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 21:15~17)

  • 잡초 잡초
  • 429
  • 0

첨부 1


- 설교 : 김광일 목사 (벧엘감리교회)

브로드웨이의 스타인 ‘매리 마틴’ 이 ‘남태평양’ 이란 뮤지컬을 공연하기 위해 무대에 오르려는 참에 편지가 그녀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것은 오스카 헤머스타인이란 노배우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편지를 불러주고 병상에서 숨이 넘어갔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매리, 종은 울리기까지 종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노래도 내가 부르지 않으면 노래가 아닙니다. 사랑은 마음에 품어 두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는 엄청난 사랑을 받은 재능의 사람, 그 사랑을 남에게 주기까지는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을 노래에 담아내기 바랍니다.” 그 날 밤 공연이 그치자 사람들은 모두 다 무대 뒤로 몰려갔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매리, 우린 그렇게 압도적이고 신들린 연기는 평생 처음입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해머스타인의 글을 읽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오늘밤 나는 사랑을 내주었을 뿐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 사랑보다 더 귀한 예수 사랑이 있습니다. 이제 그 사랑을 담아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생명을 얻게 만들고 주위의 모든 것들을 생기 있게 만드시기 바랍니다. 결국 예수 사랑이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복음성가를 같이 부릅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은 시몬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시몬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주님은 여인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여인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예수님 당신만을 사랑해요 주님만이 내 마음을 아십니다. 내 손잡아 주세요 내게 힘을 주세요 오 주님 당신만을 사랑해요.” 주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이 시몬에게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느냐? 네가 교리를 믿느냐? 네가 기도하느냐?” 라고 묻지 않고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랑이 신앙의 중심이요, 사랑이 말씀의 중심이요, 사랑이 사명의 중심이란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 위에 신앙이 세워져야하고 사랑 위에 말씀이 세워져야하고 사랑 위에 사명이 세워져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은 지금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영적 질문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이 질문을 통하여 우리에게서 확인하려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폴란드의 작은 마을 학교에 독일 군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유대인 학생들을 잡아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이들은 무서워 선생님에게 매달렸습니다. 야누스 코르자크 선생님은 유대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아이들의 손을 잡고 트럭에 같이 올랐습니다. 그 차가 어디로 간다는 것을 선생님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코르자크 선생님은 아이들을 끌어안고 “얘들아, 걱정하지 말아라. 더 좋은 세상에 가게 될 것이다. 더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라고 아이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코르자크 선생님은 트레블렌카 강제수용소 가스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희생되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야드 바셈(Yad Vashem)이란 학살 기념 박물관의 ‘야누스 코르자크정원’ 에 가면 겁에 질린 아이들을 팔로 감싸 끌어안고 있는 코르자크 선생님의 조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코르자크의 사랑이야말로 주님이 소유한 참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얼마만큼,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성도간에 서로 서로 사랑하십니까? 코르자크처럼 가스실에서 함께 죽어갈 만큼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삶의 현장에서 순간 순간 주님은 사랑의 내용을 물으십니다.

본문 15절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얼마만큼 사랑하느냐?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사랑의 분량과 크기에 따라서 사명도 봉사도 헌신도 다른 것입니다. 사명과 봉사도 큰 것이긴 하지만 신명기 6장 5절은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만큼 사랑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결국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였기에 믿음이 있던 베드로도, 적극적인 베드로도, 결단했던 베드로도 빗나가게 되었고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사랑이 충만할 때는 용기와 담력이 생기고, 세상의 부귀와 명예와 지위보다 예수를 더 사랑하는 열정이 생김으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희생을 확인하십니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시티 스터드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크리캣 선수이며 성적도 뛰어난 학생이였습니다. 그에게는 출세의 길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회에 참석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기로 결정합니다. 학교 당국자들은 이 학생이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교의 길에 나서는 학생에게 권면합니다. “여보게, 이것은 자네에게 지나친 희생이 아닌가? 다시 한번 재고해 보게”. 이때 시티 스터드는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랑이 사실이라면, 내가 그를 위해서 바치는 희생은 그 어떤 것도 지나친 희생일 수는 없습니다.” 희생은 말로 되지 않습니다. 계산해서 되지 않습니다. 나의 만족을 위한 것도 안 됩니다. 오직 주님이 기뻐하시는 희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희생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에게만이 가능합니다. 주님은 오늘 나에게도 네가 정말로 나를 위하여 희생하고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찰스 하워드 박사는 말하기를 “당신은 예수를 믿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구원받아서 천국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예수 믿는 사람처럼 살지 못했다면 당신은 그것 때문에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나 스데반과 같은 위대한 순교의 죽음을 죽을 수는 없더라도 우리는 매일 매일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께 희생을 아끼지 아니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은 예배당을 짓기 위해 자기의 눈도 자기의 심장도 떼 내어 팔려고 하였습니다. 몇 년 동안 모아도 모을 수 없는 귀한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보고 예수님은 기뻐하시며 축복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도 하나님이 깜짝 놀라리만큼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랑은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과는 내용이 다릅니다. 영적인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랑의 삶입니다.

부활한 주님을 만나기까지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희생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지 않았습니다. “내가 예수께 무엇을 얻을까? 받을까만 생각했지, 내가 예수를 위하여 무엇을 버릴까? 무엇을 바칠까?”의 희생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희생하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희생하며 사십니까? 눈물과 씨를 뿌리며 희생하는 곳에 반드시 단을 거두는 기쁨을 얻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사명을 확인하십니다

일제시대 때 평양 산정현 교회의 주일날 예배에 조만식 장로님이 독립운동가를 만나느라고 예배시간에 늦어 주기철 목사님이 설교하는 시간에 예배당에 들어왔습니다. 설교하던 주목사는 늦게 들어오는 조장로에게 “장로님, 오늘은 의자에 앉지 말고 서서 예배를 드리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연배도 조만식 장로가 훨씬 많았고 또 평양의 산정현 교회로 주기철 목사를 청빙한 인물도 조만식장로이었고 더욱이 조만식 장로는 오산학교 때 주기철 목사의 스승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장로는 주기철 목사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주기철 목사는 조장로에게 기도하라고 하자, 조장로는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애국운동한다고 사람을 만나다 하나님 만나는 예배시간에 늦었습니다. 목사님이 얼마나 마음 아프시면 설교하다 말고 이토록 책망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종을 마음 아프게 한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설교를 듣던 성도들의 은혜 받는 것을 방해한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다시는 주일에 아무리 중대한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사명 외에 다른 일은 결코 하지 않겠습니다.” 하며 기도하자 온 교우들이 함께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조만식 장로님이 사명을 회복하시며 눈물로 참회의 기도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충성심을 다른 제자들 보다 남다르게 표현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주님을 버린다 해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고 충성을 다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15절에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DO you love me, more than these?”라고 물으십니다. 여기의 “these” 란 말은 ‘Person’ 과 ‘Things’ 을 의미합니다. ‘Person’ 은 부모, 형제, 자매, 자녀, 친구를 말하며, ‘things’ 는 재물이나 권세 명예를 말합니다. 즉 이것들 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주님은 절대로 양을 맡기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 명예, 권세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명을 맡기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일 날 어느 교회에 여자 성도가 강아지를 안고 왔습니다. 그래서 안내위원들이 강아지를 안고 예배당에 들어갈 수 없으니 강아지를 맡기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녀는 강아지를 잘 돌봐 달라고 신신당부를 합니다. 그런데 잠시 후 다시 돌아왔습니다. 강아지 때문에 불안해서 도저히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키우는 강아지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였다’ 고 과거형으로 대답하지 않고 ‘내가 지금 주를 사랑하고 있다’ 고 현재형으로 대답하였습니다. 과거에는 주님을 부인하였으나 이제는 세상의 무엇보다 주님을 더 귀히 여기며 사랑한다는 고백입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많아도 모든 것이 다 용납될 수 있는 마스터키는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고 물으십니다.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섬길 수 있는지, 얼마나 희생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십니다. 그리고 사명을 맡길 만큼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며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십니다. 이 시간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물음 앞에 “주님, 제가 당신을 무엇보다도 더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을 드리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