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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독교회의 기초는 부활입니다.(2) (고전 15:3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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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윤정현 목사

앞으로 우리 기독교는 부활절 행사를 더욱 성대하고 화려하게 지내야 할 것입니다. 교회들이 이 부활절을 왜 그렇게 성대하고, 중요하게, 그리고 즐겁게 그렇게 지내겠습니까? 그것은 기독교회에서 부활절이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기독교는 지금 지구촌 역사의 한가운데 존재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가 부활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백한 대로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첫째는 그리스도 자신도 다시 살지 못하셨을 것입니다.(고전15:13,16,롬4:25)
둘째는 우리가 선교하는 모든 행위가 헛되게 될 것입니다.(고전15:14)
셋째는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 될 것입니다.(고전15:14)
넷째 복음 전도자들이 다 거짓말쟁이가 됩니다.(고전15:15)
다섯째로 우리의 죄 사함도 없었을 것입니다.(고전15:17,롬4:25,행10:43,11:1-18,롬8:1,2)
여섯째는 믿고 세상을 떠난 신자들은 망하게 되었습니다.(고전15:18,살전4:14,15,막5:39,요11:11,계14:13)
일곱 번 째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불쌍한 자가 됩니다.(고전15:19,고후11:23-28)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기독교회의 기초요, 교회의 생명이요, 우리 신앙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의 부활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대에 부활 신앙이 퇴색되어 가고 있는데 부활신앙의 확신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잠자는 자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고전15:18, 20, 51,살전4:13-18) 여기 "잠자는 자들"이라는 말씀은 주안에서 죽은 자들을 말씀하는데 잠을 자고 있음은 안식의 시간이요 그것은 또 다른 활동을 준비하는 일정시간 휴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장차 우리성도들이 부활할 것을 알리는 예조요, 보증이요, 첫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2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 도다" 즉 첫 사람 아담의 범죄가 모든 사람에게 죽음을 가져 온 것처럼 마지막 아담(고전15:45)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롬5:12,고전15:22)

1. 그러면 어떤 순서로 부활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2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여기서 "각각 차례대로 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차례대로 된다"는 말은 군대 술어입니다. 부대가 행렬을 맞추어 진행하듯이 우리의 부활도 절도가 있고 질서가 정연합니다. 
 
부활의 첫째 부대는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하였습니다. 23절에 "먼저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는 부활의 원형이요 왕이시요 대장이십니다. 둘째 부대는 신자들의 부활이라고 22절 하반 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그에게 붙은 자요" 다시 말씀드리면 그리스도 재림하실 때에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이 부활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또는 그리스도께 소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째 순서로 부활할 자들은 그리스도께 붙은 우리 신자들이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신자들도 죽은 신자들이 먼저 부활하고 살아있는 신자들은 변화하여 주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의 변화된 몸들은 부활의 영체(靈體)들입니다.(살전4:16, 17, 3:13) 셋째 부대는 24절에 "그 후에는 나중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나타난 "나중"은 "세상 끝"을 의미합니다. 즉 성도들의 부활이 있은 후 따르게 될 불신자들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요5:29절에는 두 가지 부활이 등장하는데 나중에 있을 부활은 심판의 부활로서 불신자들의 부활이 되겠습니다.

계20:13-15절에 자세하게 말씀하는데 그 때에는 바다에 빠져 북은 불신자, 불에 타 죽은 불신자,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이 망가진 불신자들의 시신들이 다 일어나는데 각각 자기의 행한 대로 심판을 받고, 불 못에 던 지움을 당하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 둘째 사망이라고 부릅니다. 불 못에 던 지움을 당하였다고 하는 것을 보면 불신자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리해 드리면 신자들의 부활은 "생명의 부활(요5:29)이라고 하고, 불신자의 마지막 부활은 "사망의 부활, 또한 심판의 부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들은 사망의 부활, 심판의 부활에 참여하지 마시고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주님의 부활의 결과입니다. 

첫째는 25절에 의하면 우리의 원수 "사망"이 완전히 멸망당하게 됩니다.
다시는 사망이란 폭군이 인류를 괴롭힐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하나님께 바치게 됩니다. 24절이 되겠습니다. 이 말은 영계와 인간계의 모든 권력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둘째는 따라서 그리스도는 사망을 정복한 생명의 왕노릇을 하게 됩니다. 2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주님께서 만유를 통치하시는 왕이십니다.

셋째는 새로운 우주 질서가 회복됩니다. 27절 이하입니다. 이 새로운 우주 질서의 회복은 하나님께서 에덴을 창조하신 그 때의 모습을 말합니다. 만물의 갱신과 질서 회복입니다. 만물은 그리스도에게 새롭게 복종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복종하게 됩니다. 인류가 범죄로 인하여 타락하였을 때 만물과 인류의 타락과 함께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로 타락하였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곧 우주 질서의 파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의 최종 심판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의 세계가 도래하고 전 우주를 새로운 창조 질서로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 때의 모습을 이사야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사11:6-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6)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참으로 아름다운 낙원의 회복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영원토록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만유의 주가 되셔서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고전3:21-23,고전15:28)

3. 이제 끝으로 부활을 믿는 성도의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세례를 받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우리가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증거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과거의 믿음의 선진들은 그렇게 신앙 생활을 하였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신자들은 죽어 가는 순간까지도 예수를 증거했습니다. 죽어가면서도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이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나중에 부활의 소망을 깨닫고 예수를 믿고 그 신앙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례라고 하는 것은 예수 부활을 고백하는 신자들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우리가 늘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것"을 믿는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 사실을 믿는 성도들은 마지막 날에 우리의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둘째는 일사각오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고전15:30-3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30)또 우리가 어찌하여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31)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하였으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만약에 바울이 부활 소망이 없었다고 하면 죽음에 이르는 그 무수한 선교 여정의 고난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고전4:9-13, 고후4:.10, 11:23-27) 사도 바울은 평생을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 말은 "나는 매일 죽음의 위험 가운데 있노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에게는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그 수많은 박해와 핍박, 그리고 재난과 심지어는 맹수들과의 위험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무섭고 위대합니까? 그래서 믿음의 장인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부활신앙이 있기 때문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으며 이 세상에서 받는 손해와 괴로움에 대해서 굳이 보상받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장차 부활의 때에 우리 주님께서 다 보상하여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에 부활 소망이 없다면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현실 쾌락주의로 사는 것이 훨씬 더 나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사22:13)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라고 하면서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신앙의 승리자가 되었던 것을 우리도 본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의 어려움과 고난을 도리어 감사로 바꾸어 버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셋째는 날마다 각성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33,3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33)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무슨 뜻입니까?

1)악한 동무들에게 속지 말라고 하십니다.
장차 부활의 신랑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신부 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더럽혀지지 않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각성하고 근신하는 것입니다.

2)"깨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깬다는 말은 "술 취함에서 깨어남"을 말합니다. 순간적 쾌락 사상으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기분파 적으로! 감정대로! 유행 따라 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유혹과 유행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정신을 차리고 사는 생활을 말합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산다는 말씀입니다. 3)의로 행하고 죄를 범치 않는 생활입니다. 34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구별된 삶, 성별 된 삶, 거룩한 삶을 의미합니다.

당시의 고린도 도시는 세속주의, 물량주의, 쾌락주의, 개인이기주의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순진한 신자들을 속이고 세속화시키려고 유혹하고 노리고 있습니다. 교회를 세속화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인스턴트 식품을 즐겨하듯이 신앙 생활도 인스턴트 적으로 쉽게, 쉽게 십자가 없이, 고난 없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신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것을 추구하면서 쫓아가기도 합니다. 오늘날이 바로 그러합니다. 주님은 십자가 지고 나를 쫓으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십자가 벗어 던지고 넓은 길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누가 고난의 잔을 마시겠느냐고 하시는데 제자들은 더 높은 자리에 앉아 대접받을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혹시 저와 여러분들이 그런 신자들이 아닌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신자들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 신앙은 소망의 신앙입니다. 희망의 신앙입니다. 오늘보다 내일을 더 사모하며 믿음으로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하여 오늘에 충실하고 진실하며 성실한 신앙입니다. 현재의 아픔과 고난을 바라보는 신앙이 아니라 내일의 치유와 회복과 보상을 바라고 오늘을 믿음과 기도로 인내하는 신앙입니다.
오늘의 절망에서 내일의 소망을 찾고, 오늘의 실패에서 내일의 성공을 찾고, 오늘의 답답함에서 내일의 시원함을 찾고, 오늘의 불쾌함에서 내일의 유쾌함을 찾고, 오늘의 유한에서 내일의 무한을 찾는 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오늘의 눈물에서 내일의 웃음을 찾고, 오늘의 탄식에서 내일의 개가를 부르는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때문에 현재의 고난은 우리가 장차 누릴 영광스러움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이 같은 부활 신앙으로 무장하시기를 바랍니다.

부디 이 부활 신앙으로 이 어려운 시대를 이겨나가야 하겠습니다. 이 부활 신앙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교회를 역사의 중심에 서게 한 것입니다. 우리 대선의 성도들은 이 부활 신앙으로 역사의 중심에 서서 "세상이 감당치 못할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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