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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교회시리즈 (4) : 부활을 증거하는 교회 (요 2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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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곽주환 목사

이렇게 새롭게 세워진 성전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하심을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수고의 땀과 기도의 눈물을 아끼지 않은 모든 성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지난 5년간 우리 교회의 지나온 날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저렇게 인도하시고 챙겨 주심을 진심으로 고백한다. 교통이 불편하고, 진입하기 어려운 시장 한 가운데 폭 박혀있던 교회를 이렇게 교통이 좋고 주차하기 편리한 곳으로 옮기게 하셨다. 그것도 IMF의 위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다. 구성전 터전도 최상의 조건으로 매각하게 하시고, 시대에 맞게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하기 위해서 베다니교회라는 새로운 이름도 주시고, 교회와 가정에 베다니에서 생긴 일이 그대로 재현되기를 소원하며 기도하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가? 그리고 이렇게 좋은 성전도 잘 지어서 입당하게 하게 하셨는데 얼마나 감사한가!
이렇게 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렇게 축복해 주시고, 마음껏 주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시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이 땅에 부활을 증거하는 교회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인도하여 주심을 믿는다.

우리 교회가 새롭게 지은 성전에 입당하는 이날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부활절의 의미도 있지만, 지금부터 120년 전에 아펜셀러 선교사가 1885년 부활주일에 인천에 첫 발을 내딛고 한국 땅에서의 선교가 시작되었다. 지금부터 120년 전의 부활주일에 복음이 선포되었는데 이 뜻 깊은 부활주일에 이곳에서 입당감사예배를 드리니 얼마나 감사한가!
아펜셀러 선교사가 많은 날 중에 왜 부활주일 새벽에 한국 땅에 첫 발을 내딛었을까?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추석날 올 수도 있고, 구정에 올 수도 있을 텐데 부활주일 아침에 첫 발을 내딛은 이유는 바로 부활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우리 교회를 세우시고 이렇게 웅장한 성전을 세우신 이유도 부활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부활의 사건은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준다. 부활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지으시고 동산 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두셨다. 생명나무는 말 그대로 생명에 이르게 하지만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 최초 인간의 선택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우셨다.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사형틀이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마다 죽음을 연상하는 무서운 것이었다. 예수님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죽음의 십자가를 생명의 십자가로 바꾸어 놓으셨다. 아담과 하와가 선택한 죽음의 선악과를 생명나무의 선택으로 바꾸어 놓으셨다. 부활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지는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이같이 부활은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이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소식인가! 부활의 소식은 여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부활은 두려움에서 평안으로의 전환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제자들이 벌벌 떨고 있었다. 예수님처럼 고문을 당하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제자들에게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문을 꼭 걸어 잠그고 두려움 중에 있었다. 본문을 보라.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의 부활은 두려움에서 평안으로 변화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요즈음에 트랜드라는 말이 유행이다. 앞으로 어떻게 미래가 변화될 것인가? 아주 구체적으로 예측하는 말이다. 다양한 예측을 한다. 더 살기 좋은 미래를 예측한다. 그런데 이러한 예측이 많이 있지만 한 예측하지 못할 변수가 있다. 그것이 바로 북한이다. 북한은 완전히 도깨비 같아서 어디로 튈지 모른다. 우리에게 불안을 가져다 준다. 두려움을 가져다 준다.

두려움과 불안의 시대를 산다. 집에는 문을 꼭 걸어 둔다. 누가 왔을 때에는 작은 틈으로 바라본다. 이렇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이 찾아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분명히 말씀하신다. 얼마나 감사한가?
공산권이 무너지기 전에 공산권 선교에 주력했던 리차드 범블랜트라는 유명한 목사가 있었다. 그는 자주 감옥에 투옥되어 공산당원들에게 생명의 위협도 여러 차례 받았다. 투옥될 때마다 그는 품속에 간직한 작은 성경을 꺼내 그것을 밤낮으로 읽었다. 언제 어떻게 생명이 사라질지 모르는 그런 불안과 두려움의 한복판에서 그의 마음을 가장 강하게 사로잡았던 메시지는 바로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었다. 성경에서 이 단어가 나올 때마다 범블랜트 목사는 새로운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 밑에 일일이 줄을 친다. 성경을 다 읽고 난 후에는 과연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성경 전체에 몇 번이나 나오는지 궁금해 세어 보았는데 정확히 365번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는 범블랜트 목사는 갑자기 무릎을 치면서 감옥에서 이렇게 소리쳤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1년 365일 날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두려움에서 평안으로 옮겨 주시는 사건이었다.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예수님의 부활은 어두움에서 밝아옴으로 변화시켜 주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고 고통이 심해 숨을 거두실 때의 시간이 제육시부터 제구시까지이다. 낮 12시부터 오후 세시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복음서는 이렇게 기록한다.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낮 열두시면 태양의 빛이 가장 환할 때인데 어찌하여 열두시에 해가 빛을 잃었을까? 예수님의 죽음은 어두움을 가져다 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은 안식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동이 터오는 새 아침에 부활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새벽에 준비하였다. 새벽에 동이 터오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예수님의 부활은 어두움에서 밝은 빛으로 우리에게 부활하셨다. 어두움은 절망이지만 빛은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우리에게 살 길이 열린다.

공산주의 초기에 구 소련 치하의 어느 형무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곳에서는 죄수들을 일체의 빛이 차단된 감방에 집어넣고 외부인과의 접촉도 단절시켜 버렸다. 20일이 지나자 대부분의 죄수들이 미쳐 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매일 고문을 받으며 취조를 받던 죄수들은 오히려 멀쩡했다고 한다. 고통을 당했지만 이 사람은 매일같이 빛을 보았다. 빛을 보았기 때문에 고통 중에서도 견딜 수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삶의 현장에서 고통을 당할 수 있다. 고문을 받는 것 처럼 괴로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부활하신 빛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견딜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실 때에는 대낮 열두시에도 어두워졌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빛을 가져다 주었다. 내가 잘 되는 대낮과 같아도 예수님이 없으면 우리 인생은 어둡기 마련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어두움에서 새벽빛의 감격을 우리에게 주신다.

이같이 부활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두려움과 불안에서 평안으로, 어두움에서 생명의 빛으로 변화시켜 주신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예수님의 부활은 닫힌 것을 열게 하신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 돌무덤에 안장되었다. 큰 돌문으로 꽉 막아 놓았다. 그리고 인봉을 쳐서 틈이 없이 막아 놓았다. 밖에는 로마 병정들이 그 무덤을 지켰다. 이 무덤에 안식 후 첫날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예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돌무덤을 찾아갔다. 걱정을 하면서 갔다. 누가 돌무덤의 문을 열어 줄 수 있을까?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었다. 그 큰 돌이 굴려져 있었다.” 닫힌 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닫힌 문을 활짝 여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얼마나 감사한가?

부활절에 달걀을 함께 나눈다. 달걀에서 병아리가 깨어 나오는 상징으로 달걀을 함께 나눈다. 부활의 소식은 굳게 닫힌 문이 열리는 생명의 사건이다. 달걀의 껍데기가 벗겨지고 열리는 기쁜 사건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달걀이라도 유정난과 무정난이 있다. 유정난은 부화되어 병아리로 태어날 수 있는 알이지만, 무정난은 암탉이 아무리 품어도 병아리가 되어 나오지 못한다. 오히려 무정난은 그 안에서 썩어 버린다. 부활의 소식은 무정란이 아니다. 그 안에 생명의 씨앗이 있어서 껍데기가 벗어지고, 열려지고 새롭게 시작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부활은 닫힌 문이 열리는 축복의 사건이다. 왜 부활주일이 봄에 있을까? 여름이나 가을이나 겨울에 있지 않고 봄에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봄에 온 대지가 열리는 시기이다. 땅이 열리는 시기이다. 겨울 내내 닫혔던 이 땅이 봄이 되면 온 땅이 열린다. 땅이 열리고 그곳에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바로 이런 봄날에 예수께서 부활 하셨다. 얼마나 감사한가? 왜 예수를 믿으면 잘 되는가? 부활하신 주님께서 닫힌 문을 열어 주시기 때문이다. 얼마나 감사한가?
이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두려움과 불안에서 평안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닫힌 문에서 열린 문으로 변화시켜 주신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부활의 메시지이다.

교회는 어떤 곳인가? 부활을 증거하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우리가 전해야 할 메시지가 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 예배 하십시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두려움과 불안에서 마음에 평안으로 변화됩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겨집니다. 닫힌 문이 열리는 축복이 임합니다. 눈물을 씻어 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한가? 바로 이러한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명의 땅으로 이전케 하시고, 이곳에 아름다운 성전을 짓게 하시고 오늘 뜻 깊은 부활주일에 입당하게 하셨다.

교회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박물관 교회이다. 말 그대로 교회의 생명력을 잃고 지난날 교회의 전통을 자랑하는 박물관 교회이다. 두 번째는 현상유지적 교회이다. 현재의 교회를 있는 그대로 겨우 겨우 유지해 가는 교회이다. 세 번재는 목회적 교회이다. 현재 있는 교인을 돌보는데 머물러있는 교회이다. 네 번째는 선교적 교회이다. 새로운 신자들이 많아지고, 주변의 사람들을 전도하는 교회이다. 서구 교회는 이미 현상유지적 교회에서 박물관 교회로 옮겨가는 상황에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선교적 교회에서 목회적 교회로 옮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분석에 의하면 교회가 세상을 위하여 존재하다가, 자신을 돌보기 시작하면서 정체 현상을 일으킨다고 한다. 세상을 향하여 부활을 증거하는 선교하는 교회를 주님이 원하신다.

우리 교회는 박물관 교회가 되어서도 안되고, 현상 유지적 교회가 되어서도 안되고, 목회적 교회가 되어서도 안되고, 생명을 살리는 선교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 부활을 증거하는 교회가 될 때에 이러한 교회가 될 수 있다. 우리 교회는 부활을 증거하는 교회가 되어서 바로 이곳에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들이 재현되기를 바란다. 부활의 역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다. 부활의 역사는 눈물 아픔을 위로하여 주신다. 부활의 역사는 절망에서 소망을 주신다. 부활의 역사는 헌신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신다. 부활의 역사는 문이 열리게 하는 축복의 사건이다. 부활의 역사는 최후 승리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역사이다.
사랑하는 성도여! 부활을 증거하는 교회되어 베다니에서 생긴 일이 이 시대에도 계속되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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