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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상수훈강해18> 두 가지 길 (마 7: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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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하준 목사

황금률

오늘 본문은 산상수훈 전체의 결론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산상수훈의 결론에 해당되는 부분은 마태복음 7장 12절부터 마지막절인 29절까지입니다. 이 결론부분을 오늘과 다음 주 두 주간에 걸쳐 나누려고 하는데 이 결론에 해당되는 첫 번째 절이 바로 12절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은 황금률(golden rule)이라고도 부르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아주 귀하고도 귀한 규율이라는 뜻으로 ‘황금률’이라고 부르는데 그 내용은 “남에게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가르침은 다른 종교에도 거의 다 있습니다. 이를테면 유대교에도 황금률이 있는데 랍비 힐렐(Hillel)은 율법 전체가 무엇을 가르치냐는 질문에 대해 “너 하기 싫은 것을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공자 역시 “한 마디 말로 종신토록 행할만한 것이 있습니까?”라는 자공의 질문에 대해 ‘이소불욕 물시어인’(已所不欲 勿施於人), 즉 ‘자기가 하고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외에도 거의 비슷한 가르침이 불교, 이슬람교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종교와 철학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차이라면 이 모든 가르침이 다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내용, 즉 ‘너 하기 싫은 것은 남한테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인데 비해 주님의 가르침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라는 점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우리들은 그 말씀을 따라 적극적인 자세로 남을 대접해야 합니다. “당신이 나에게 해주는 것 보고 나도 당신한테 그대로 해줄게, 당신이 잘 해주면 나도 잘 해주고, 당신이 못 해주면 나도 똑같이 못해주고.” 소극적인 자세입니다. 이 정도로는 천국백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이런 식은 어떻습니까? “남한테 잘해주지는 못할망정 나 하기 싫은 것은 남한테도 안 시켜야지.” 그런대로 괜찮아 보여도 이 정도로도 천국백성은 못 됩니다. 천국백성은 이런 소극적인 자세로 이웃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적극적인 태도로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 황금률을 주님이 여기서 언급하신 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까지 가르치신 마태복음 5, 6, 7장의 산상수훈을 마무리하면서 결론을 내리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랍비 힐렐이 모든 율법의 핵심이 황금률이라고 가르친 것처럼 주님은 지금까지 가르친 모든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종합할 때 그 결론이 황금률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황금률이 무엇입니까? “너 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고, 네가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남도 대접하라,” 즉 이웃을 사랑하고 존중해 주라는 뜻입니다. 마치 마태복음 22장 34절부터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물어보았을 때 예수님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사가 이렇게 물어본 것입니다. “율법조항 문서화 된 것만도 613개나 되고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율법조항이 있는데 이 조항을 다 종합하면 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주님이 너무도 정확하게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 수많은 율법조항은 딱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네 마음으로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이 가운에 두 번째에 해당되는 것이 바로 이웃 사랑, 즉 황금률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산상수훈 전체의 가르침을 이 황금률로 결론 맺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12절 뒷부분에 보면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조금 전 언급한 마태복음 22장 40절에 나온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말과도 일치하고, 또 산상수훈의 시작인 5장 17절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결국 주님은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의 가르침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가르친 것이 산상수훈인데 이제 그 결론부에 이르러서 또 한 번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하면서 결론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한 마디로 무엇이냐? 황금률에 나타난 것처럼 이웃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선택의 기준

이제 계속해서 주님은 산상수훈의 결론을 맺으면서 선택이라는 주제를 꺼내십니다.

요즈음 손님이 찾아오거나 가족끼리 외식을 할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뭘 먹을까, 어느 식당에 갈까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일단 이동으로 가곤 합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이동에 식당이 얼마나 많습니까? 수백 개의 식당에 메뉴도 가지가지입니다. 그러면 일단 이동으로 간 다음 어떤 식당을 찾습니까?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식당이 마주보고 있습니다. 두 집 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식당이라 음식이 어떤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 번 먹어보고 먹을지 안 먹을지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할 수 없습니다. 겉모습을 보고 갈 집을 결정하는 수밖에요. 우선 겉모습을 살펴봅시다. 길 건너편에 위치한 식당은 들어가는 문도 널찍하고 식당도 큼직한 데다 깨끗하고 종업원도 친절합니다. 결정적인 것은 손님들이 북적거리며 줄까지 서 있다는 점입니다. 길 이쪽 편에 위치한 집은 문도 좁고 식당도 좁은데다가 지저분하고 종업원도 그리 친절하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손님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파리만 날립니다. 이미 결론은 났습니다. 모든 사람이 길 건너편 집으로 갈 것입니다. 적어도 식당 찾는 방법은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맛있는 집을 찾을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러한 기준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선택의 기준, 식당이나 고를 때의 기준이지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그 기준이 절대적으로 다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13~14절을 함께 읽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주님은 두 개의 문과 두 개의 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바로 좁은 문과 넓은 문, 그리고 좁은 길과 넓은 길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 두 가지 비유는 같은 뜻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설명할 때 좁은 문과 좁은 길, 넓은 문과 넓은 문을 함께 놓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좁은 길로 가라! 물론 이 문은 좁고 이 길은 협착해서 들어가기 힘들기 때문에 찾는 이가 적다. 하지만 반드시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 이 좁은 길로 가야 하는 이유가 14절에 나옵니다. 왜냐 하면 이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며 이 좁은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넓은 문이나 넓은 길로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13절에 나옵니다. 이 문은 커서 이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고, 이 길은 넓어서 이 길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문제는 이 넓은 문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며, 이 넓은 길이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식당 고르는 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만 한 끼 먹을 식당을 고를 때는 문이 큰 집, 넓은 집, 사람들이 많이 가는 집을 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좌우할 선택은 절대 이런 기준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 넓은 곳을 골라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더 좁은 문, 더 좁은 길을 택해야 합니다. 또한 절대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을 골라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안 들어가는 문, 안 가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구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정말 어렵기 때문입니다. ‘좁다’는 말 자체가 어렵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4절에 ‘협착하다’는 낱말이 나오는데 헬라어 ‘들리보’는 본디 ‘누르다, 짓누르다, 짜내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좁다’는 의미도 되지만 나아가 ‘괴롭히다, 억압하다’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3장 21절이나 24장 9절에서는 ‘환난’이라고 번역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과 길은 그 자체가 좁고 그래서 매우 어렵습니다. 거칠고 힘듭니다. 때로는 환란도 있고 핍박도 받습니다. 그러니 자연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겠습니까? 그러므로 영적인 선택을 할 때는 다수결의 원칙이 통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원하고 다수의 사람들이 가는 길은 오히려 구원의 길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고로 진리의 길은 외로운 길이며 힘든 법입니다. 아합 왕 시대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 신 앞에 무릎 꿇을 때 바알에게 무릎 꿇거나 입 맞추지 않은 자가 겨우 칠천 명이었던 것처럼(왕상 19:18) 언제나 진리의 편에 서서 의로운 길로 가는 사람들은 소수였습니다. 그 길이 외로운 길이고 힘든 길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간다는 것은 그만큼 쉬운 길이고, 쉽다는 것은 세상적으로는 편하고 좋은 길인지 몰라도 구원으로 가는 길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선택의 기준입니다. 그만큼 구원 받기가 쉽지 않고 구원 받은 자가 걸어가야 할 길이 편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열매로 알리라

이제 15절부터 20절까지 주님은 거짓 선지자와 그 열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앞서 말씀하신 좁은 문과 좁은 길의 비유를 더 깊이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우선 15절을 읽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여기 나오는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되 앞에서 말한 대로 사람들을 좁은 길로 인도하지 않고 넓은 길로 꾀어 이끄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너무 어렵게 살지 마, 왜 일부러 힘들 길을 가냐? 좋은 게 좋은 거야, 쉽게 가자구.” 세상에서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군대 갈 때도 선배 중에 이런 가르침을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군대에서 절대 튀지 말아라, 편하게 군대 생활 하려면 남들 다 갈 때 나도 가고 남들 안 가면 나도 가지 말아야 한다. 군대에서 달리기 시키면 절대 맨 앞에서 들어오지 말고, 맨 뒤에 들어오지도 말고 딱 중간에 남들 많은 데 섞여서 들어와라. 늦게 들어오면 기합 받고 너무 먼저 들어오면 미움 받는다.” 그렇습니다. 군대뿐 아니라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원리가 이것 아닙니까? 넓은 문으로 들어가라, 넓은 길로 가라! 남들 다 가는 길로 가라! 하지만 주님은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바로 거짓 선지자라고 말씀하십니다. 15절에 보면 이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합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선한 척 하고 우리를 생각해주는 척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다 너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데 그렇게 너무 어렵게 살지 말란 말이야. 꼭 교회 다닌다고 그렇게 살라는 법이 있나? 믿는 것도 좋지만 대충 믿고 너무 심하게 믿지 마. 너무 힘들게 살지 말고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쉽게 살자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알고 보니 우리를 잡아먹는, 우리를 죽이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그럴듯한 말을 하는 자들의 실체를 들여다보니까 실은 양의 옷을 입은 이리더라는 것입니다. 나를 생각해주는 것 같고 나를 도와주는 척 하지만 실은 나를 파멸로 빠뜨리려는 이리의 모습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6절에 보세요.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라고 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이 겉보기에는 그럴듯하고 말도 그럴싸하게 하지만 결국 그 열매를 보면 거짓 선지자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씨만 봐서는 어떤 나무인지 모르지만 열매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좋은 나무라야 좋은 열매를 낼 수 있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낼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는 것처럼 그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열매란 것은 그의 행위를 뜻합니다. 아무리 멋지고 그럴듯한 말로 우리를 꾀일 지라도 그 행위의 열매를 보면 그가 진정 하나님의 선지자인지 거짓 선지자인지 구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19절에 나온 대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 즉 이런 거짓된 사상을 전파하는 자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즉 하나님께서 이런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무리를 반드시 벌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 생각해 봅시다. 결국 주님은 이 거짓 선지자와 그 열매에 대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싶은 것일까요? 우리가 조심할 사람들은 불신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 하고 겉으로는 순한 양처럼 꾸미고 살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해주고 믿음도 좋다고 칭찬하지만 결국 그 삶의 방향은 결코 좁은 문이나 좁은 길을 지향하지 않는 사람들, 교회는 다니지만 언제나 넓은 길, 편한 길을 따라가고 절대 믿는다는 이유로 손해 안 보려고 하고, 심지어 분명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방법이 아니고 잘못된 길인데도 세상사람 다 간다고 나도 따라가는 그런 사람들, 나아가 그런 생각과 사상을 다른 사람에게도 가르치려고 드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더 조심하고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제일 먼저 들어야 할 사람들은 바로 저 같은 목회자들,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설교를 하면서 사람들 듣기 좋으라고 복음을 바꾸어 전하는 자들입니다. 심기 불편한 이야기, 부담되는 내용은 쏙 빼고 전합니다. 이들의 설교나 가르침을 들어보면 설교는 설교인데 십자가가 빠져 있습니다. 지난주가 부활주일이었는데 부활절이 있으려면 사순절과 고난주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와 고난은 쏙 빼고 부활과 영광만 가르칩니다. 은혜는 가르치는데 죄는 말하지 않습니다. 복과 사랑은 가르치는데 불순종할 때 주어지는 저주나 심판은 절대 말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가르치지만 지옥은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기가 힘들고 성경대로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하지 않습니다. 구원이 어렵다는 것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를 쉽게 믿고 편하게 신앙생활 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가르치면 성도들이 좋아하지요. 심기가 불편해지는 일도 없지요. 하지만 결국 그들의 영혼은 죽고 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다같이 시편 1편 1절을 봅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이 진정한 성도이며 복 있는 사람이냐는 말입니다. 바로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가 무엇일까요? 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꾀를 써서, 잔머리를 굴려서 이익 보고 성공하려는 사람들, 이 길로 가면 반드시 출세한다, 반드시 돈 번다 하면서 우르르 몰려가는 그런 길,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올라가려고 애쓰는 그 자리, 저마다 차지하려고 다투는 그 자리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방법이 아무리 좋아보여도, 그 길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그 자리가 아무리 탐이 나도, 그래서 우르르 몰려가는 그 사람들과 함께 휩쓸려가고 싶어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천국백성입니다. 아무리 그 방법이 좋아보여도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방법이라면 써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가고 싶어도 그 길이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길이라면 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그 자리가 탐이 나도 그것이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가 아니라면 앉아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런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잘 믿는 척 하면서, 선한 양의 탈을 쓰고 모범적인 기독교인 행세를 하면서 가만히 보면 그 행동은 전혀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하는 짓을 보면 안 믿는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악인이나 죄인이나 오만한 자와 함께 하며 거리낌 없이 그들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손해 안 보겠다고, 나도 한번 잘 살아보겠다고, 나도 한 번 출세해 보겠다며 넓은 길로, 넓은 문으로 거침없이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의 방법이 옳은 것인 양 거리낌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삶의 방식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거짓 선지자라고 부르며 이런 자들은 찍혀 심판의 불에 던지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선택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의 기준은 무엇이며 삶의 방식은 어떠합니까? 과연 세상 사람들과는 구분되는 길입니까? 주님이 우리의 열매를 보고 과연 천국백성답다고 말씀하실만한 삶입니까? 오늘 우리는 내 앞에 두 개의 길을 두고 이 문제를 고민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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