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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인의 인격 (계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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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동호 목사

요즘 우리 사회에 거세게 불고 있는 바람 중에 하나는 정직과 투명의 바람인 것 같습니다. 정부의 고위 관리 4명이 부동산투기와 같은 비리로 인해 도중하차하는 사건이 그 증거입니다.

며칠 전 텔레비전을 보니 그와 같은 비리로 인해 저들을 도중하차하게 한 것이 잘 한 일이냐 지나친 일이냐를 놓고 토론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아직도 결론을 잘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혹 좀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면이 있어도, 이와 같은 일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부동산 투기 같은 것 함부로 잘못하다가는 망신하겠구나 하는 경종을 울린다는 점에서의 큰 사회적인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일을 통하여 우리 사회가 발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화 운동을 하면서도 그것이 지나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지나치는 것은 모자라는 것만 못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정화 운동에 대한 하나님의 식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화 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하나님의 식은 심판을 최대한 미루면서 어떻게 하던지 사람을 살리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잘못되었으니까 자르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여 고쳐서 쓰시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즘 많은 장관과 같은 고위직들이 그와 같은 문제들로 도중하차를 하게 되자 장관을 다 목사로 하자는 농담들이 오고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직도 사람들이 목사를 장관보다는 도덕적으로 좀 나은 사람으로 여긴다는 뜻인가 싶어 좀 의아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가 장관이 된다고 나을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스스로 해 보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장관이 되었었다면 저는 지금 쯤 큰 망신을 당하고 결국 도중하차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너는 자격이 없는 놈이니 장관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사회적인 심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밥이나 먹고 사는 것은 용납할 수 있어도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그리고 중요한 영향력을 끼치는 그와 같은 자리에는 있을 수 없다고 버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수행하고 있는 목사직이 장관 못지않게 크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식대로라면 저도 높은 뜻 숭의교회 목사직을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초야에 묻혀 밥이나 먹다가 죽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고 마땅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제가 죄인이라고 쉽게 포기하지 않으시고, 죄에 대해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주시어 채찍질 하신 후 가르치시고 고치셔서 할 수 있는 대로 계속 당신의 일군으로, 당신의 종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와 하나님의 다른 점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크게 귀하게 정말 장관처럼 쓰셨던 사람들을 보면 다 나름대로 큰 허물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극찬을 하셨던 다윗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간음을 했던 자이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하여 정부의 남편을 살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그의 과오를 생각하면 그는 절대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없는 사람이며, 절대로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도 다윗의 죄를 경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그와 같은 죄에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벌을 주셨습니다. 너는 은밀한 중에 이 일을 행하였으나 너는 백주에 이와 같은 수치를 당케 되리라 하시더니 정말 그 말씀대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선지자 나단의 책망과 내리시는 하나님의 벌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한 다윗을 하나님은 정말 흰 눈 같이 깨끗하게 용서해 주셨고, 그의 허물과 죄는 기억도 못하시고 그를 자신의 마음에 꼭 합한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정말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사용해 주셨습니다.

다윗에게는 언제나 자신의 죄를 사해 주시고 자신을 당신의 자녀로 그리고 당신의 귀한 일군으로 사용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시편 32편 1절과 2절의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 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다윗의 그와 같은 진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다윗과 같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 우는 아브라함도 생각해 보면 비겁하고 수치스러운 사람입니다. 자기 생명을 보존하겠다고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 아내를 주는 대가로 양과 소를 받았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였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는 자의 두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이 나오는 여자들 다말과 라합과 룻 그리고 밧세바는 다 문제가 많은 여자들이었습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관계를 하여 자식을 낳은 여자였습니다. 라합은 기생이었습니다.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그는 창녀였습니다. 룻은 창녀보다 당시 더 수치스러웠던 이방여자였습니다. 그리고 밧세바는 사실 이름도 없습니다. 그는 ‘우리아의 아내’로 마태복음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저들의 이름은 수치스러운 이름들 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저들의 이름이 영적으로 볼 때 정말 명예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조상으로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 2장 20절 이하에 보면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그릇도 있고 천히 쓰는 그릇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비워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귀한 그릇은 금과 은 같은 그릇이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인데 하나님은 금과 은 혹 나무와 질그릇을 상관하지 않으시고 깨끗한 그릇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그릇이 귀한 그릇이라는 말씀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아무리 금과 은같이 귀하고 유능한 사람이라고 하여도 깨끗하지 않으면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도중하차한 장관들이 아무리 유능한 인재들이라고 하여도 그 그릇이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에 쓸 수 없다고 사회가 판정을 내린 것을 옳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저들이 깨끗지 못하여 쓰지 못한다고 버린 후에 깨끗한 다른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어떤 대가를 치루든지 간에 그를 깨끗케 하여 그를 쓰시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깨끗한 그릇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그릇들은 있습니다. 저들은 본시 깨끗한 그릇이 아닙니다. 저들은 깨끗한 그릇이 아니라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그릇들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깨끗케 하심에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등태산이 소천하 (登泰山而 小天下)라는 맹자의 말이 있습니다. 요즘 저희 큰 아이가 이 말에 푹 빠져 있는 듯 싶습니다. 제가 제 아이 나이 때 푹 빠져 있던 말과 사상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청년 때 노자를 좋아하였습니다. 노자의 글을 읽으면, 그의 사상과 삶이 정말 높은 산과 같아 보였습니다. 그 산에서 보면 정말 천하가 작아 보였습니다. 그 맛에 심취하여 노자와 공자와 맹자를 읽었었습니다.

그 정도가 심하여 스스로 염려가 되었습니다. ‘이러다가 내가 논어와 맹자와 노자의 도덕경을 성경보다 더 좋아하고 예수님보다 더 좋아하면 어떻게 하나?’를 정말 심각하게 걱정한 적이 있었습니다. 특히 도덕경이 좋았습니다. 도덕경은 정말 높은 태산 같았습니다. 노자와 도덕경이 태산이라면 도대체 우리 예수님과 성경의 높이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태산에 없으셨습니다. 성경은 태산에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산에 계시지 않으시고 태산 아래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본시 태산 보다 더 높으신 하늘에 계시는 분이신데 예수님은 태산에도 계시지 않으시고, 하늘에도 계시지 않으시고, 거기서 세상을 보시지 않으시고 세상에 내려오셔서 세상을 보시고 계셨습니다. 사랑으로. 사랑으로 세상을 보심으로 작은 세상을 작게 보지 않으시고 크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귀히 보셨습니다. 그 생각을 하며 비로소 노자와 맹자와 공자를 넘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노자와 맹자와 공자는 태산에 있었는데 우리 예수님은 태산 아래 계셨습니다. 세상을 내려다보지 않으시고 세상으로 내려오시고, 세상에서도 오히려 낮아지셔서 우리를 높이 올려 보고 계셨습니다.

의(義)의 산이 높으면 죄의 골이 더 깊어 보이는 법입니다. 죄의 골이 깊어 보이면 모든 사람이 다 그 골에 묻히게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요구하고 있는 도덕적 기준은 갑자가 높아진 기준입니다. 우리 사회의 도덕적 기준은 전에 그렇게 높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선진사회가 되면서부터 그와 같은 도덕적 기준으로는 도저히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득이 갑자기 높아졌듯이 우리의 도덕적 수준도 갑자가 높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갑자가 높아진 기준으로 사람을 보니 쓸 사람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의의 산이 높아짐으로 죄의 골이 더 깊어 진 것입니다.

높아 진 의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하여, 사람을 다 죄인으로 깊어 진 죄의 골에 묻으려하고 있습니다. 정죄하고 심판한 후에 말입니다.

절대 의이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우리 인간들은 감히 설 데가 없습니다. 小天下가 아니라 惡天下입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의인은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하나님은 죄만 미워하시고 죄인은 사랑하십니다. 귀히 여기십니다.

죄와 악의 값은 치르게 하십니다. 우리의 힘으로 치르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이 대신 갚아 주십니다. 행위로, 율법으로 온전해지지 못하는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게 하신 후 쓰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참 귀히 보십니다. 크게 보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데 천하를 작게 보지 않으십니다. 천하가 작지 않음으로 하나님은 땅에도 계십니다.

제 며느리가 아기를 임신하였습니다. 병원에서 찍은 초음파 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에 제 아이가 있었습니다. 제 손주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신비스러운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초음파 사진에 제 손주의 키가 적혀져 있었습니다. 2.3cm 였습니다. 그 2.3cm가 얼마나 커 보이던지 제게는 우주보다 더 커 보였습니다.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 초음파 사진을 본 후 아직 태중에 있는 제 손주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손주에게 쓴 첫 편지를 통해 아이에게 꼭 일어 주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네가 귀한 존재’라는 것이었습니다. 2.3cm를 우주보다 크게 보는 것은 할아버지 뿐만 아니라 엄마와 아빠 그리고 할머니만 아니라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도 그러하시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그렇게 귀한 존재이니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이에게 꼭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는 귀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때 높은 자존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높은 자존감은 성공적인 그리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가장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높은 자존감은 교만과 다른 것입니다. 교만은 높은 자존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존감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과 높은 자존감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저는 제 손주가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제 막내가 수능 점수를 좀 낮게 받고서는 제게 메일을 보냈었습니다. ‘아빠. 제가 부끄러우시지요?’ 그 메일을 받고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즉시 답을 보냈습니다. ‘자식을 부끄러워 하는 애비가 어디 있냐? 공부를 좀 잘 하면 좋겠다는 것이지, 공부를 잘 하면 내 새끼고 공부를 좀 잘 못하면 남의 새끼냐? 아버진 너 하나도 안 부끄러워’

자존감은 높은 수능 점수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자존감은 사랑으로 얻는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식들이 혹시 수능 점수는 좀 낮을지라도 저의 높은 사랑 때문에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건강하게 사는 자식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태중의 손주에게 ‘너는 귀한 존재’라는 것을 일러 주면서 한 가지 더 이야기 해 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 아닌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귀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 손주가 사람을 귀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지 아니하고 예수님처럼 낮은 곳으로 자세를 낮추어 사람을 귀히 보고 크게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수치를 당하고 영원히 매장 되어도 아무 말 할 수 없었던 다윗을 하나님이 깨끗케 하시고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자 다윗의 충성은 범죄 전과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찬송 중에 하나는 4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 지 난 알 수 없도다’라는 가사 저는 너무나 좋습니다. 저의 간증이고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독일 코스타를 갔을 때 코스타를 시작하는 첫날이 제 생일이었습니다. 코스타 총무가 제 생일을 기억하고 많은 학생들 앞에서 축하해 주었습니다. 찬양을 인도하던 형제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선창하라고 하였더니 이 친구가 짓궂게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들 웃었는지 모릅니다. 친구들끼리 모여 생일 축하를 할 때 실제로 그 찬송을 부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장난으로 그러는 것이었지만 저는 심각하게 생일축하 노래로 최고로 잘 맞는 찬송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는 죄인인 저를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시고 깨끗케 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귀한 그릇으로 사용해 주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사람은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반듯한 사람은 귀히 여기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천히 여깁니다. 훌륭한 사람은 인격적으로 대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비인격적으로 대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이 참 좋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함부로 문을 열고 들어오시지 않으십니다. 그냥 ‘나다’하시고 들어오셔도 되시련만,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인격을 존중하여 우리의 결정을 기다려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문을 열면 그 때 들어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죄가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격적으로 대해 주시고 어떻게 하시든지 고쳐서 쓰시려고 하시는데, 그것도 크게, 그리고 귀하게 쓰시려고 하는데, 죄인인 우리들은 다른 사람의 죄가 드러나면 쉽게 흥분하고 절망하고 심판하고 정죄하여 용도 폐기를 시키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드러난 죄를 더 열열이 비판함으로 자신의 허물을 은폐하려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시고 변화산으로 오르셨습니다. 登泰山하신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제자들은 小天下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세상에서 궁전을 짓고 사는 것보다 그곳에서 초막을 짓고 사는 것이 더 좋겠다고 한 것이 바로 그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같은 제자를 데리시고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귀신들려 사람 구실 못하는 아이를 고쳐주셨습니다. 귀신 들린 아이를 귀히 여기시고 섬겨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를 닮아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람을 귀히 여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귀한 사람만 귀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까지도 귀히 여길 줄 아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사는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이 저는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죄인인 우리의 인격까지 존중하시어 문을 두드리시는, 그리고 들어오셔서 죄인인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려 하시는 예수님을 본받아 밝지 못한 세상도 사랑하고, 훌륭하지 못한 사람들도 귀히 여길 줄 알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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