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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만과 영성 (눅 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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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김형준 목사
 
『나는 가난한 자나 부자, 못 배운 자나 많이 배운 자,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나 모르는 자, 신앙의 연륜이 오래된 자나 초신자나 할 것 없이 무차별로 공격하는 자 입니다. 나는 변신과 변장의 명수이기 때문에 쉽게 노출되지 않습니다. 내가 드러날 때에는 육신의 암병처럼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퍼져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발견해서 치유하기는 어렵습니다. 나는 모든 분야의 관계에 특별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 파괴력이 무궁무진합니다. 내가 지나간 자리에는 반목과 질시, 미움과 불신만이 가득 남아 수습하기 어렵게 됩니다. 나는 기독교 역사상 영적인 사람들을 가장 많이 넘어뜨린 역할을 담당한 자입니다. 또한 공동체를 파괴하는데 가장 끈질겼던 악명 높은 요소입니다. 나는 공동체의 발전과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 중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자입니다. 나는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교만입니다. 행복은 소유나 성취에서도 오지만 많은 부분 관계에서 오는데,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신학자들은 교만을 불행과 죄의 어머니라 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아주 싫어하는 죄였고,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 어느 틈엔가 들어가 사람들을 무너뜨리는 무서운 죄가 바로 교만이었던 것입니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교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모든 나라와 가정이 겪는 불행의 주된 원인은 교만이다. 때때로 어떤 악덕은 사람을 하나가 되게 한다. 우리는 술 취한 사람들이나 음란한 사람들 중에서도 우정과 교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교만은 항상 대립을 가져온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도 대립을 가져온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분에게 맞서곤 한다. 하나님이 모든 면에서 뛰어나시다는 점과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깨닫기 전에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교만한 자는 늘 사람과 사물을 내려다 본다. 그리고 내려다 보는 한, 그 사람은 위에 계신 분을 볼 수 없다. 교만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절대로 알 수 없다.’

교만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 일부가 되어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게 하며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옛 성인들이 영적 생활을 할 때 가장 처절한 싸움이자 끝나지 않는 싸움이 바로 교만과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마음 깊은 곳, 생활과 공동체 속에 교만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말씀 속에서 계속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은 우리를 조종하고 파괴하는 일을 서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왜 교만이 우리 행복을 깨뜨리고, 하나님 주시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까요? 크게 세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교만은 자기자신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두 사람의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는 세리이고 하나는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은 분리주의자입니다. 죄인과 세상에 섞이지 않고 성경의 율법에 적혀 있는 대로만 행동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배고픈 자를 돕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시간을 정해서 기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자 한 사람입니다. 세리는 세금을 거두어 일정분량을 로마 정부에 바치고 남은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많이 거둘수록 자신에게 남는 세금의 양이 많아지기 때문에, 세금을 많이 거두어 민족의 반역자였던 그래서 백성들로부터 원망 듣던 민족의 반역자였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세리를 원망하고 질시합니다.

두 사람이 기도를 하는데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 합니다. ‘하나님, 제가 세리와 같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십일조를 꼭 합니다. 전도도 하고 기도시간도 잘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들과 같은 타락한 생활을 하지 않게 해주셔서 참으로 감사 드립니다.’ 세리는 성전 뒤 구석에서 가슴을 치며 ‘하나님,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저는 하나님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울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의 기도 중 바리새인의 기도 보다 세리의 기도를 받으시며 의롭게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기준은 ‘교만’입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믿는 삶의 모습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우월감과 열등감입니다.

일반적으로 교만이라 하면 자신을 과시하거나 자기 능력보다 크고 과장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교만을 해석해보면 할 수 있는데도 할 수 없다며 도망 다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데도 스스로 판단해서 못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에 바리새인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모든 말씀의 기준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민족을 구원할 자로 쓰시겠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모세는 자신의 인생은 이미 끝난 인생이고 심지어 히브리 족속 조차 자신을 비아냥 거리며 언변이 능하지도 못하다는 말을 앞세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논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주시는 말씀을 따라 믿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믿기 때문에 자기가 자신을 판단합니다. 열 두 제자들을 비롯해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들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실패한 사람을 쓰셨습니다. 속이 좁은 사람, 우유부단한 사람, 속이 엉큼한 사람, 적대감을 갖고 있던 사람, 답답한 사람, 머리가 둔한 사람, 편견 있는 사람,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능력과 은혜를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갔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 역사 계보에 이방인과 기생도 있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삶은 실패의 역사였습니다. 실패할 때마다 가르쳐주시고 고쳐주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해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위대한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라는 구절도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시면 가능한 것 입니다.

교만의 또 다른 모습은 우월감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이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자신의 한계와 부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까지나 따르겠다고 큰소리치던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는 기분이 나빴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절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으리라 확신했습니다. 베드로의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을 몰랐던 것입니다. 위기와 어려움이 닥쳤을 때 베드로는 자기 실체를 볼 수 있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위해 닭 울기 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고 맙니다.

교만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고 판단하는 기준이 자기 중심적인 인생을 말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기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는 잘 알지만 이면에 숨겨진 메시지는 잘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긍휼을 읽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뒤덮인 세상, 용서가 가득한 세상, 축복하시는 세상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를 보지 못합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열두 명 중 열명은 교만과 욕심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신 계획과 마음은 보지 못했습니다. 지식과 경험의 눈, 육신의 눈으로 본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는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차라리 공부의 대상일 뿐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믿음의 대상입니다. 인생과 세상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 우리 인생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된다고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안 된다고 하시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안됩니다. 하나님 기준을 벗어나서 자기 기준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불행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된다 하셨는데 안 된다고 믿는 사람 역시 불행합니다. 자기 인생의 풍요로움을 놓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교만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을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어린 아이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교만한 사람, 바리새인이 생각할 때는 도덕적으로 바르고 율법적으로 옳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더니”, 사람이 보기에 의로워 보인다 하더라도 하나님 눈에는 모두 오십보백보 차이뿐입니다. 사람 눈에는 괜찮아 보일지라도 하나님 영광에 이르기 전까지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방법이 없기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먼저 찾아와 주셨습니다. 바로 ‘인카네이션’, 즉 성육신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사건을 의미합니다. 구원은 우리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9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행위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13절에 세리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이 상태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지식과 돈으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습니다. 내버려 두십시오.’하는 사람은 바리새인입니다. 둘 중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까? 세리의 기도를 받으십니다. 여기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 고백할 때 사용한 단어는 히브리어 ‘힐라스테리온’이라는 단어입니다. 구약의 속죄소를 가리키는 말로, 구약 시대 제사장이 속죄소에 피를 뿌리며 제사를 드리러 들어갔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우리 기도가 열납 되는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의로운 삶을 살아서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잘나서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을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의지해야 합니다. 교만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눈을 가리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길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복되게, 생명 있게 살아가는 길은 하나님께 나가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길을 모르고 하나님 과의 관계를 찾지 않기 때문에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다고 고백할 때에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문제는 지금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입니다. 작은 문제라도 하나님 앞에 나가는 방법을 모르면 우리는 파멸하게 되지만, 큰 문제라도 하나님께 나가는 길을 알면 축복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셋째 교만은 사명의 삶을 살아가는데 방해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은 사명 때문입니다. 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살려두시는 것입니다. 병환 중에 위독하여 숨이 곧 넘어갈 듯 해도 살려두시는 이유는 하나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식물인간 된 사람, 임종 직전에 있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이 너무 고통스러워 보여 ‘하나님, 그저 편히 가게 해주십시오!’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지켜보면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도 하시는 일들이 있습니다. 환자가 온전히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거나, 가족들이 화목하기를 기다리시거나, 가족이 믿음을 다 받아들이기를 기다리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간이 이해하거나 측량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다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하나님 뜻대로 바르게 살아가고자 한 것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리새인에게 사명 없는 것을 보시고 질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 없는 삶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사명 있는 자의 기도는 ‘저들과 같이 느끼게 하옵소서’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이 땅의 고난을 체휼하신 분입니다. 사명이 없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자신은 세상 사람들과 부류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사님들끼리 모여서 대화하는 중에 나온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도에서 코끼리 앞발을 들게 만드는 대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내로라 하는 조련사들이 발을 들게 하려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 해봐도 꿈쩍도 안 하던 코끼리가 한국 목사님 한 분이 귀에 몇 마디 소근소근하자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앞발을 번쩍 들더랍니다. 사람들이 의아해하면서 무슨 말을 했냐고 묻자 자기는 한국에서 개척 교회하는 목사인데 발 좀 들어주면 안되겠냐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코끼리 앞발과 뒷발을 다 들고 바둥거리는 묘기를 보여야 할 때였는데, 어떤 조련사도 시키지 못한 묘기를 이 한국 목사님이 코끼리 귀에 대고 몇 마디 하니까 또 되더랍니다.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묻자, ‘코끼리야, 너 한국 와서 개척교회 한번 해볼래?’라고 말했더랍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다른 목사님들은 다들 웃느라 정신 없는데, 한 목사님만은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습니다. 바로 개척교회를 목회 하신지 3년쯤 되는 분이었던 것입니다. 분위기가 숙연해지고, 제 마음도 찡해졌습니다. 우리가 너무 자기 중심적이었구나 싶었습니다. 개척교회 목사님들의 노고를 몰랐다고 느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세리를 보며 ‘동족으로부터 원망까지 들으며 자기 살겠다고 하는 저 세리들 마음은 얼마나 괴로울까?’ 이해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으로 위로 받을 수 있도록 함께 해주었다면 어땠을까요? 하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주셨던 사명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무엇입니까? 먼저는 전도하라는 사명을 주셨고, 다음으로는 사랑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기준으로만 해석하기 때문에 이 두 사명을 잘 보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장차 받게 될 재산을 먼저 달라고 해서 집을 떠납니다.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간 순간부터 아버지는 괴로워하며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립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밭에 나가서 일만 합니다. 아버지가 큰아들을 보며 어떤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일하는 것도 좋지만 집 나간 둘째 동생을 좀 찾아보지.’ 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교회 출석 잘하고, 십일조 잘 드리기만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더욱 간절하게 바라시는 바는 복음의 소식을 듣지 못해 죽어가는 탕자인 동생을 찾아 집에 데려오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간절한 사랑을 전해달라는 아버지의 뜻입니다. 집에서 잘 지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잃어버린 동생을 찾는 일은 더욱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땅끝까지 이르러 하나님의 증인이 될 사명이 있습니다. 작은 아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요구하는 바는, 동생을 사랑하고 다독거려주고 위로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세상에서 험하게 살아 오신 분들, 신앙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하신 분들이 여기 함께 있습니다. 또 5년, 10년 하나님 먼저 알고 교회에서 중직을 맡아 계신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아들인 중직자들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돌아온 하나님의 자녀들, 잃어버렸던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하나님 사랑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교만한 사람은 사명도 깨닫지 못하고 계명도 알지 못합니다. 내가 지금껏 30년, 40년 다니면서 이 교회를 지켜왔는데, 내가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는데 하시며 권리를 주장하고 싶으십니까?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명 없는 사람의 주장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사명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명을 감당할 때 그 속에 숨겨놓으신 엄청난 축복의 보화를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만은 이 땅에 하나님께서 숨겨놓으신 감사와 기쁨의 축복도 누리지 못하게 할뿐더러 하늘에서 받을 상급도 발견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할 수 있다고 용기 주시는 일에 대해 스스로 못하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기준일 뿐입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말라는 하나님 음성에 ‘아멘’하고 일어서서 승리하며 걸어가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축복받은 주님의 자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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