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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에게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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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최종천 목사
 
오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고난을 이루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우리는 한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보내며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묵상하고 그 고난에 동참하게 됩니다. 주님과 또 그 분을 따르는 우리의 영광은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게 되는 자기를 부인하는 헌신의 삶이라는 것을 마음에 되새길 것입니다.
오늘 장면은 특별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예루살렘 백성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그리고 그들의 웃옷을 벗어 예수님 앞에 그리고 길 앞에 깔며 그들은 ‘호산나’라고 외치며 찬송하는 내용을 그린 장면입니다.

오늘 이 종려주일을 생각할 때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나시고 나사렛 비천한 동네에서 자라셨지만 결국 그분의 사역을 이루시고 이 지상사역의 마지막 계곡인 고난의 순간에 들어설 때에 왕으로서 환호를 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역사는 그 순리를 따라 정한 순서대로 한 단계씩 밟으며 이루어져 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섭리의 정한 단계를 이루는 것은 자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씨앗을 뿌리게 되면 그것이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씨앗이 생기게 되어 또다시 새로운 생명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반복의 과정은 우리에게 자연의 섭리를 예측할 수 있게 만들고 하나님의 섭리를 돌아볼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삶에서 우리 삶을 섭리로 인도하고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오해하는 경우가 있음을 봅니다. 혹은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그릇된 고집이나 오류적 해석에 빠져 하나님을 잘못 알기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루살렘 백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을 받으러 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오히려 영광을 기대하고 왕의 찬송을 하되 구속을 성취하는 영광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오히려 저주하고 자신의 뜻에 위배 되었다고 비난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뜻에 대하여 무지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진 처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은 과연 누구신가? 하는 주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사역에 대한 바른 지식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에 대하여 환호하는 군중 그리고 이후에 그들이 폭도로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변화무쌍한 인간들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기대와 실망, 환호와 좌절, 질시와 저주의 어우러짐 속에서 그들의 길을 가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와 같은 복잡한 주변 여건 속에서도 마침내 구원의 꽃을 피워내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오직 그의 능력과 선한 자비와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는 성도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기쁨과 생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특별히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성찬의 예식을 가집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종려주일에 있었던 내용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과연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오늘 성경에서 첫 번째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자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 어떤 것 하나 우연히 된 일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하는 구도 속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섭리가 이루어지는 방법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어떤 일을 베푸시려면 먼저 말씀하시고 그 말씀이 실현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기에 성경말씀을 중요시하게 되며 되어질 일을 바라보고 그 성경 말씀에 내 삶의 기준을 정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획하셨습니다. 구약에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미련해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는 전혀 새로운 것이 없이 정하신 말씀을 따라 그 일을 진행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스가랴 9장 9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미 새끼 나귀를 타고 그의 영광의 유업을 위해 입성하신다고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직접 보여주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행한 가장 큰 사역은 병든 자를 고치고 자연을 정복하고 귀신을 쫓은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기록된 것을 우리들에게 실제로 이루어 성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말씀의 성취에 가능성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우리들에게 격려와 경고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분들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며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 고통이 임할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격려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현실적인 실현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현실에도 실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에 불가능해 보이고 대단히 어려워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우리들의 삶 속에 살아 역사하는 능력이 있음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현하려고 애를 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애를 쓸 때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새로운 생명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말씀대로 된다는 것은 말씀에 성취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의 위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대로 세상을 정복하시되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김으로 이 세상을 정복하셨던 것입니다. 섬김의 극치로 그들을 위하여 목숨을 십자가에 죽음으로 내어놓으셨던 것입니다. 왕으로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나귀새끼를 타고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권세를 주셨을 때 세상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권세를 주셨을 때 섬기는 자들이 되어 그들을 높이 세우는 은혜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어쩌면 말씀대로 사는 삶이라는 것은 이같이 우리들에게 겸손을 요구하고 낮아짐을 요구하고 괜한 손해를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섬기는 자가 큰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인 것입니다. 온 세상을 얻는 자는 온 세상에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온 세상을 가장 낮은 위치에서 섬기는 겸손한 자의 능력임을 봅니다. 또한 말씀의 성취라는 것은 그 말씀에 비추어 보아 날마다 우리의 삶을 수정하는 작업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중요한 것은 내가 부족하고 잘못되었을 때 언제나 주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로 우리를 수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범죄한 인생, 빗나간 인생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여 우리 자신을 돌이킬 때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조금만 위치가 높아져도 군림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듭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광의 자리에 오르는 사람들은 높아질수록 겸손해지는 것을 봅니다.

저는 우리교회 성도님들을 볼 때 참 마음에 감동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분들은 ‘능력도 있고 겸손한 분들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말 세상에서 나름대로 이룬 일들이 큽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참 마음에 감동을 받게 됩니다. 재능과 능력과 노력은 있으되 겸손치 못한 사람의 길은 한계가 있음을 늘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말씀의 성취를 믿고 산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성취케 하여 겸손한 자로 세우신다는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의 자세로 섬기는 자의 자세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6절을 보면 제자들이 가서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하십니다. ‘너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매인 나귀 새끼가 있는데 보고 풀어서 내게로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만약 누가 묻거든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의아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가서 그 일을 실행했던 것을 봅니다. ‘가라’ 갔습니다. ‘가져와라’ 가져 왔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한 제자들, 예수님의 말씀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믿음생활을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거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의심 없이 주의 말씀이 이루어짐을 믿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대로 따르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라 축복의 백성입니다. 결국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를 때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가 이 자리에 임하는 것을 봅니다.
나귀의 주인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왜 요구했을 때 값도 받지 않고 그냥 주었겠습니까? 결국 주님의 말씀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순복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을 봅니다. 나귀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순복하여 주님을 태우고 가는 결과 구속사에게 중요히 등장하는 사물로 나타나게 됩니다. 순종이란 말씀에 대한 순종이고 하나님 나라에 거룩한 유업에 우리를 동참하게 만드는 것이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말씀의 성취를 믿으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주의 역사를 이루는 은혜의 백성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바로 우리들에게 있어서 우리 주님은 영광을 받으실 우리들의 구주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주 중요한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많은 사람이 겉옷을 벗어서 길 위에 깔며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흔들며 ‘호산나’라고 찬송합니다. 겉옷을 펴서 길 위에 깐다는 것은 왕에 대한 예우입니다. 백성들은 그들을 구하러 온 왕으로 알고 환영했습니다. 그들은 왕의 대접과 왕의 환호를 예수님께 보냈던 것입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기원과 경배를 동시에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구하노니 우리를 구하소서. 우리가 간구하노니 우리를 구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무리가 소리를 질러 말합니다. ‘우리가 구하오니 우리를 구원하소서. 다윗의 자손 예수이시여 우리가 구하오니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들의 마음에 소망을 심어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환호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이 아주 중요하고 기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마음의 상태를 가진 사람도 그 마음이 변하여 주님을 경배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영광을 받으실 주니 우리 마음이 어떤 과거의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가 어떤 과거의 마음의 상태를 이루고 있어도 주님은 그 마음을 바꾸어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볼 때 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기쁨이 임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 성도들이 가는 곳곳마다 우리 성도들을 기뻐하고 반겨주는 백성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변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듯 하나님의 백성을 반겨주는 백성들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 생각을 하면 우리 성도님들은 너무 고귀하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세상 어떤 곳에서 무엇을 하던 어떤 고통과 아픔이 있건 우리 하나님께서 주변인의 마음을 바꿔 새로운 은혜와 영광을 입혀주실 것입니다.

왕의 권세가 거하는 곳곳마다 시간마다 새로운 소동이 일어납니다. 10절을 보니 ‘온 성이 소동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세상을 뒤집어엎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곳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임하는 곳마다 온 세상이 소동할 정도로 큰 영향이 이루어지며 변화의 용솟음이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성도들의 마음에도 날마다 이런 격정이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감격, 내 마음에 소동이 있어야 하며, 생활에 소동이 있어야 하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움직일 줄 몰랐던 고인 물 같은 우리의 마음의 상태가 날마다 그리스도로 인한 마음의 감격이 있어야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합니다.
왕의 권세가 있는 곳에는 이와 같은 진동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환호를 받으신 예수님, 영광을 받으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고통 같이 보이지만 궁극적인 영광의 자리에 이름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갈 때 현재의 고난은 장차 다가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봅니다.
마라톤 선수들은 전력을 다하여 질주 합니다. 그들에게는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골인 지점에 우승하여 도착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우승의 목표가 있기에 달려가는 도중 힘들다고 느껴지는 것들을 극복하며 그들은 영광의 면류관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집념을 이루게 하고 고통을 잊게 하고, 순간의 고통을 넘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의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시므로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영화롭게 하시는 분임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한주간의 고난을 거쳐 다음 주간의 부활의 주일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것처럼 우리 성도님들은 고난의 터널을 넘어서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그릇된 기대와 실망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시는 주님을 봅니다.
오늘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보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우리를 구하옵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는 그들의 모습, 그들의 기대는 주님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영화로움을 받기위하여 가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엉뚱한 기대를 하여 그들에게 기쁨을 주리라고 기대합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도성은 한마디로 말하면 정치적인 도성입니다. 그 곳을 손안에 넣으려고 수많은 갈등과 아픔이 있는 힘겨루기의 터전입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정복자가 있었고 우리가 잘 아는 알렉산더대제도 예루살렘을 정복했던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당시는 그 시대의 강자인 로마가 점령하여 그들은 로마의 지배하에 핍박을 받고 있었던 때입니다. 그들의 기대는 당연히 누군가가 더 강한 사람이 나타나 그들에게 정치, 경제, 문화, 빵, 세금의 문제를 해결하여 자유롭게 해결할 구속자 메시아를 갈망했던 것입니다.

한 인물이 나타납니다. 병든 자를 고칩니다. 자연을 정복합니다. 귀신을 쫓습니다. 각종 기적을 일으켜 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합니다. 그를 뒤쫓는 무리들이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볼 것도 없이 깜깜한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을 바라보니 이제는 그들에게 그분은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정치적인 고통, 경제적인 고통, 빵의 문제, 세금의 문제, 모든 고통을 해결해 줄 메시아가 왔다고 믿고 그들의 모든 소원을 이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요청하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방법과는 상관없이 그들은 그들의 방법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방법은 그들의 방법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나라는 그들이 원하는 세상의 분왕이 되어 이루시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런 실망 결국 주님께서 그들의 원함을 이루어주지 못했을 때에 대한 실망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더 격분하여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환호하던 백성들이 이와 같이 변화무쌍하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사람으로 변했던 것은 그들의 기대의 꿈이 깨어진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서는 결국 그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여건이 어떠하건, 상황이 어떠하건, 사람이 어떠하건 예수님께서는 그의 갈 길을 가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해도 우리가 주님께 어떻게 대하여도 주님은 결국 그 가실 길을 가시는 분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맞추어서 어떤 길을 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길에 맞추어 가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 것보다 주님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마음에 생각하고 주의 역사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선은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의 뜻을 이룰 때 우리 마음의 은혜의 역사에 동참을 이루게 될 때 그것이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요, 사랑이요, 축복임을 알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젠가 해질녘에 언덕을 올라갔던 적이 있습니다. 언덕을 오를 때 사람들은 모두 보통 이렇게 허리를 숙이고 올라가게 되니 허리를 숙이면 시야도 앞으로 고정이 되고 그러니까 볼 수 있는 범주가 좁아지게 됩니다. 바로 눈앞과 땅만 보이게 되니 한참 가다보면 좀 답답한 마음이 들잖아요. 가파를수록 땅만 보이죠. 허리가 더 굽어지니까. 돌아서서 뒤를 보니까 넓은 세계가 안전에 전개되는 것 같아요. 참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제 시야의 일직선상에 키가 큰 나무들이 몇 그루 서 있었습니다. 아직 잎이 나지 않은 나무입니다. 여러분 요새 나무들 보면, 잎이 나지 않아서 앙상한 가지들이 있죠. 봄이 되면 물이 올라서 막 파릇파릇해지지만 아직은 아마 가지만 있는 나무인데 그 가지만 있는 나무들이 하늘의 면을 잘라서 구성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 나무 사이에 걸려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낮에 하얀 달이 걸려있더라고요. ‘아! 달이 걸려있구나.’라고 생각하고 조금 더 올라가서 또 뒤를 보니까 그 달이 나무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중천에 떠 있는 것 같아요. 달이 움직인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 짧은 시간에 달이 그만큼 움직이겠습니까? 제가 조금 더 움직여 위치를 바꾸니 그 달이 마치 움직여서 제 시야에 또 다른 모습으로 있는 것이겠지요. 잠시 그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저 달은 분명히 제 자리에 있을 터인데’ 움직여 봐야 얼마나 움직이겠습니까? 지구가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움직이겠습니까? ‘내가 조금 위치를 바꾸니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시고, 주님은 똑같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주님은 우리에게 똑같은 은혜를 베푸시는데 문제는 내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주님의 시야로부터 멀어지고, 주님의 은혜의 자리로부터 멀어지고, 때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언제나 같이 주시는데 우리는 주머니를 닫기도 하고, 열기도 하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주의 축복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주의 축복이 우리들에게 담겨질 곳 없어 그냥 스쳐가기도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고통스러운 것은 주님이 축복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주님의 축복을 거절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내 마음이 상하는 것은 주님이 위로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위로를 거절했고 내가 그 위로를 받지 않을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조금 더 가다보니 해가 져서 껌껌해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달빛이 흰빛에서 노래지더라고요. 왜 낮에는 하얀데 밤에는 노랄까? 달빛이 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주변이 깜깜해지니까 그 달빛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주님의 은혜는 같지만 언제나 우리들이 주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달빛처럼 언제나 우리들의 마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시고, 작은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는 동일한데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 마음이 열리고, 조금 열리고 그 차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동일해요. ‘하나님 내게 큰 은혜를 주십시오.’ 하는 기도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내가 언제나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마음껏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되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가 옳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저는 주님은 변함이 없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주님은 무엇인가? 변함없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변함없는 주님의 한없으신 은혜를 날마다 누리는 기쁨의 성도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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