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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놀라운 주님의 은혜 (행 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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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해원 목사

  이미 여러분들이 보도를 통해 아셨겠지만 오늘 새벽 로마교황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455년만에 비 이탈리아인으로 교황에 오른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는 폴란드 사람으로서 지난 1978년 교황으로 선출된 뒤 지금까지 26년 동안 장수한 교황중의 한사람입니다. 그가 재임하는 기간동안 세계는 전쟁과 테러의 위협 속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는데 그가 세계 평화를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고, 아주 원만한 사람이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한국도 두 번이나 방문하여 각별한 애정을 표시하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의 이름이 ‘요한 바오로 2세’입니다. 물론 이 이름은 본명이 아니고, 또한 세례명도 아닙니다. 교황이 즉위하면 보통 이름을 정하는데, 그는 바로 전임이었던 요한 바오로 1세를 그대로 이어 이렇게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 바오로’는 특이합니다. '요한‘도 아니고 ’바오로‘도 아닌 두 개의 이름이 합성된 것입니다. 처음 요한 바오로 1세가 이름을 짓게 된 연유는 그의 바로 전임이었던 사람이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인데, 이 두 사람을 생각하며 ’요한 바오로‘라고 정했다고 합니다. 현 교황을 포함한 역대 교황이 모두 264명인데, 그 중에 가장 많은 이름이 ’요한‘이고, 또 ’바오로‘입니다. 사람이 이름을 가질 때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역대 교황들도 성경에서 존경하는 인물로 요한과 바오로를 꼽는다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누구입니까? 영어로는 ‘Paul'로 불리는 이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바울은 기독교 역사에 뛰어난 인물입니다. 사람들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 이외에 한 사람을 선택하라면 대부분 바울을 꼽습니다. 바울은 카톨릭에서도, 기독교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인물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지금까지 귀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뛰어난 사람 바울을 앞으로 몇 주 동안 개인신앙과 관련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그가 부름 받을 때의 모습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본문이 그것을 전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대하고, 또 바울을 생각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은혜’입니다. 보통 은혜가 아니고 그야말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 은혜는 주님이 주신 것이기에 ‘놀라운 주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은혜를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모든 은혜에 관한 성경지식은 대부분 바울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바울은 은혜를 알았던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의 삶을 지배했던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생각하면 먼저 은혜부터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에게 임했던 놀라운 은혜, 그것은 어떤 은혜였을까요?

  우선, 개인적인 것입니다. 본문은 사도행전에서 큰 변화의 계기를 보여주는 말씀으로서 바울의 개종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거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이 피를 토하며 죽을 때에도 그것을 마땅한 죽음이라고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당시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사람만을 골라서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는 일을 한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갔고, 언제든지 달려간 사람입니다. 본문 1절에서 그의 광기 있는 행동을 너무도 무섭게 보여줍니다. 그는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마치 사탄의 앞잡이처럼 믿는 사람을 찾아다녔습니다.
어느 날, 그는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 가까이 왔을 때에 하늘로서 빛이 그에게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고, 그냥 땅바닥에 주저앉게 되었습니다. 그런 바울에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런 주님의 음성에 그는 깜짝 놀라며 ‘주여, 뉘시옵니까’ 라고 반문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그는 그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일생의 변화의 사건, 구원의 역사가 임한 것입니다. 전에는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놀라운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보여주는 본문을 보면, 7절에서 이렇게 그때의 광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사도행전 22장에서도 바울이 이 사건을 간증으로 고백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거기에서도 그는 그날 현장에서 함께 했던 많은 사람가운데 주님을 보고, 주님의 음성을 알아들은 것은 오직 자기뿐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보여줍니까? 그날 그가 경험한 주님의 은혜는 오직 그에게만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거기에 함께 있었지만 오직 바울에게만 임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임한 놀라운 은혜입니다. 은혜는 개인적으로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기에서 우선적으로 보여줍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임하는 주님의 은혜는 언제나 개인적입니다. 집단적으로 모여도 은혜는 개인이 받는 것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성도들에게 임한 성령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곳에 함께 했던 120명의 성도 모두가 성령을 체험했는데, 마치 그곳에 있으면 자동적으로 성령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은혜는 그곳에 모인 한 사람, 한사람, 개인에게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이렇게 주십니다. 같이 가도 못들을 수 있고, 못 볼 수 있습니다. 같이 기도하고, 같이 바로 옆에서 함께 예배를 드려도 나는 은혜를 크게 받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구원도 개인이 받고, 천국도 개인이 가는 것입니다. 기도도 개인이 해야 응답을 받고, 봉사도 내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덤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아내가 믿는다고 남편이 저절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부모의 신앙으로 자녀가 덤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개인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잘 쓰는 농담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뛰는 놈이 위에 나는 놈, 나는 놈 위에 붙어 다니는 놈‘ 세상에서는 이 말이 가능하고, 통할 수 있습니다. 날아가는 사람 옆에서 영화를 누릴 수 있고, 권세를 가질 수 있고, 얼마든지 힘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날아가는 사람보다 더 큰 권력을 갖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다 개인적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 주님은 양과 목자의 비유를 통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목자는 양을 ‘각각’ 불러냅니다. 여기 ‘각각’ 이란 말이 아주 귀한 표현입니다. 영어로 one by one,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개인적으로 불러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이요, 은혜입니다.

  이처럼 은혜는 개인적이기에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은혜를 받아도 내가 받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은혜는 나에게 임해야 합니다. 은혜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받아야 합니다. 오늘도 그 놀라운 은혜가 주 앞에 모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임합니다. 이런 개인적인 놀라운 은혜가 여러분에게 오늘도 풍성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기적적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다시 보십시오. 그는 길을 가다가 하늘의 빛을 경험했습니다. 그러자 땅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의 또렷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8절 이하에 보면, 그는 이런 일이 있은 뒤,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지만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흘 동안 앞을 볼 수가 없었고, 먹지도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그는 다시 보게 되었고, 회복이 되었지만, 오래 동안 잘 볼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성경에서 바울이 그의 평생 고질병이라고 하는 안질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때 주님의 강력한 빛을 본 뒤에 생긴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무엇을 보여줍니까? 그에게 임한 주님의 은혜가 기적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이렇게 만났습니다. 개인적으로 체험한 은혜였고, 그리고 기적적인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평생 은혜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시시때때로 그가 받은 다메섹의 은혜를 간증으로 고백하는 것을 봅니다. 그의 모든 생각, 사상, 교리, 헌신, 결단은 바로 이런 기적적인 은혜를 체험한 뒤부터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는 한마디로 기적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믿지 않는 사람이 정상이고, 오히려 믿은 우리가 비정상적인 것으로 설명할 때가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믿은 것이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내 마음에 받아드리고, 그분을 내 중심에 모시고 믿음 생활하는 이것이 기적입니다. 이미 우리는 주님을 믿어 큰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내 생애 믿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이런 기적적인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내 삶에 기적 같은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 삶에 모든 부분에서 주님의 은혜가 기적같이 임합니다. 기적 같은 일이 이미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벌써 3년이 되어갑니다만 준범이의 일은 우리 교회가 체험한 기적적인 은혜입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지만 잊고 있어서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오신 분들도 많아서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2002년 8월 4일, 현대아파트 18층에서 우리 교회 이준범이란 어린아이가 떨어졌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생존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입니다.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살았습니다. 지금 준범이가 아주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아이를 향한, 아니 우리 교회를 향한 기적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이미 체험한 것처럼 우리는 기적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며 사는 우리에게는 ‘안된다, 못한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에서도 있게 만드십니다. 불가능도 가능케 합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고, 절망에서도 소망을 만드는 분입니다.

  이제 우리 삶에 하나님의 기적 같은 은혜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 약한 우리를 강하게 하실 것입니다. 없는 우리를 있게 하실 것입니다. 안 되는 우리를 되게 하고, 낮은 우리를 높은 곳에 세워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임하는 은혜입니다. 이런 놀라운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개인의 삶에, 가정에, 공동체에, 사업과 일터의 현장에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강권적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주님을 만나는 이 사건에서 정말 귀하게 보여지는 모습은 바울은 수동적이고, 주님이 주관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이 주님을 만나겠다고 해서 만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주님을 찾으려고 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주님의 길과는 전혀 다른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또한 지금 바울이 거부하겠다고 해서 자기 의지로 밀어낼 수도 없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강력하고 강권적인 주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임하는 은혜는 강권적입니다. 모든 주권과 힘과 역사는 하나님에게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나의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나의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하나님이 세우지 아니하면 인간이 세워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키지 않으면 아무리 밤새워 지켜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우기도 하고 헐기도 하고, 심기도 뽑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과 섭리가 이 세상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역사 위에 또 다른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평생 마음에 새기며 살았던 삶을 그는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이것이 바울의 신앙과 삶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를 강권했고, 압도했습니다. 그 강권적인 은혜로 바울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여 지진의 강도와 위치를 추정해도, 땅이 갈라지고 바다가 넘쳐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상을 잘 관측해도,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를 막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것을 자연현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로 믿습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주권대로,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 삶에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의지가 있습니다. 그 의지로 우리가 노력해야 합니다. 땀을 흘려야 하고, 종신토로 수고해야 합니다. 성실로 식물을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무조건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만 하는 것이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반대로 세상 사람들처럼 무조건 나의 노력이나 수고로 다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수고가 있고,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잘 되는 것도, 잘 안 되는 것도,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다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요즘과 같은 시대에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가 임하기를 바라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을 기대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힘들다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강권적인 은혜를 바울에게 주셨고,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분이십니다.

  미국에서 많이 읽혀지는 책 중에 ‘마가렛 미첼’이란 사람이 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영화로도 나왔던 유명한 작품입니다.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아픔의 역사를 보여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스칼렛’이란 주인공은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주인공은 광활한 대지를 바라보며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다시 뜬다(Tomorrow is another day)’라며 끝이 납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다 잃어버렸지만 미래가 희망으로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과거의 연장으로 오는 게 아니라 내일은 내일로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심과 절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삶의 고통의 순간부터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 서서히 전개됩니다. 어쩌면 인간이 끝나야 하나님이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그 은혜가 개인에게, 공동체에, 열방에 임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에게 임한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함께 생각했습니다. 그 은혜는 개인적으로, 기적적으로, 그리고 강권적으로 임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도 임할 이런 은혜를 기대감과 소망으로 삼고, 한 주간동안 은혜의 깊은 바다로 마음껏 저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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