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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간음과 순결 (마 5: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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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최동규 목사

지난주에는 생명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통해 배웠습니다. 이제는 그 생명이 생겨나는 과정에 있어서 순결해야 함을 ‘간음치 말라’는 계명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은 출애굽기 20:14절과 신명기 5:18절에서 인용되었습니다. 성경은 성적 욕망 자체를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식욕이나 수면욕처럼 성욕도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입니다. 식욕이나 수면욕이 전혀 없는 사람이 비정상인 것처럼, 성욕이 전혀 없는 사람도 정상이 아닙니다. 만약 인간에게 성욕이 없다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욕망이 적절하게 제어되지 않을 때 생깁니다. 식욕이 절제되지 않아 남의 밥까지 빼앗아 먹는다면 잘못입니다. 이처럼 간음은 정당한 혼인 관계 바깥까지 성적인 욕망이 표출되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율법을 간음 행위에 대한 금지 조항으로 배워왔습니다. 성적인 욕망이 외적인 행위로 부적절하게 드러날 때에만 정죄했습니다. 이 땅의 어느 법정에서도 ‘마음의 정욕’에 형벌을 부과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간음 행위의 원인이 되는 ‘마음의 정욕도 정죄하셨습니다. 28절이 문자적으로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는 뜻입니다. 표현 정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의미는 결국 같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기 시작하면, 음욕을 품은 채 다시 여자를 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문자적인 차이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마음의 음욕’까지 정죄하셨다는 것입니다.

음욕을 품은 것까지 정죄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과연 누가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래도 나는 간음죄는 짓지 않았어’라고 생각하는 남성이 있다면, ‘그래 남자들은 문제야, 어휴 늑대들’이라고 생각하는 여성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르침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정직하게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모든 사람은 ‘간음’이라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이 심각한 죄인임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입니다. 예수님에 의해 모든 사람은 간음자로 정죄됩니다. 행위로 표출된 사람뿐만 아니라 마음에 음욕을 품은 사람까지 모두 간음자라는 선고를 받습니다.

우리시대의 교육은 예수님의 계명보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 심리학적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어찌하든지 죄가 아니라고 변명하고 각색하고 미화합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 감정과 생각을 공유하고 있으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오히려 마음의 숨은 감정을 자유롭게 표출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마음의 음욕’을 정죄하셨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라,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왜곡된 비정상적인 감정입니다. 이 땅에서는 변명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결코 정죄와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죄입니다.

‘죄의 심각성’을 철저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의 확신에서 오는 감격과 감사도 모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정확히 잘 알지 못합니다. 그는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므로 참 된 복음 전도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죄의 심각성’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죄는 하나의 파괴적인 세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욕이라는 선물을 음욕으로 변질시킨 것도 죄입니다. 죄가 마음속에 자리 잡으면 우리는 죄책에 시달리게 되고 부패하고 오염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죄는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범죄 하게 만듭니다. 그러면서도 죄는 아주 교활하기 때문에 행위로만 나타나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고 변명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앞에서도 진실하게 회개하기보다 불편한 마음을 숨기고 자기를 감추게 만듭니다. 그래서 죄는 하나님으로 원수가 되게 합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할 뿐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도 파괴합니다. 죄는 우리의 삶에 고통과 죽음을 가져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과 죽음의 궁극적인 원인이 죄입니다. 결국 죄는 모든 것을 파멸시키며 궁극적으로 지옥의 고통과 형벌로 인도합니다.

이처럼 죄라는 것은 마음에 묻어두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의 동반자가 아니라 철저한 원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9-30절에서 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이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2세기에 살았던 유명한 사람 중에 오리겐이라는 사람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적용해서 스스로 거세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오른 눈을 빼고 오른손을 찍어낸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남아 있는 왼쪽 눈과 손으로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설령 그 모든 것을 잘라내어도 여전히 마음의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눈과 손 자체가 문제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눈과 손 자체는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며 의의 병기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죄인을 불구자를 만드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 자체로서는 아무리 귀하고 중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죄로 빠뜨리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면 그 원인을 제거하라는 의도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컴퓨터가 죄에 빠지게 하는 도구일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분에게는 즐겨보는 잡지가 세속적 욕망을 부추기게 합니다. 그것 자체로서는 유익을 줄지라도 계속 바르지 못한 욕망에 빠지게 만든다면 그것을 제거하는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안일하게 방치해서 계속 죄에 빠지도록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컴퓨터를 제거하고 잡지를 추방해도 죄가 소멸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는 다른 방편, 곧 컴퓨터와 잡지 대신에 TV나 신문을 통해서 그의 마음에 침투하려 할 것입니다. 또 가족 중 다른 사람에게는 컴퓨터나 TV가 욕망을 부추기는 도구가 아닐 수 있기 때문에 함부로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막다른 궁지에 몰렸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라는 심각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되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죄를 제거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잠깐 동안 죄악 된 환경을 피하는 정도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은 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피하였는가 싶으면 금방 죄에 사로잡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줄 구원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을 믿고 의뢰함으로서만 죄의 세력에서 자유하게 되며, 정죄의 두려움과 죄책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중세 인들은 죽음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깊은 두려움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페스트로 유럽 인구의 1/3이 죽고 계속되는 전염병과 전쟁으로 끊임없이 사람이 죽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죽음과 하나님의 심판을 늘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중세에 지어진 건물들의 벽화나 작품들마다 지옥에서 형벌 받는 비참한 사람들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죽음과 심판에 대한 심각한 불안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면죄부든 신비적 종교의식이든 일단 받아두고 보려는 태도를 형성했던 것입니다.

루터는 그러한 두려움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 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긴 후에 수도승이 되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마음속에 죄책감이 생길 때마다 부지런히 죄를 고백하고 자기 몸을 학대하며 금욕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죄를 고백하고 금욕적으로 살아도 죄책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죄가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고,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너무 두려웠습니다. 루터는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다가 나중에는 자기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죄 문제는 그에게 너무나 심각했기 때문에 마른 잎사귀의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도 온 우주가 무너져 내리는 것같이 여겨졌습니다. 루터는 그때의 심정을 “가장 심한 고통, 두려움, 공포, 비애로 채워지지 않은 구석이 없었으며, 이 모든 것들은 영원한 것 같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다가 성경을 연구하는 중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루터는 인간의 어떤 행위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여겨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요 복음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제서야 루터는 “내가 다시 태어났으며, 열린 문들을 통하여 낙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루터의 ‘이신칭의’ 사상은 이렇게 형성되었습니다. 단순히 ‘믿기만 하면 된데’하는 식의 값싼 깨달음이 아니었습니다.

루터는 먼저 죄의 심각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있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심각하게 의식했습니다. 자신의 어떤 노력으로서도 죄와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철저한 무능 속에서 절망했습니다. 그 후에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는’ 복음을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인가를 알았고, 그 깨달음이 종교개혁으로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은 인간이 스스로 죄를 제거할 것을 기대하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의 심각성과, 어떤 아픔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죄가 제거되어야 할 필요성을 충격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죄는 가만히 덮어두고 지낼 만한 어떤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은 직접적으로 그 말씀을 순종하려는 노력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마음의 보좌를 온전히 내어드리는 결과로서 실천되어지는 수동적이고 간접적인 성격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잘 받는 사람만이 그 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 문제를 처리하려 할 때는, 자기가 직접 죄를 제거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통치하시고 주장하셔서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의존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사는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영역에서 매순간 완전하게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죄를 회개하지만 또 다시 죄에 빠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사랑하고 그 분께 순종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은 죄를 적당하게 얼버무리고 숨겨버리지 않습니다. 어차피 죄 지을 수밖에 없다고 변명하며 죄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죄를 범할 때마다 심각하게 생각하고 죄에 항거하는 태도를 유지합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마음을 다스려 주시도록 더욱 그 분께 의존합니다. 은혜주시는 만큼 죄를 피합니다. 그리고 죄를 더 제거할 수 있도록 은혜를 구합니다. 그 결과 드러나는 행위에서도 적절하게 죄가 제거되고 점차 순결한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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