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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3대 필수적인 신앙 (막 15: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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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한규 목사

<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의 힘 >

지난 화요일 교회 중앙 통로 계단에서 새로 만든 교회 로고 글자를 보면서 내려오다가 발을 접질리었습니다. 극심한 고통과 함께 몸이 오들오들 떨렸습니다. 밤에 집에 왔는데 다리의 통증 때문에 잠이 잘 오지 않아서 약 2시간 동안 뒤척이다가 새벽 2시 반쯤에 일어나 교회로 향했습니다. 힘들게 차를 타고 와서 교회 계단 내려오는데 힘이 들어서 몇 분이 걸렸습니다.

절뚝거리면서 간신히 강단에 서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새벽 기도를 마치고 생각했습니다. “뼈에 금이 갔나? 병원을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 상태로는 3-4주간 정도는 불편하게 지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침 8시 조금 넘어 집에 돌아와서 식사를 하려고 준비하는데 발의 통증 속에서도 마음에 갑자기 감사한 마음이 넘쳤습니다. 더 큰 사고 만나지 않고 그만한 것이 감사했고, 아이들이 다치지 않고 제가 다친 것이 감사했고, 오른발을 다치지 않고 왼발을 다쳐서 그나마 운전이라도 할 수 있어서 감사했고, 오른발만 가지고 운전할 수 있도록 자동변속 되는 차를 가진 것도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수록 감사하니까 마음이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리고 기쁘고 편안한 마음으로 아침 식사 후에 밤에 자지 못한 분량까지 4시간을 한꺼번에 잤습니다. 자고 일어났더니 거짓말처럼 그 심한 통증이 거의 사라지고 그런대로 걸을 만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제가 감사하면서 기뻐할 때 기적의 치유제인 엔돌핀이 무섭게 흘러나온 것 같았습니다. 그날 감사와 기쁨이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 것인지 다시 한번 작은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입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 중에서 보이는 축복보다 보이지 않는 축복이 훨씬 크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가끔 기도하면서 이런 내적인 하나님의 질문을 받습니다. “이 목사야! 만약 내가 큰 교회 목사라는 명예를 주고 너의 자녀를 지켜주는 복을 주는데, 만약에 둘 중의 하나를 희생해야 한다면 어느 것을 희생할래?” 그때 저는 즉시 답합니다. “하나님! 큰 교회 목사가 되지 않아도 좋사오니 자녀들의 건강과 신앙만은 꼭 지켜주세요. 학교 성적이 나빠도 좋습니다. 좋으면 더 좋고요.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해도 좋습니다. 가면 더 좋고요. 돈 많이 없어도 좋습니다. 있으면 더 좋고요. 그러나 다른 것은 다 없어도 저희들의 생명과 신앙만은 지켜주세요.”

사실 자녀가 건강하게 잘 자라주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지금 각종 사고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방에서 교통사고, 유괴사고, 지하철 사고, 화재사고, 등산사고 등으로 죽고 불구가 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우리는 항상 감사하고 만족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추어진 축복을 보는 시야가 열리고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모습이 부족해도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신앙의 원리에 따라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 앞에는 누구보다도 복된 길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 성도가 가져야 할 3대 신앙 >

오늘 본문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자신의 무덤에 장사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몇 가지 바른 신앙의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할까요?

1. 공개적인 신앙

본문 42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은 안식일 전날로서 안식일을 준비하는 예비일이었습니다. 그리고 34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당시 시간으로 제 9시, 오늘날의 시간으로 오후 3시에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안식일이 되고, 안식일이 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십자가 밑에 있었던 여인들은 “누가 빨리 예수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서 장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체를 내리려면 빌라도의 허락을 맡아야 하는데 예수님의 12제자들은 다 도망가 버려서 아무도 빌라도에게 찾아가 탄원할 사람도 없었고, 힘이 없는 여인들은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오후 4시가 되고, 오후 5시가 되어도 아무도 빌라도에게 찾아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막 해가 지고 있을 때 그 장면을 보면서 더 이상 침묵하기 힘들었던 한 숨은 제자가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했습니다.

본문 43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그때의 무거운 침묵을 깨고 한 사람이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존귀한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70명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산헤드린 공회는 당시의 입법, 행정, 사법부를 총괄하는 최고 의결기구로서, 그 공회원은 오늘날의 국회의원보다 훨씬 막강한 권력을 가졌습니다. 그처럼 높은 신분을 가진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소식이었습니다.

물론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가기까지는 많은 갈등과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그 앞에서 울고 있는 여인들을 생각하면 당장에 빌라도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자신이 예수님의 은밀한 제자라는 것이 알려지면 그때까지 쌓았던 자신의 부와 권력과 명예는 순식간에 물거품이 될 수 있고, 자칫 잘못하면 정치적 모함을 받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8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그는 주님의 제자였지만 자신의 신분과 위치를 생각해서 그 사실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도 그가 스스로 감동되어 자신을 공개하기까지 그 사실을 끝까지 감추어주셨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으실 때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재판을 받으려면 주님의 은밀한 제자들을 다 공개할 수도 있었습니다. “내 제자 중에는 공회원 중의 하나인 아리마대 요셉도 있다. 헤롯 왕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도 내 제자이다(눅 8:3). 니고데모도 밤에 나를 찾아와 진리에 대해 물었었다!”라고 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실을 스스로 공개하기까지 끝까지 감추어주셨습니다.

주님에게 있어서 사람은 ‘무엇을 얻는 대상’이 아니고 ‘무조건 주는 대상’이었습니다. 주님은 신앙을 강요하지 않았고 자발적인 신앙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신앙을 공개하기까지 기다려주셨습니다.

그처럼 아리마대 요셉은 주님의 제자였지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주님의 제자임을 공개할만한 믿음은 없었기에 주님의 고난을 그냥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의 마음은 점차 감동으로 울렁이고 있었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시면서 끝까지 십자가를 순순히 받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이 메시아라는 믿음이 커졌습니다.

게다가 당시에 십자가형은 가장 고통스런 형벌이었기에 아무리 악한 반역자라도 그 고통을 경감해주기 위해서 마취제로 쓰는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게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대속의 고통을 당하시기 위해서 그 포도주까지 거절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리마대 요셉의 믿음은 더 커졌고,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시는 한 마디, 한 마디는 그의 믿음을 더욱 크게 했습니다.

결국 그 믿음이 자신의 명예와 권력에 대한 추구를 이기고, 두려움을 이겨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처럼 믿음이 자라면 자신의 신앙을 공개하는 영적인 커밍아웃(Coming out)이 반드시 있게 됩니다.

이제 우리도 아리마대 요셉처럼 우리의 신앙을 공개해야 합니다. 신앙을 공개하면 행동에 불편이 생기지만 그래도 용기 있게 신앙을 공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변화되고, 조금이라도 더 남에게 영향력을 끼치게 되고, 믿음의 확신이 커지게 되고, 신앙의 축복과 신비와 묘미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약 10년 전에 제가 2년 동안 MBC 신우회를 맡은 적이 있는데, 그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하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사실 직장에서 보통 각오를 하지 않으면 신우회 활동을 하지 못합니다. 조금만 잘못 행동해도 “믿는 사람이 왜 그래!”라고 하니까 남보다 훨씬 더 잘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성도라는 것을 숨깁니다. 그러나 숨기면 직장생활은 편할지 몰라도 영혼은 불편해지고, 사명을 잃어버린 불행한 인생이 됩니다.

우리가 신앙을 공개하면 물론 힘든 일도 생기겠지만 좋은 일이 훨씬 더 많이 생깁니다. 신앙을 공개하면 조금 더 책임적인 성도가 되고, 조금 더 성숙하게 됩니다. 또한 그 모습을 보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전도를 받게 되고, 이미 믿고 있었던 사람도 자기의 신앙을 담대히 공개해서 진실한 신앙 친구를 얻게 됩니다.

가끔 보면 자기 성격을 자기가 알고, 그 변화되지 못한 성격 때문에 오히려 주님을 욕되게 하고, 교회를 욕되게 할까봐 자기의 신앙을 감추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한편으로는 이해를 합니다. 만약 제가 “이제 우리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캠페인을 벌입시다! 이제 우리 자동차 뒤에 ‘예수 믿으세요!’라는 스티커를 다 붙이고 다닙시다!”라고 제의하면 그 스티커를 차에 붙이고 싶은 분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옛날에 한 선교단체에서 “십자가의 사랑만이!”라는 물고기 모양의 스티커를 붙이는 운동을 펼쳤습니다. 어느 날, 한분이 그 선교단체의 집회에 갔다가 “한국을 변화시키자!”는 말씀에 감동을 받아서 그 스티커를 붙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분이 그 스티커를 슬쩍 떼면서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스티커가 얼마나 무서운 고문도구인지 모릅니다.” 그 스티커 때문에 속도도 내지 못하고, 끼어들기도 못하고, 열 받는 일이 너무 많아서 못 참고 떼어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자기 성격을 알고 예수님과 교회에 누가 된다고 자신의 신앙을 공개하지 못하는 사람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신앙을 공개하면 조금이라도 더 자기의 성격을 바꿀 기회가 많아지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성격을 잘 다듬을 수 있는 지혜와 능력도 주실 것이고, 세상에 영향을 주는 삶을 살게 되면서 신앙생활의 묘미와 행복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진실한 신앙생활이 되는 순간은 바로 우리의 신앙을 공개할 때부터입니다. 이제 편한 마음으로 신앙을 공개해 보십시오. “제가 교회 다녀서 술을 못합니다!”라고 하면 친구도 끊기고 거래도 끊길 것 같지만 그런 모습이 오히려 신뢰를 주어서 오히려 더 진실한 친구가 생기고, 더 진실한 거래가 트이게 될 것입니다.

2. 내세적인 신앙

본문에서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담대하게 나와 예수의 시체를 요구한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장례라도 잘 치러드려야 하겠다는 동정적인 마음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른 유대인들과는 달리 강한 메시아 신앙과 내세적인 신앙을 가졌습니다. 본문 43절 하반부 말씀에서 그에 대해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그는 원래 내세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의 돌아가시는 장면을 보면 메시아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렇다면 무엇인가 예수님이 죽으신 것으로 모든 상황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부활의 믿음과 소망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영생 천국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면 얼마나 삶이 달라지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도 내일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면 비범한 삶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됩니다. 그때 삶의 여유가 생기고, 넉넉한 마음이 되고, 이 땅의 것에 연연하지 않게 되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 땅의 왕국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철장권세를 가지고 흰 말을 타고 와서 초인적인 능력을 통해 수많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로마를 물리치고 옛날의 다윗 왕국보다 더 큰 대 제국을 건설하는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 군중들을 거느리기는커녕 작은 개척교회 정도밖에 목회를 하지 못하고 있었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흰 말은커녕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을 도저히 메시아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예수님이 붙잡혀 끌려 다니는 모습을 보고 군중들도 “진짜 메시아라면 저렇게 힘없이 끌려 다닐 리가 없다! 가짜다! 우리가 속았다!”고 해서 결국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유대인들과는 달리 아리마대 요셉은 이 땅의 왕국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진짜 하나님 나라는 칼과 창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 이루어지는 나라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힘없이 끌려 다니는 모습과 십자가에 달리시는 모습을 보면서 더 믿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 현세적인 신앙을 가진 것과 내세적인 신앙을 가진 것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의 성공에만 관심을 가지면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에 대못을 박게 되고, 결국 불행한 자리에 서게 됩니다. 반대로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면 언제나 변함없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결국 이 땅에서도 풍성한 축복과 행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땅에서 성공하지 말아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도 아리마대 요셉처럼 성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와 우리 자녀 가운데 재벌도 나오고, 국회의원도 나오고, 유능한 전문인들도 많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리마대 요셉처럼 항상 내세적인 신앙을 가지고 천국에서 하나님 앞에서 기쁘게 설 수 있는 때를 항상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3. 헌신적인 신앙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건네받는 허락을 받고 어떻게 합니까? 본문 46절 말씀을 보십시오.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요셉은 빌라도의 허락을 받자마자 시체를 싸는 가장 값비싼 장례용품인 세마포를 사고, 예수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다가 그 세마포로 싸서 자기가 준비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안치했습니다.

당시 최고로 값이 나가는 무덤은 ‘바위 속에 판 무덤’입니다. 그 무덤 입구로 들어가면 비교적 넓은 공간이 나오고 그 공간에는 시신을 염할 수 있는 대리석 판이 있었고 그 주변으로 가족들을 매장할 수 있는 소규모의 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바위 속에 판 무덤은 돈이 많고 지체가 높지 않으면 일반 사람들은 그 무덤을 구입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이 오랫동안 준비한 값비싼 무덤을 내어드릴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아리마대 요셉은 유대 공회원이었기 때문에 유대 율법과 구약 성경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구약에 있는 메시아와 관련된 구절을 죽 음미해 보았습니다. 특별히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유사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묘사하다가 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그는 메시아가 부자의 무덤에 장사된다는 그 구절을 기억하면서 자기의 무덤을 예수님을 위해 바치기로 작정하고 자신의 새 무덤을 아낌없이 내어드렸습니다. 그처럼 부활과 영생을 믿는 내세적인 신앙은 반드시 헌신적인 신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만약 아리마대 요셉에게 천국 소망이 없었다면 어떻게 자신이 힘써 준비한 값비싼 무덤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의 사두개인들은 돈과 권력을 가진 성공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최소한의 종교적인 의무만을 이행하며 하나님을 믿었고, 현재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그것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때에 우리는 이 땅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를 준비하며 우리는 떠나는 연습을 잘해야 합니다.

내가 어차피 붙들 수 없는 것을 붙들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반면에 내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위해 내 생명과 내 삶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세상적으로도 누구보다 성공한 사람이었지만 그 성공의 열매를 주님께 드림으로 신앙적으로도 가장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돈도 열심히 벌고 성공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함으로 신앙적으로도 성공해야 합니다. 우리 교인들은 선교를 필생 사명으로 생각하고 “나는 선교하기 위해 돈을 번다!”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요삼일육선교회(John316 Mission)에서 저의 말씀사역을 하는 홈페이지가 개편된 지 벌써 4년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메일 시스템을 갖춘 새로운 홈페이지로 개편하려고 작년 여름에 개편을 시도했습니다. 누군가 한분이 홈페이지를 개편하라고 목돈을 헌금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개편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돈을 대부분 선교비로 돌렸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미션퍼블릭 사역을 하면서 책 출판을 계획했을 때 누군가 책을 출판하라고 역시 목돈을 헌금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책을 출판하지 못하고 현재까지는 인터넷 파일 사역만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돈도 선교비로 돌렸기 때문입니다.

요즘 미션퍼블릭에서 제가 했던 새벽설교를 정리하여 설교파일 판매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꽤 많은 수입을 매달 주시고 있지만 저는 한 푼도 그 돈을 제 주머니에 넣어 개인적으로 쓰지 못했습니다. 역시 여러 경비와 선교비로 돌렸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자기의 것을 내놓지 않으면 선교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지난 1월에 몽골의 임병철 선교사님이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갈 때 “제가 더 필요한 것이 없습니까?”라고 묻자 임병철 선교사님이 어렵게 얼라이언스 성경 훈련센터(ABTC, Alliance Bible Training Center)에 승합차량이 한 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때 선교사님에게 말했습니다. “선교사님! 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다만 제가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도 계속 홍보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선교사님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이 어떻게 한번 해봐요.” 저도 아내처럼 어떻게 한번 해보고 싶지만 제가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그래도 불가능한 일은 없다는 생각으로 후원금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제 6월에 컴퓨터 교사를 몽골에 보내면서 그 후원금을 보낼 예정입니다. 아직까지는 많이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누군가 한 사람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 한 사람이 심지어 불을 붙이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헌신은 결코 작은 힘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헌신하면 엄청난 일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헌신하면 비전은 이루어진다!”는 꿈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나 한 사람의 믿음의 헌신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선교와 구제가 이루어지고, 주님의 사역 공동체가 힘을 얻게 되고, 내 신앙이 자라게 되고, 천국의 상급이 있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아리마대 요셉의 헌신을 보고 니고데모도 헌신한 것처럼 내가 헌신하면 내 주변 사람들도 헌신하게 됩니다.

< 좋은 신앙을 전염시키십시오 >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가 세상의 영향을 받아 사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가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고 사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신앙을 공개하고 헌신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 영향이 미쳐지게 됩니다.

실제로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의 신앙을 공개하고 헌신하자 그 모습에 영향을 받고 바로 또 한 사람의 공회원이 자기의 신앙을 공개하고 헌신했습니다.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8-39절 말씀을 보면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로부터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자기의 무덤에 장사하려고 하자 일찍이 밤에 주님을 찾았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장사 지내는 일에 함께 참여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좋은 신앙은 전염이 됩니다. 기도할 때 보면 방언기도도 전염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누군가 옆에서 “라라라라....”하고 방언을 하면 옆에 있는 사람도 같이 “라라라라....”하고 따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잘 모르지만 귀신을 잘 쫓는다는 사람들은 주로 ‘시옷(ㅅ)’자와 ‘키읔(ㅋ)’자가 들어가는 방언을 많이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 그런 방언을 하면 옆에 있는 사람도 비슷한 방언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얼마 전에는 새벽기도 때에 중국어 억양이 담긴 방언을 하는 자매가 며칠간 참석해 제일 앞자리에 앉아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며칠간 중국식 방언이 귀에 들리니까 저도 기도할 때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가끔 중국식 억양이 입에서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처럼 사람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주변 사람들과 서로 영향을 끼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 한 사람의 헌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내가 기도하면 내 주변의 교우들도 기도하게 됩니다. 내가 변하면 내 친구와 이웃도 변합니다. 내가 감사하면 내 구역 식구들도 감사합니다. 내가 겸손하면 내 이웃들도 겸손하게 됩니다. 내가 사랑하고 용서하면 교회에 사랑과 용서가 넘치게 됩니다. 내가 성령 충만하면 내 이웃도 성령 충만을 사모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느 공동체에 가든지 좋은 일을 일으키고, 좋은 생각을 전파하고, 좋은 영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 앞장서서 헌신해야 합니다. 당시 아리마대 요셉의 헌신적인 행동이 수많은 여인들과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얼마나 큰 격려가 되었겠습니까? 우리는 아리마대 요셉처럼 우리가 그동안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을 주님을 위해 자랑스럽게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헌신이 없으면 하나님의 은혜도 없을 것입니다.

왜 사막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습니까? 원리는 단순합니다. 사막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수증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막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듯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불평과 원망의 모래바람만 일어나면 은혜의 단비는 결코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것을 포기하고 피와 땀과 눈물의 수증기를 하늘로 올려드리면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가 넘치도록 주어질 것입니다.

항상 최선의 땀을 흘려 열매를 얻고 그 열매를 기쁘게 주님을 위해 바칠 수 있는 이 시대의 아리마대 요셉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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