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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는가! (눅 24:13-16, 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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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장빈 목사

그 날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부활하신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 무리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를 가리켜. 누가 선생님은,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떨어진 촌이라고만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 한 분만 믿고, 고향을 떠나 예루살렘까지 따라 왔던 저들, 그러나 저들의 꿈은 수포로 돌아간 채, 끝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신세, 참담한 저들의 발길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을 받아들여야 하고,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일을 잊어야만 하는 절망의 길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그래서 더 이상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허망한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 꿈같은 시간들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주님과 함께 했던 순간들, 힘도 들었지만 정말 즐거웠던 나날들의 영상이, 예루살렘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저들의 가슴에 또릿하게 살아났습니다. 온통 예수님을 향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어느 새 저들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로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입니까? 그토록 그리움에 사무친 저들에게, 지금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 오셨는데, 정작 저들은 알아보지 못하니 말입니다. 왜 그 분 인줄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요? 지금 그들 바로 곁에 와 계신 주님, 함께 동행해 주시는 예수님을 왜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요?  

그랬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들은 그렇게 그리워하던 예수님이 찾아 오셨는데,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함께 걷고 있으면서도 그 분이 주님이신 줄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같은 공간 안에 있다고 해서 나와 너가 다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건물 안에 있다고 해서, 같은 전철을 타고 있다고 해서, 같은 배를 타고 있다고 해서, 같은 도시에 산다고 해서, 모두가 다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남을 가능케 하는 변수가 결코 공간이 아님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저들은 다시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저들의 마음에 이미 끝났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그래 그립기는 하지만, 이젠 끝난 일이야!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어! 끝났어!”한마디로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더 이상 만날 수 없다고 단념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요, 오늘 주신 본문, 누가복음 24장 17절 말씀에 보니,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 곁으로 오신 주님이 조용히 물으십니다.“무슨 이야기를 그리 열심히 나누는 거요?”그 순간, 두 사람 모두, 얼굴에 슬픈 빛을 띠고 침통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어 섭니다. 지금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차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고 묻는 객이 나타나자, 억눌렀던 감정이 솟구쳐 오른 듯 합니다.  

그 중 한 사람이 퉁명스럽게 반문합니다.“아니 보아하니, 당신도 지금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사람 같은데, 그동안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거기서 일어난 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단 말이요?”자기 선생님의 이야기를 모른다는 사실에 대단히 화가 난 모양입니다. 우리 선생님의 이야기를 모르다니... 가당치도 않다는 툽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 다시 한번 조용히 물으십니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무슨 일이었는데요...!”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이번엔 자세히 설명합니다.“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그 하신 일과 말씀에 큰 능력을 보이신 예언자이셨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우리 백성의 관원들이 사형선고를 받게 하고는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분이라고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이미 처형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지 벌써 사흘이 지났습니다...”  

여기서 저들의 마음 상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미 저들은 마음으로 희망을 버렸던 것입니다. 희망을 버린 상태가 무엇입니까? 바로 절망입니다. 그렇습니다. 절망이란 희망을 내다 버린 상태, 곧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입니다. 여러분! 내가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나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 저들은 부활하신 주님이 옆에 와 계신데도,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들 스스로 희망을 포기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저들이 주님을 만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렇게 그리워하면서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움만으로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절대로 내 손으로 희망을 내다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절망은 죽음으로 가는 직행열차입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나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이 샘솟는 멋진 봄날 되시기를 축원...
 
저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계속되는 저들의 대답을 들어 봅시다. 이번엔 우리 임마누엘/할렐루야 성가대의 낭독을 통하여 듣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4장 22-24절입니다. / (성가대 봉독) /  
저런 저런, 이 제자들의 믿음 상태를 좀 보세요... 글쎄 주님이 부활하신 바로 그 날, 그것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자리에서, 바로 그 주님께 드리는 말씀 좀 들어 보세요... 저희 무리 가운데 몇몇 여인이 저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는 겁니다. 그 여인들이 새벽에 무덤에 찾아 가 보았으나 예수님의 시체는 없고, 천사가 나타나 그 분은 다시 살아 나셨다고 일러 주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제자 무리 가운데 두어 사람이 무덤에 달려 가 보았으나 그 여인들의 말이 맞긴 맞았지만, 예수님을 보진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엠마오 돌아가고 있는 이 두 사람은 이미 부활의 소식을 전해들은 제자 무리에 포함되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저들은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인들이 달려와서 전해 준 부활의 소식에 대해 그저 몇몇 여인들의 깜짝 쇼 정도로 치부했던 것입니다. 동료 제자들의 확인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들은 모든 희망을 버리고 고향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그랬습니다. 저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여인들의 증언도, 제자들의 확인도 보증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저들 인생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불쌍한 인생입니다. 가장 감격적인 순간에 여전히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저들을 향해, 우리 주님, 드디어 한 마디 하십니다. 25절 말씀인데요, 저는 공동번역 성서에서 인용하겠습니다.“이런 어리석은 사람들 같으니... 그래 예언자들이 말한 것들을 그렇게도 믿기 어렵더란 말이냐?...”그렇습니다. 우린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유혹에는 그렇게도 잘 넘어가면서도, 세상 사람들의 말은 그렇게도 잘 믿으면서도, 선지자들의 예언과 말씀은 어찌 그리 더디 믿는지... 참으로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런데요, 우리 주님, 끝났다고 포기하고 돌아서는 그 마음에 다시 찾아와 주십니다. 친히 가까이 오셔서 말도 걸어 주시고, 물어도 주시고, 가르침도 주시면서 나와 동행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당신 곁을 한 순간도 떠나신 적이 없으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문제는 내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유명한 일화가 있죠... / 어떤 분이 꿈에 천당엘 갔답니다. 거기서 주님을 만나 자기가 걸어 온 인생길을 뒤돌아보게 되었답니다. 발자국들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내 옆에 수많은 발자국들이 보이더랍니다.“주님! 저 때가 언젭니까?”“자네 인생이 세상에서 성공을 거두던 때였지...”/ 그런데... 조금 지나자 두 사람의 발자국만 보이더랍니다.“주님! 저기 둘만 걸을 때, 저말고 다른 이는 누구죠?”“이 사람! 그것도 모르나... 바로 날세!... 나야 나!”“고맙습니다... 모든 사람이 제 곁을 떠났을 때도 주님은 저와 끝까지 동행해 주셨군요...!” /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발자국 하나가 사라지더랍니다. 이번엔 약간 화가 나서, 퉁명스럽게 물었답니다.“아니, 주님, 저 땐 저 홀로 놔두시고 어디를 다녀오셨습니까?”그러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이 사람아! 저 땐 자네가 너무 지쳐 쓰러지려 하길래 내가 자네를 업고 걸어갔다네...”  

사랑하고 존경하는 여러분! 우리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곁에 와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엠마오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희망과 믿음을 두지 않고, 이젠 끝났으니 고향에 돌아가 내 살길을 찾아보겠다고 분주하게 도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살길을 찾아 가는 발걸음이 얼마나 바쁜지 옆을 돌아볼 겨를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개만 돌려도 거기 계신 주님이 보일 텐데, 마음을 열기만 해도 주님을 만날 수 있을 텐데, 귀를 기울이기만 해도 주님이 내게 속삭여 주시는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을 텐데, 그래도 우린 끝까지 엠마오만을 바라보며, 오늘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바쁘게 뛰고 또 뜁니다.  

<<<시간을 보고... 바쁜 사람의 천당 여행기...>>>

  사랑하고 존경하는 여러분! 아무리 세상에서 바빠도 주님을 만나는 시간에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배 시간엔 예배드리시기 바랍니다. 기도 시간엔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영적인 이정표를 찍으면서 달려도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안식과 쉼을 얻지 못한 채 달려가는 인생, 이내 주저앉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너무 염려하지는 마십시오. 우리 주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오늘의 본문 누가복음 24장 30-31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 (읽기) / 그랬습니다. 저들이 길을 가다가 해가 저물어 숙소를 잡고 주님과 함께 밥상에 둘러 앉아 음식을 나눌 때 비로소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같이 밥 먹는 순간이 소중한 것입니다. 한 밥상에 둘러 앉아 애찬을 나누는 일은 그저 밥 먹는 일, 곧 식사가 아닙니다. 밥상은 서로가 서로를 마음으로부터 만나게 해주는 소중한 터전입니다. 오늘 본문 31절에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눈이 밝아져...”표시하시고... / 그렇습니다. 주님이 축복하시는 밥상에 둘러  앉으면 우리의 눈이 밝아집니다. 눈이 밝아져 우린 서로를 알아보게 됩니다. 또한 눈이 밝아져 우린 밥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 기회가 되는대로, 아니 우정 기회를 만드셔서 사랑하는 분들을 밥상에 초청하시기 바랍니다. 내 손으로 직접 밥상 차리기 어려우시면, 용돈 절약하여 일정표 짜놓고 내 사랑하는 분들을 차례대로 아름다운 식당의 밥상으로 초청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우린 서로를 더욱 깊이 알게 될 것입니다. 거기 밥상에서 우린 진정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곳, 밥상공동체에서 우린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32절의 말씀에도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성경을 풀어 주실 때...”라는 표현인데요, 원어 성경에는 앞에서 눈이 밝아졌다는 표현에서와 같은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뜻은 연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성경 말씀을 열심히 들을 때, 그리하여 우리 가슴이 뜨거워질 때, 비로소 우리 마음을 열어 주시고 만나 주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 제단을 사모하고, 열심히 제단의 내 자리를 꼭 지키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듣는 시간은 곧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1절 하반절에 보니,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렇게도 그리던 주님을 알아 본 다음 순간, 아직 제대로 인사도 드리지 못했는데, 우리 예수님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31절 말씀을 다시 한번 잘 보시죠... 저희 눈이 밝아져 그 분 인줄 알아보았더니, 곧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셨다는 겁니다. 알아보자마자 사라지신 겁니다. 야속타 말할 짬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디로, 왜 가버리신 것일까요? 여기 놀라운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은 바로“나”속에 들어와 계십니다. 곧“당신”속으로 사라지신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 속으로 들어오셨으니 보이지 않는 것, 당연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구요.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내 안에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바로 당신 안에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거하시는 내 몸이니 나 자신을 소중하게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거하시는 몸, 그 몸을 함부로 굴릴 수 없습니다. 주님이 와 계신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아무렇게나 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도 소중하고 당신도 소중합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사랑하며, 당신 또한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거하시는 당신이기에, 당신을 목숨 걸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나의 발길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혹시 엠마오를 향해 달려가고 계시진 않습니까? 부활신앙은 모두가 끝났다고 포기하는 그 시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신앙입니다. 지금 내 안에 와 계신 주님, 그리고 당신 안에 와 계신 주님을 만나, 그 분과 함께 엠마오로 향하던 나의 발길을 즉시 돌이키는 신앙적 결단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혹시 주변에 아직도 엠마오를 향해 달려가는 영혼들이 있습니까? 어서 속히 밥상에 초청하시고,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고 초청하시기 바랍니다. 그 초청의 결실이 주렁주렁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두 단어만 표시하고 갑니다. 33절의 첫 단어들...“곧 그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35절의 마지막 단어..“말하더라!”/ 그랬습니다. 저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뵙자마자 그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거기 가서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체험을 증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마음을 여십시다. 마음을 열면 내 속에 와 계신 주님이 보입니다. 마음을 열면 당신 속에 와 계신 주님도 보입니다. 나와 당신 속에 와 계신 주님, 밥상공동체를 통해 우리를 만나 주시는 주님, 우리 가운데 와 계신 주님, 그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 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그 주님과 함께 우리의 발걸음을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돌려주시기 바랍시다. 분명 우리의 앞길에 주 성령으로 함께 해 주시며 하늘의 복을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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