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요단을 건너가라! (수 3:1-10)

  • 잡초 잡초
  • 274
  • 0

첨부 1


- 설교 : 김이봉 목사

..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또 말하되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가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쫒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 (여호수아 3:1-10)

시대를 볼 줄 아는 안목을 키우려면 역사를 알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역사라고 할 때 단순한 사건 위주의 년대나 인물이나 그런 것을 외우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의 역사란 단어처럼 History, 즉 His(그 분의) Story(이야기)를 듣고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시대 시대마다 그 분의 뜻이 무엇이었던가를 잘 살펴서 그 분의 뜻을 바로 실천해 나가는 것이 우리 믿는 크리스천들의 본분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통하여 오늘 우리의 모습을 재조명해 보면서, 그 역사적 교훈을 바로 삼아갈 때, 우리에게는 번영과 행복이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 조상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큰 약속을 했습니다.
너의 후손이 번창하여 바다의 모래알처럼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약속의 말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번창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때 이스라엘 민족은 애급에게 주권을 뺏기고 노예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마치 과거 우리 민족이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긴 채 36년간 노예생활을 했던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430년 동안 애굽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바로 제 18왕조 때에 와서는 민족말살 정책을 썼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은 모세를 택하여 출애굽의 일대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Exodus)의 역사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행렬 속에 순간순간 기적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홍해바다를 육지처럼 건너가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인간이 경험하지 못한 큰 사건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습니까?
이 사건을 접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우리가 8.15의 해방의 날을 맞이했던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태극기 물결로 방방곡곡이 휘날렸던 8.15 해방의 날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쁨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현실적인 문제들이 저들에게 닥치기 시작했습니다.
남자 장정들만 60만이라고 했으니,
그에 속한 가족들을 다 합치면 수백만 명이 될 것이었습니다.
이런 집단의 대 이동에서 왜 문제가 없었겠습니까?
우선에 물이 없어 문제이었습니다.
그리고 먹을 것이 문제이었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대두되면서 저들은 불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면서 심지어 모세를 돌로 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차라리 이럴 바에는 애굽에서 배불리 먹다 죽는 것이 나을 뻔 했다고, 우리의 매장지가 없어 이 광야에 다 죽게 만드느냐?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요단 동편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저들은 하나님이 약속한 땅을 바라보면서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머물게 되었습니다. 강만 건너가면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를 눈앞에 두었습니다. 그런 생활이 어느덧 40년간이나 했습니다.
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갔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은퇴 시키었습니다.
아직도 건강한 모세이었습니다.
신명기 34:7절에 보면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은퇴시키고, 젊은 여호수아를 대신 세웠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젊은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너는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애굽에서부터 가지고 나온 언약궤를 메고 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언제인가 하면 장마 때이었습니다.
강물이 언덕까지 넘쳐흐르던 때입니다.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넘실거리는 강으로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에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도 모세가 그렇게 하면 모를까, 모세의 후계자인 젊은 여호수아가 아무리 하나님의 종이라 해도 나이 많은 제사장들이 인간적으로 생각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렇게 했으면 아마 영원히 못들어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들은 순종했습니다.
그들이 강을 밟는 순간 강은 갈라졌습니다.
마치 40년 전에 홍해가 갈라졌던 것처럼 그렇게 말입니다.
그리하여 요단 동편 광야에서 머물렀던 저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의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1. 광야생활은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의 현실의 삶입니다.
광야는 우리의 삶의 현장입니다.
우리는 이제 죄의 노예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들이 광야 길에서 불평하기 시작한 것처럼, 예수 믿고 구원받았지만, 생활문제들로 불평하면서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 고기가 먹고 싶다 등등...
오늘 우리들도 이 세상이라는 광야 길에서 늘 불평스러운 것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들이 불평을 토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였듯이 우리도 교회를 원망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종들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간 것을 세례 받은 행위에 비유하기도 합니다.(고전10:1-2) 저들이 다 물 가운데로 지나간 것처럼, 우리가 물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죄의 멍에에서 해방을 받은 구원받은 성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홍해를 건넜을 때 모두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처럼, 누구나 처음 이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지만, 차차 세상 삶에 부딪치면서  원망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도 불평하는 크리스천들을 보면 모두 생활 때문입니다.
삶에 지쳐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선 물이 없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물이 있으나 써서 못 마시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물을 달게 하여 마시게 하였습니다. 매일 매일 나가서 이슬처럼 내리는 가루를 거두어야 먹고 살게 하였습니다. 많이 거두어도 썩어 버렸고, 그날 그날 먹을 것만 주었습니다. 매일 한 가지 음식만 먹었더니 고기 생각이 납니다.
채소도 생각이 납니다. 부추 생각도 납니다.
고기도 먹이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매일 매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출근하여야 합니다. 그래도 벌어지지 않고 그날 그날 쓰기 바쁩니다.
때로는 더 좋은 음식도 먹고 싶습니다.
외식도 해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이 생깁니다.
주의 종들에 대하여 원망도 생깁니다.
요즘 시험에 든 교회의 현상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깊이 생각해야할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에 ‘너희는 요단을 건너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우리에게서 오늘의 요단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2. 하나님은 내게 요단을 건너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요단은 광야와 약속의 땅 사이를 구분하는 경계입니다.
약속의 땅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죄의 용서를 받고 구원받은 성도들이라면,
이제 광야생활의 불평을 뛰어 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현실의 요단을 건너가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요단의 동쪽에서 안주해 있는 존재들인지도 모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현실과 타협하면서 약속의 말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존재들인지도 모릅니다.
현실의 직장 생활에서 머뭇거리면서 말씀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있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현실의 직장 생활에서 말씀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놀라운 약속이 보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단을 건너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단 강물이 제일 많은 장마시즌에 건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물이 언덕까지 넘쳤다고 하였습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이 이렇게 하였겠습니까?
하나님 당신의 명령대로 순종하는가를 보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예전의 홍해처럼 먼저 물이 갈라지게 해 놓은 후 건너가라고 하였으면 다 건널 수 있었을 터인데 왜 넘실거리는 물로 들어서라고 하였습니까? 얼마나 말씀의 명령을 좇아 결단하느냐를 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3. 그러면 요단을 건너가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앞장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누구를 의미 하겠습니까?
주의 종들입니다.
교회의 직분 맡은 사람들입니다.
교회 제직들이 앞장 서야 합니다.
십일조의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 제직들이 있습니다.
주일 성수의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 제직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전도의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 제직들이 많습니다.
모두 요단의 동쪽에서 머뭇거리는 상태입니다.

성경에 보면 구원받은 성도들은 모두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는 제사장들과 일반 백성들이 구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성전의 휘장이 찢어져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제는 만인이 제사장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약궤를 메고 강으로 들어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즉 말씀의 언약궤를 메고 현실의 요단을 건너가야 합니다.

신앙의 행위는 결단입니다. 
말씀을 어깨에 메고 현실의 넘실거리는 요단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에 기적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우리 모두 부활의 능력을 의지하고 <말씀>과 <세속>의 경계에서 말씀으로 들어서는 결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