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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찾아오시는 부활의 주님 (요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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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박봉수 목사

  우리는 본문을 읽으며 한 가지 의구심을 가지게 됩니다. “제자들이 왜 갈릴리로 돌아와서 지금 고기를 잡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이미 부활하신 주님을 두 번씩이나 만난 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부활하신 당일 저녁에 제자들이 예루살렘 아마도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만났습니다.(요 20:19 이하) 두 번째는 8일째 되는 다음 주일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이 아마도 같은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모여 있을 때 찾아오셔서 만났습니다.(요 20:26 이하) 이 때 많은 말씀을 들었고, 부활신앙은 굳건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이 복음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내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선교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알렉산드리아나 안디옥이나 저 로마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저들이 왜 한적한 갈릴리로 돌아왔고 한가하게 고기잡이로 돌아갔을까요? 두려워 주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고 갈릴리로 돌아 온 것일까요?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포기하고 고기 잡던 일상으로 도망쳐 온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갈릴리로 가라 명하셨다는 것입니다. 마 26:32을 보면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 28: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천사가 여인들에게 주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갈릴리로 온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왜 갈릴리로 가라고 하셨을까요? 제자들이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곳이 갈릴리였고, 저들이 주님께 가르침을 받았던 곳도 갈릴리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갈릴리에서 다시 사명을 확인시켜주시고, 또 그 동안 가르쳐주셨던 것 다시 깨우쳐주시기 위해 갈릴리로 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왜 고기를 잡았고 주님은 그것을 존중해 주셨을까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저들이 본격적으로 직업으로 고기잡이를 다시 시작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고기잡이에 나선 제자들이 7명인데 그중에 원래 직업이 고기잡이가 아닌 사람이 여럿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던 중에 경비를 마련하려고 고기잡이를 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저들을 돕는 손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지역은 가난할 뿐 아니라 저들을 돕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 앞으로 복음 전파를 위해서 필요한 훈련이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전적으로 주님 뒤를 따르며 훈련만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생활을 책임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복음 사역을 감당하려면 저들이 이 문제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저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에도 잠시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주님께서 존중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고기 잡는 일상 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소중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일상을 지속해 가야 하는 우리에게 너무도 소중한 교훈을 줍니다.

1.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일상을 찾아오십니다.

  본문 4-5를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 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이 고기잡고 있는 그 현장을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기를 얼마나 잡았느냐고 관심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전도하는 현장, 예배드리는 현장, 기도하는 현장에만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땀 흘려 일하는 일터, 가족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는 그 자리, 여가를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 자리에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지나가던 길에 갑자기 교인 집에 들렀습니다. 안에서 기다리라고만 하고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한 동안 시간이 흐른 뒤에 문을 열고는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감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제가 봐서는 안 될 것들이 집안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언제 찾아오시더라도 맞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기다리시라고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둘째,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고기를 얼마나 잡았느냐?” 물으셨습니다. 만일 도둑질을 하고 있었다면 주님이 뭐라 물으셨겠습니까? “그래 뭐 좀 훔쳤느냐” 물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 직업에 귀천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회사 사장이냐 경비원이냐로 차별하시거나 가치를 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 직업의 선악은 따지십니다. 우리가 주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선한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셋째, 주님께서 칭찬하실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제자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습니다.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고기를 잡았습니다. 땀 흘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모습으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전쟁에 진 병사는 용서해도 경계에 실패한 병사는 용서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열심히 싸우다가 져서 아군에게 큰 피해가 생겼어도 최선을 다하다 그리 됐으니 용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초병이 경계를 잘못해서 주둔하고 있던 아군에게 큰 피해가 왔다면 그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모습으로 땀을 흘리는 가운데 주님을 맞아야 하겠습니다.

2.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일상을 도와주십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제자들이 밤새 애를 썼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실패를 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에는 실패로 가득합니다. IMF이후 한 동안 창업 열풍이 불었습니다. 한 매스컴 보도에 의하면 5년이 지난 뒤에 결과를 보니까 100명이 창업을 하면 90명은 실패를 하고, 7-8명은 현상유지를 하고, 고작 2-3명만이 성공을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실상 속에 이 크고 작은 실패가 가득합니다.

  중요한 것은 실패는 실패를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실패를 틈타서 우리에게 저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바로 자포자기하는 마음, 우울증, 그리고 절망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들이 우리를 일상 한 가운데서 미리 죽음의 고통을 맛보게 하고 있습니다.

  매스컴 보도에 의하면 영화배우 이은주 씨의 자살 이후 자살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울지검의 조사 결과를 보면 이은주씨가 자살한 후 자살자가 무려 2.5배가 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자살 방법도 이은주씨의 자살방법을 따르는 사람이 자살자의 무려 80%나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자살자의 20.30대 점유율이 무려 자살자의 50%정도로 급증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우리의 일상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혼자 꾸려가는 우리의 일상 속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있습니다. 이것을 벗어던지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되고, 나아가 이 그림자에 사로잡히면 실제로 죽음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일상에 찾아오셔서 부활의 능력으로 이 죽음의 그림자들을 걷어버릴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주님께서 제자들의 실패의 현장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볼펜의 대명사처럼 전국민에게 사랑을 받는 볼펜이 있습니다. 바로 MonAmi 153 입니다. 이 볼펜이 처음 나온 것이 1963년입니다. 당시 볼펜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도 공장도 없던 상황 가운데서 처음 볼펜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처음 이 볼펜을 개발한 송삼석 회장이 직접 이 볼펜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MonAmi는 불어로 “좋은 친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153 이 중요합니다. 이 분은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오늘 우리 본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이 숫자를 제목에 붙이게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힌 이 사건 안에 담긴 축복이 임하기를 소망하며 이름을 이렇게 붙인 것입니다.

  이름 그대로 이 볼펜은 대 히트를 쳤습니다. 이 볼펜을 안 써본 국민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일상 깊은 곳에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이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공도 하고 우리 일상 속에 드리워있는 저 죽음의 그림자를 다 털어버려야 하겠습니다.

3.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격려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2-3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밤새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던 제자들 그들에게 배 우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셔서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신 뒤 이제 그들을 해변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아침을 준비해서 저들을 먹이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몇 가지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첫째,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밤새 고기 잡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게다가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해서 그 피곤은 고기를 많은 잡았을 때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시장했겠습니까? 그래서 저들이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태였습니다. 주님께서 저들을 위해 정성스레 조반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저들을 먹이셨습니다. 저들이 새 힘을 얻게 됐을 것입니다.

  왕상 19장을 보면 선지자 엘리야가 주님의 큰 격려를 받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엘리야가 저 갈멜산 영적 전투에서 대승했으나 이세벨이 죽으려고 덤벼들자 겁을 먹고 저 남쪽 브엘세바 쪽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사환을 거기 두고 자기 혼자 또 하룻길을 광야를 향해 도망쳤습니다. 이제 지쳐서 로뎀나무 아래 누워 하나님께 죽기를 청했습니다. 그러니까 죽고 싶을 정도로 지치고 곤고한 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자고 있는 엘리야를 어루만져주셨습니다. 그리고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로 저를 먹이셨습니다. 먹고 다시 자니 또 와서 어루만져주고 또 먹이셨습니다. 그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 엘리야는 또 40주야를 걸어서 호렙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 지치고 곤고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의 곤고함을 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새 힘을 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그 힘으로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맡겨주신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약속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자기들끼리 고기 잡던 제자들은 주님 없이 무엇인가를 한다는 일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겹다는 사실을 그 밤에 다시금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늘 주님과 동행하며 3년을 살았습니다. 정말 평안한 가운데 그 모든 일들을 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밤 주님 없이 자기들끼리 무엇인가를 해 보았습니다. 너무도 힘들고 어렵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자기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신 그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 약속인지 저들이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출 33장을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절하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3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행군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단장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 앞에 정말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결국 14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새로운 약속을 받아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셔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는 삶은 그 자체가 저주입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없는 광야의 행군은 그 자체가 저주입니다. 만나가 내리지 않는 광야의 행군은 그 자체가 죽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약속이 우리 삶 속에 성취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그들의 일상 속에서 만났고, 부활의 능력을 힘입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사건은 베드로가 처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와 너무도 비슷합니다. 눅 5장을 보면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베드로가 고기 잡다 실패했었고 주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말씀하셔서 그대로 했더니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때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새롭게 다시 사명을 회복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일상 속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격려해 주십니다. 그 때 우리는 일상이 우리 삶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명에로 나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일상에 찾아오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오늘 이 시간 다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일상 속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명에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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