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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기적 (요 4:4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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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춘수 목사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성경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들이 우리들에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쫓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2000년전에 이땅에 오셨던 주님께서 이 세상나라에 오셔서 그 기적을 행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우리에게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우선적으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알리는 중요한 사인입니다. 사람으로 할 수 없는 많은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가르쳐줍니다. 다음에는 그 기적을 통하여 그 영혼을 구원하고 그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기적을 통해서 믿었습니다. 기적을 통해서 주님을 알고 주님을 고백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 생활에서 우리는 성경의 이 기적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합니까?
2가지 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먼저는 성경의 기적이 오늘 그대로 나에게 100%일어날 수 있다는 극단적인 맹신을 피해야 합니다. 지금과 성경의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성경 속의 사람들은 우리들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직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이 필요한 것은 주님을 알리기 위한 것이므로 이제 말씀의 시대에는 그런 기적이 그 상황처럼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기적을 부인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이제 지금은 기적은 전혀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만일 모든 기적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또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경 속의 기적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보아야 할 것은 원리입니다. 어떻게 기적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두 번째 기적의 주인공은 왕의 신하였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의 공생애의 첫번째  기적은  갈릴리 가나에서 있었습니다. 가나동네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번째  기적이 소개됩니다.
어떤  왕의  신하의  아들이  사경을 헤매게  되었을  때  그를  고치신  일입니다.이 두 번째 표적을 행하셧을때 공교롭게도 첫 번째 표적을 행하신 가나에서 표적이 일어난 것을 봅니다. 첫 번째 표적을 행하실 때  물이 포도주가 일어난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오늘 본문에 주님 앞에 나온 사람은 왕의 신하였습니다. 그는 아이가 거의 죽게 되었다고 말을 하면서 예수님에게 구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오늘 주님 앞에 나온 이 왕의 신하는 주님을 완전히 아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적을 통해서 주님을 온전하게 경험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기적을 통해서 어떤 분이신지 사람들에게 나타내보여주십니다.
오늘 이 본문의 기적이 일어나는 당시의 정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치유와 표적을 요청하는 상황 앞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야단치십니다.
그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오되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나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에게 표적을 보여주소서” 이렇게 예수님께 나왓습니다. 내 필요를 채우고 내 욕심을 만족시키고 내 문제를 해결하는 정도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질병의 문제를 갖고 있는 왕의 신하는 어떻습니까?
그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결국 믿음으로 자신의 아이가 고침받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입니까?

왕의  신하가  어떻게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는지를  세  가지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그는  직면한  고난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옵니다.
고난이  예수님  앞에  나오게  하는  첫번째  이유가  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고난이  없었더라면  결코  신앙을  갖지  않았을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에  부딪쳐  하나님을  찾게  된  경우가  신앙의  동기로  많은  비율을  차지 합니다.

본문에서  살펴보고  있는  이  사람은  왕의  신하였습니다.
주전  4년 부터  주후  39년까지  갈릴리  지방을  통치하고  있던  사람은  헤롯  안디바스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로마  황제의  지배  아래  있기는  했지만  팔레스타인의  한  영토를  지배하고  있던  헤롯  안디바스  밑에 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던  신임받는  신하였을  것입니 다.  그는  당당한  사회적  신분을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높은  지위와  권력을  누리고  있던  사람입니다.  소위  특권  의식을  가진  특수층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기가  가진  특권이나  부귀나 특별한  신분  때문에  신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쉽습니다.

만약  이  사람의  아들이  질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님을  찾 지  않았을  것이  확실합니다.  아직  예수님은  기적을  한  번  밖에  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도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때 입니다.  또한  그분은  유대  사회에서  공인된  랍비  계열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회에서  당당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일개  젊은  예언자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자기의  사정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이  적게  가진  사람  앞에  머리를  숙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인생의 많은 경우에 내가 주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 앞으로 나아갈 때 때로는 이중 삼중의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진 것들이 주님깨 가는 길을 제한할때가 있습니다. 물질이 장애물일 수 있도 있습니다.지식으로 인해서 방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권세가 제한할 수도 있습니다. 젊음이 방해를 할 수 도 있습니다. 재능으로 인해서도 제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왕의 신하는 사랑하는 아이의 고통 앞에서 죽음 앞에서 오직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한 생명이 사느냐 죽느냐 이 문제 앞에서 그는 주님만을 보았습니다. 오직 예수님 만이 해결책이 될 것을 보았습니다. 전에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고난 속에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에게로 나왔습니다. 주님 앞으로 나올때 왕의 신하인만큼 나름대로 배수진을 칠 수 있는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왕의 신하는 자기 아들의 질병을 보고 적극적으로 자신이 주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렇다면  고난은  얼마나  훌륭한  전도자입니까?  스펄젼은 “고난은  변장을  하고  찾아온  하나님의  천사이다” 라고까지  말했습 니다.  이  사람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용한  의사는  다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인간의  노력으로도  아들을  살릴  수  없다는  한계에  부딪쳤을  때  나사렛  예수가  최후의  희망이  된  것입 니다.

고난이  닥칠  때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  앞에서  아주  강퍅해집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오히려  마음을  닫아  버립니다. 때로 믿음의 사람들도 고난 앞에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경우를 봅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셨는가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생의 고난이 올때 그 고난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신비를 그대로 허용하십니다. 왜 사랑하는 자녀를 먼저 저 세상으로 데리고 가는지 모릅니다. 왜 사랑하는 아내를 남편을 먼저 죽게 하시는지 모릅니다. 인생의 많은 고난을 우리는 답을 알지 못한채 신비롭게 보냅니다. 믿음 생활은 항상 정답만을 우리에게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문도 허락하십니다. 신비로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고난 앞에서 의문도 있고 여러 가지 생각도 갖을 수 있습니다. 내가 이해되지 않는 고난 답이 없는 고난 때문에 너무 낙심하지 마시고 마음이 강퍅하여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편  고난으로  겸허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자기가  피조물이라는  사실과  별  수  없는  인간임 을,  연약한  인간임을  인식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도우심과  긍휼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고난은  기회입니다.왕의  신하는  고난을  기회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께  마 지막  희망을  걸었습니다.  원문에  보면  왕의  신하의  아들이라는  구 절의  “아들”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는데,  어떤  학자는  추측하기 를  이  아들은  아마도  외아들이었을지  모른다고  합니다.  하나뿐인  아들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지푸 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은  인생의  캄캄한  심연(深淵)을  통 과하여  마지막  벼랑  앞에  섰을  때,  자기  삶의  처지를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칼을  들고  마중  나온다  할지라도  나는  그분의  발 아래  내  몸을  던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최후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칼을  들고  우리를  마중하실  리가  없습니다.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우누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십니다.

오늘 왕의 신하에게는 고난의 극한  상황이  예수께  대한  절박한  신뢰를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물론  고난이 없을  때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는  사람은  더  복된  사 람입니다.  예수께서  이런  신앙을  더  귀한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삶,  인생의  절망의  깊이를  모르고  사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  어떤  폭풍우를  준비하시는지도 모릅니다.  이  폭풍우는  은총입니다.  당신을  흔들어  깨우려는  하 나님의  사랑이  담긴  손길입니다.
그래서  C.  S.  루이스는  “고 난이란  하나님의  메가폰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고난을  통해서  큰  소리로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왕의  신하는  고난을  당 하여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오늘 내가 당하는 고난이 무엇입니까? 그 고난으로 인해 주님께 나가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 고난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 앞으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고난으로 인해서 주님 앞으로 고난을 통해서 주님을 아는 자리에 나가신다면 그곳에서 당신을 주님의 놀라운 일들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그는  표적을 기대하면서 주님께 나왔습니다.

“나는  기적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인생의  폭풍우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진정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삶 의  궁지에  빠진다면  저절로  하나님을  찾게  될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이런  말을  좋아했습니다.
“포탄이  머리  위로  날고  있는  전쟁터의  참호  속에는  무신론자가  없다.”
사람이  절박한  처지에  놓이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것은  참된  신 앙을  형성하는  단계로  꼭  필요합니다.

기적을  기다리는  자체가  신앙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신 앙을  갖게  되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신앙이  표적을  기다리는  기적  중심의  신앙이라면,  그것은  건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종종  기적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신앙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흔히  표적을  기대할  때  사람들은  자기  문제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자기가  구하는  해답만을  추구합니 다.  결국  신앙이  자기  본위의  신앙으로  일그러질  가능성이  얼마든 지  많이  있습니다.

4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 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 음이라.”
그는  예수께서  자기  아들에게  안수하시면  틀림없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여기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집에 찾아오셔서 기적을 행할 것을 기대하고 믿었습니다.
왕의 신하의 영적 수준은  예수께서  ‘가지  않고도  고칠  수  있는  분’이 라는  사실을  알기에는  아직도  이  사람의  믿음이  부족하였습니다.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의  거리는  약  80리가  됩니다. 이  거리를  초월해서  역사할  수  있는  예수님의  전능성을  그는  아직도  알지  못 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원하는  이기적인  욕망에  근거해서  표적과  표 징을  구하며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이 왕의 신하가 좀 주님이 기대하시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어떻게 보면 유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왕의 신하는 이 표적을 기대하고 주님께 간구하면서 매어달렸을때 결국 표적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적은 다릅니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의  상식과  선입관과  기대를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에게  시간과  공간은  별  문제가  아 닙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  생각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할  경우가  있습니다.인간의  한정된  사고  구조로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구약에 나아만이라고 하는 아람나라의 장군이 문둥병에 걸립니다. 나아만이 그 질병을 고치려고 엘리사선지자를 찾았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나아만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사자를 시켜서 이렇게 하라고 합니다.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아만 장군은 너무나 속이 상했습니다. 자기 생각에는 ‘엘리사가 내려와서 서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상처위에 손을 흔들어 안수하여 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자기 생각으로  “요단강에  몸을  일 곱  번  씻으라”(왕하  5:10)는  엘리사의  말씀을  무시하려  했었습니다. 나아만이 생각하기를 우리아람나라의 강들이 얼마나 깨끗하고 좋은데 이 더러운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갔다가 나오라고 하는가? 그리고 분하여 다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만일 나아만이 혈기를 부리고 자기 생각대로 돌아갔다면 그는 고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때 분하여 하는 나아만에게 종들이 한번 선지자가 시키는 말대로 해보라고 권합니다. 그러자 나아만이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과 같이 되었습니다.

오늘 인생의 문제 앞에서 모든 것을 갖고 주님 앞에 나올때 누가 주님의 기적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먼저 그것을 기대하고 사모하고 기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소원하는 자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표적으로도 역사하십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50절).
주님은 왕의 신하의 집으로 가지 않앗습니다. 안수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왕의 신하의 소원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왕의 신하는 바라는대로 아들이 사는 표적을 맛보았습니다. 바라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여러분 삶에 주님의 표적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꿈꾸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선한 역사는 바라는 자에게 꿈꾸는 자에게 일어날 줄 믿습니다.

셋째로,  그는  말씀을  신뢰하는  신앙을  갖게  됩니다.

50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 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예수께서는  말씀만  하셨는데  이  사람은  한  순간에  그  말씀을  신뢰 했습니다. 
49절에 보면 왕의 신하는 예수님에게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집에 오셔서 아이를 낳게 할 것을 소원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내려오시지 않고 그냥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갔습니다. 그리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히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우주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생명의 말씀으로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지금도 그 말씀을 믿는 자에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말씀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기대할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 말씀을 믿는 자가 마음의 병 육체의 병을 치유받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믿을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담대하라는 말씀을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두려움이 물러가고 담대함이 찾아옵니다.

본문에서 사랑하는 아들이 병이 들어 죽게 되엇을때 왕의 신하에게 주님이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때 왕의 신하는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갔습니다.
무엇이  이  사람에게  이런  믿음을  갖도록  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아서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그는  “살았다” 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권위를  신뢰하고  집으로  갑니다.  확인  과정없이  말씀을  신뢰하게  된  것입니다.
기적을  안  보고도  믿을  수  있다면  이것은  더  귀한  신앙입니다.  기적보다  중요한  것은  말 씀입니다.  우리는  표적  없이도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주님은 보고 믿는 믿음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을 크게 보십니다.

여러분 표적이 없어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왕의  신하는  정말  표적  없이도  주님의  말씀 을  믿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가나는  걸어서  네다섯  시간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  날로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이  사람은  다음날  종들을  만났습니다(52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을  때  마음이  평안해진  것입니다.  집으로  급히  달려가  확인해  보지  않고도 아이가  낳은  것을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바르게  기도했는가는  기도한  뒤  우리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기도한  내용을  온전히  주께서  이루어  주 실  줄로  믿는다면  그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에  여유와  기쁨을  소유해야  합니다.

빌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합니다.
진정한 주님의 백성의 마음 속에는 근심이 물러갑니다. 염려가 물러갑니다. 주님의 백성들 마음에는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있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표적은  언제나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표적을  통해서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지만  그보다는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줍니다.  말 씀으로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축복의  통로가  되는  고난에  직면했을  때  말씀을  의지하여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바랍니다.

나가는 말 ))))

지금 나의 삶에 찾아온 고난을 믿음의 기회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실 응답과 표적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역사하려 주실 것인지 믿고 주님께 나가신다면 주님의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 말씀을 바라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삶에 말씀이 현실로 되고 말씀이 나의 것이 되는 놀라운 승리의 복을 우리 모두가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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