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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주님 다시 사셨다!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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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호석 목사

  주님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의 권세에서 풀어 다시 살아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심으로 이제 죄악의 사슬은 끊어지고, 불의가 이기는 것 같은 착각은 깨어지고, 죽음이 끝이라는 절망도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내 삶의 구주로 모셔 들임으로 이제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죽음 넘어 생명의 세계를 소망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되었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우리의 믿는 것도 행함도 무의미한 것입니다. 주님 없는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데, 그 주님이 죽었고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무슨 구원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 주님이 살아나셨기에 오늘 우리의 믿음, 우리의 삶이 가치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부활하신 현장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첫째, “무덤을 가로 막고 있는 돌이 옮겨졌다”라고 증거합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은 무덤을 찾았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그들은 ‘무덤을 가로막고 있을 큰 돌을 누가 굴려 내줄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이 여인들의 걱정은 무덤(죽음)을 바라보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마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커다란 돌, 게다가 그 무덤의 돌은 인봉을 하였고, 로마 병사가 지키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죽음이 어떻게 우리에게 존재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형벌을 내리심으로 죽음이 우리에게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누가 어떻게 옮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무덤에 찾아갔던 이 여인들은 해답을 얻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일찍이 예언한 대로 무덤에 누워 계신 것이 아니라 사흘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이 부활의 현장에서 들었던 첫 번째 말씀은 바로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즉,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서 죽음의 두려움이란 큰 돌을 없애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보장하셨다는 약속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둘째,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고 증거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들의 생각과 기대와 경험 안에 머무르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누가복음에는 “너희가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 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증거합니다.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불신앙과 좁은 생각과 경험으로 결코 제한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만큼 논란이 계속되는 성경의 증언도 많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이래로 도난설, 가사설, 오인설, 환상설을 비롯해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단지 제자들의 삶 속에서 믿음과 깨달음이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주장들은 가장 합리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는 것 같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기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게바와, 열두 제자와, 오백여 형제와, 야고보와 모든 사도들을 비롯해 사도 바울에 이르기까지 그 수가 참으로 많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 것이 합리적입니까? 믿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란 말입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역사적 사실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도 주님의 부활을 믿는 이들의 삶을 통하여 오늘 현재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일어나야할 사건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사셨으니 우리도 살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원래 “부활”(Resurrection)이란 ‘일어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무엇으로부터 일어나야 합니까? 잠에서, 질병에서, 죽음에서, 억압에서, 장애물과 사슬을 떨치고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예언자가 본 환상에서 “뼈는 마르고 희망은 사라져 끝장이 났다고 넋두리하던 것들”과 같은 우리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마른 뼈가 주님의 생기로 말미암아 군대가 되어 행진하듯 일으켜 세워주시길 원하십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어야겠습니다. 이 소망이 우리의 소망이어야겠습니다. 이와 같은 성령의 체험이 우리의 체험이며 간증이 되기를 빕니다.

  셋째, “갈릴리로 가시니라”라고 증거합니다.

  갈릴리!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사람을 사랑하시고, 치유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신 바로 그곳으로 돌아가서 다시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3년간 따라다녔던 배움이 헛됨이 아니었고, 꿈꾸었던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이 헛됨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다시금 새 믿음, 소망과 능력 가지고 돌아가자는 말씀인 것입니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달라졌고 그들의 변화로 인해 세상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사야에서는 이 소망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믿습니다. 이미 죽은 당신의 백성이 다시 살 것입니다. 그 시체들이 다시 일어나고 땅 속에 누워있는 자들이 깨어나 기뻐 뛸 것입니다. 땅은 반짝이는 이슬에 흠뻑 젖어 죽은 넋들을 다시 솟아나게 할 것입니다.”(사 26:19)

  오직 예수님을 따르려는 자들, 그동안 주님 따르다가 실패를 했어도 좋고, 겁이 나서 배신을 해도 좋고, 모른다고 부인했어도 좋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꼭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갈릴리에서 만나자!” 우리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믿음대로 살기에 두려워 맙시다. 우리 주님 약속 따라 살면서 의심하거나 두려워 맙시다. 우리 주님이 우리보다 앞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심을 믿으심으로 우리 삶의 터전이 되는 갈릴리로 가 부활의 증인이 되시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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