍부한 보화와 기쁨에다가 관심을 두고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땅에 있는 것들은 다 잊어버린 후에 하늘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도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비밀을 온전히 깨닫게 됨으로써 어리석고 미련한 인생을 살지 아니하고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부모님과 이웃 사람들에게는 은혜와 사랑을 나눠주면서, 우리자신은 보람과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1.그런고로, 오늘 우리는 부활에 대한 성경말씀을 잘 깨닫고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일 베드로를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이 부활진리를 확실히 믿었다면, 그처럼 허무하게 주님을 배반하고 떠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신앙만 확고하다면, 조금 속상하거나 괴로운 일이 있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신앙이 투철하다면 현실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미래에 대한 소망과 비전이 확실한데, 왜 현실에 집착하겠습니까?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는데, 왜 누가 죽기를 두려워하겠습니까? 미래도 불확실하고 현실도 어렵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쉽게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비록 현실이 아주 고달프고 괴롭더라도, 미래에 대하여 확실한 믿음만 있다면, 그 현실적인 고통과 시련을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신앙은 참으로 귀중한 진리입니다. 부활신앙은 우리에게 참소망을 갖게 하고 살아갈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생명이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도 그분과 함께 빛날 것이며, 그분의 모든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될 것이다(골3:4)’라고 했습니다.
 
  어떤 마을에 꽃을 파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 노인은 아주 가난했습니다. 그가 입고 있는 옷들은 아주 허름했고, 얼굴에는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항상 행복한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노인을 가리켜서 `행복한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그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보지요?” 그 노인은 특유의 밝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내게 행복의 비결이 하나 있지요. 이 나이에 어찌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고통을 당할 때마다, 저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부활의 새벽을 맞지 않았습니까? 저는 고난이 있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사흘만 기다리자'고 다짐한답니다. 그때부터 제 삶이 한결 행복해졌지요.”

  그 노인이 누리는 행복의 근원은 부활 소망이었습니다. 봄이 오면 앙상한 나뭇가지에도 새순이 돋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과 시련이 닥칠 때마다, 마음속으로 ‘사흘만 기다리자!’하고 다짐하시기를 바랍니다.
 
  2.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를 열심히 따라 가면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널리 전해야 합니다.
 
  사실 육체적인 죽음도 우리가 두려워할 일이지만, 그보다 더무서운 것은 영적인 죽음, 곧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그리고 이웃사람들과 전혀 교제가 없는 것입니다. 생명이신 하나님을 떠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잠시 그 목숨은 붙어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하루하루 사형장으로 달려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거나 떠나게 하는 것은 이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집착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세상에 대한 미련과 염려를 버려야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것들은 하나님과 가깝게 해주고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게 해줍니다. 예를 들자면, 사랑과 용서, 희망과 미래, 희생과 봉사, 헌신이나 충성과 같은 것들을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부활한 사람은 하늘에 있는 풍부한 보화와 기쁨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골3:1)’고 했습니다. 우리가 장차 들어가서 살게 될 영원한나라인 천국에 관심을 두고 살 때,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남을 돕거나 베푸는 일에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얼굴을 찡그리거나 다투지 않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요컨대, 부활신앙을 확실하게 갖고 있는 사람은 무덤 앞에서 우는 일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육체적인 죽음이 두렵거나 무서워서 인생을 슬프게 사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부활신앙을 갖고 사는 사람은 모든 일을 미래지향적으로 생각하면서 열심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렇게 살 수 있기를 원합니다. 쩨쩨하고 용렬한 신앙을 버리고, 마음을 넓혀서 천국시민답게 살아야겠습니다. 부활을 확실히 모르고 살던 지난날에는 세상 일로 인해서 서로 다투고 원망하면서 살았더라도, 이제 우리는 저 넓고 영원한 나라인 천국에 들어갈 소망을 갖고 사는 천국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고로, 오늘 우리는 죽은 자가 묻혀 있는 무덤을 바라보면서 슬피 울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이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소망 중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머지않아 우리는 천국에 가게 될 텐데, 이 세상 일로 인하여 서로 미워하거나 원망하면서 다투어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사는 것은, 부활이 뭔지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나 취할 태도입니다. 이 세상의 명예나 권력 때문에, 그리고 몇 푼어치 되지 않는 자존심 때문에, 남을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직도 부활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냥 무덤 속에 계속 갇혀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부활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부활한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이 묻혀있는 무덤을 바라보고 한숨을 짓거나 징징대고 있을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감사하면서 찬양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설교하기를 ‘어느 나라 사람 누구든지 하나님을 공경하고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신다(행10:35)’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부활하신 주님의 제자답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부활하신 주님을 본받아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과 소망을 주면서 살아가는 복된 심령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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