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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기본 ; 구원 얻었습니까? (고전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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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윤성진 목사

지금으로부터 93년 전인 1912년 4월 14일 세계 최대의 호화여객선이었던 타이타닉 호(號)가 처녀항해를 하다가 대서양에서 빙산과 부딪쳐서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1만 6천 톤의 거대한  배가 22노트의 속력으로 항진(航進)하다가 침몰되었는데 그 배에는 구명대가 승객 수의 반 밖에 구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희생된 사람이 1,517명이나 되었습니다.

승객 가운데 존 하프라는 목사님도 타고 있었는데 그는 전도자요, 유명한 부흥사요, 설교자였습니다. 하프 목사님은 시카고에 있는 무디교회에 설교하러 가던 중에 이런 참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프 목사님은 배가 파손될 때에 물에 떠 있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 썼습니다. 그리고 옆에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한 청년, 겨우 물에 떠 있는 한 청년에게 헤엄을 쳐 갔습니다.
“젊은이, 구원받았는가?” 그러자 청년은 “아니요.”라고 하는데 파도가 확 덮쳐서 두 사람 사이가 대화를 할만한 거리가 안 되게 멀어져 버렸습니다. 하프 목사님은 다시 헤엄쳐 가서 또 물었습니다.
“젊은이, 구원받았는가?” “아닙니다.” “젊은이, 구원받아야 하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믿기만 하면 되네. 젊은이 구원받았는가?” “아직 못 받았습니다.”
이때 큰 파도가 덮쳐서 하프 목사님을 삼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청년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구원 받았는가?”하는 하프 목사님의 음성이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두 주간 후에 청년은 뉴욕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신앙간증을 했습니다.
“저는 존 하프 목사님이 죽어 가면서 전도한 마지막 구원자입니다.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 겨우 말할 수 있는 그 상황 속에서 ‘젊은이, 구원받았는가?’ 하는 그 절박한 음성,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신 것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네.’하는 이 간단한 메시지 때문에 저는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이렇게 간증을 합니다.”하고 간증을 했습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이 질문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요, 가장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확인시키고 싶은 말은 고린도 교인들의 구원문제였습니다.
목회자가 병실에 찾아가서 임종 직전에 있는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은 질문이 있다고 하면 구원에 관한 질문입니다. 제가 다시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았습니까? 지금 세상을 떠나도 천국 갈 자신이 있습니까? 이 문제만은 확실하게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어지는 사람은 다시 한번 확인하고 가장 귀한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성화의 구원을 이루어 나갈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누리면서 살다가 천국에서도 영광스러운 구원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 이 문제가 희미한 사람은 구원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쁨과 감격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바로 깨닫고 구원받은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삶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감격의 기쁨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처음부터 천국 갈 기대도 안 했으니까 천국 못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알고 천국 갈 것을 기대하면서 신앙생활 했는데 천국에 못 간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이고 얼마나 한스러운 일입니까?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장 9절에 보면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결국, 믿음의 종착역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영혼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바로 믿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구원이 가져다주는 영육 간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우리는 다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넉넉하게 들어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먼저 ‘구원’이라는 말을 원어적인 측면에서든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만 한미다로 쉽게 말하면 구원이란 회복되는 것입니다. 본래 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물에 빠진 상태에서 물에 빠지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우리는 ‘구조’라고 하지 않습니까?

지난달에는 유난히도 큰 해상사고들이 많았습니다. 16일에는 강원도 삼척 앞바다에서 코리코 303호라는 배가 엄청난 파도와 비바람으로 선체가 두 동강이 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배에는 7명이 타고 있었는데 3명은 숨지고 4명이 구조되었습니다. 70여 명의 사람이 26시간의 사투 끝에 4명을 구조했습니다.

지난 20일에는 북한 수역에서 우리나라 선적(船籍) 파이오니아나야 호(號)가 침몰되었습니다. 선원 18명 중에 4명이 구조 되었는데 베트남 선원 2명과 우리나라 선원 이상민, 박기용 씨 등이 물에 빠져 2시간 동안 표류하다가 지나가던 러시아 상선에 의해서 극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그 추운 날씨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추운 날씨에 그 큰 배가 침몰할 만큼 높은 파도 속에서 2시간 동안 물에 어떻게 떠 있었는지 기적 같은 이야기입니다. 조금만 더 늦게 구조되었다면 그들은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아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조난당해서 물에 빠져있는 사람을 건져 내어서 본래 상태로 돌려놓는 것을 ‘구조(救助)’라고 합니다.   
‘구원(救援)’이란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절망 상태에 있는 사람을 건져서 살려 내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 천국 백성으로 만드는 이것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2. 구원받기 전의 상태

그러면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데 어떤 상태로 떨어졌기에 구원받아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우리를 만드실 때는 아주 완벽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겪는 생로병사, 이별과 눈물, 한숨과 삶의 갈증을 느끼는 사람으로 만들지 아니하고 지복(至福)의 에덴동산에서 살게 만드셨습니다. 이런 상태에 살고 있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데 그것을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사람 사이에 ‘너’하고 ‘나’하고 교제가 끊어지는 것 정도는 별로 큰 일이 아닙니다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 그것을 성경에는 ‘죽음’이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생명 되는 포도나무, 예수님에게서 가지인 우리가 잘려져 나가는 것, 그게 바로 죽이라는 말입니다.

그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잘려나가 보세요. 그 포도나무 가지는 그것으로 생명이 끝납니다. 살아있는 것 같아도, 푸른 것 같아도 죽었습니다. 다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모아다가 불에 태우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포도둥치에서 잘려나간 포도가지처럼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몸으로 말하면 손가락이 손에서 잘려져 나간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잘려져 나간 손가락은 이제 죽었습니다. 그리고 썩습니다. 그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므로 인간이 이런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생명이신 하나님에게서 잘려져서 잘린 나뭇가지처럼, 떨어진 손가락처럼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에베소서 2장 1절 이하에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표현합니다.
3절에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미 허물과 죄로 인하여서 죽었습니다. 이제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파선한 배에서 선원들은 물에 빠졌습니다.

우리들의 신세도 죽은 것과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기 전에는 죽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자기가 죽었다는 것도 모릅니다. 죽어있는 자기의 형편이 얼마나 열악하다는 사실도 모릅니다. 자기를 찔러도, 불에 태워도 알 수 없는 것이 죽은 사람의 상태 아닙니까?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상태가 그렇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지옥이 얼마나 두려운지, 천국이 얼마나 좋은지, 그런 것도 전혀 모르는 처지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 구원의 길이 무슨 길입니까? 믿음의 길입니다.

3. 구원의 길

믿음으로 구원 얻는 길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하나님’이라는 생명에서 잘려나갔습니까?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이 와서 ‘따 먹어도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 같게 된다’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말씀을 믿고 따 먹지 않을 것인가, 뱀의 말을 믿고 따 먹을 것인가, 기로에 섰습니다. 결국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뱀의 말을 믿고 선악과를 따 먹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안 믿은 죄로 선악과를 따 먹고, 따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잘려져 나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안 믿어서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믿기만 하면 살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을 우리에게 허락하셔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기 이전의 상태로 우리를 돌려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믿기만 하면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 믿어서 죽었기 때문에 믿으면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길을 허락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내용이 뭡니까? 무엇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구원 얻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영원히 누릴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우리들에게 다시 살 수 있는, 구원 얻을 수 있는 길을 한 번 더 주셨습니다. 그 구원의 축복도 믿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만드셨던 것처럼 타락한, 범죄한, 죽은 우리들도 믿음으로 그 축복을 회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4. 믿음의 내용

그러면 무엇을 믿으면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까? 오늘의 말씀 1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라>. 이미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전한 그 복음을 들어서 알고 있는데 다시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뭡니까? 바로 1절에 말한 복음입니다. <그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3절에는 바울이 전한 복음은 바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했다>고 했습니다. 누구로부터 받은 것입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복음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했습니다. 그 전한 복음의 내용이 뭡니까?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받아서 전한 복음의 말씀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그 복음의 내용이 뭐냐 하면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인 것입니다. 이것만 믿으면, 십자가와 부활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의 두 기둥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전한 메시지가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다가 핍박당하고, 옥에 갇히고, 순교 당했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들은 순교 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이고, 믿은 것이고, 그것이 바로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을 바쳐서라도 그들은 영생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베드로의 첫 번 째 설교가 이것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3장 15절에도 보면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4장 2절에도 보면 <사도들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道) 전함을 싫어하여 잡아 가두었다>.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4장 10절에도 보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5장 30절에도 보면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복음의 전체요약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에는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만이 구원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철학적이고 학문적이고 아주 유식한 설교를 합니다. 사도행전 17장을 읽어보면 어떻게 그렇게 우주적이고, 인간론, 죄론, 온갖 신학이 다 포함되어 있는 설교를 하는지 아주 철학적인 방법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데 다른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 교회가 세워졌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아덴에서는 교회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실패하고 맙니다. 고린도로 내려 왔습니다. 그는 낙심합니다. 그리고 결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내가 작정했다>고 결심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와 부활이 복음이고 능력인데 그것을 전하지 아니하고 다른 철학적인 것을 전했더니 이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내가 알지 아니하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전하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만 믿으면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내가 죽었는데, 지옥가게 되었는데, 사탄의 종이 되었는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는데 하나님께서 죄 없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그 예수님에게 나의 모든 죄를 다 덮어 씌우셔서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게 하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내가 죽어야 할 죽음을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하시고 나를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 결과로 사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지옥에서 건져서 천국가게 해 주셨습니다.’하고 이 사실을 믿는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이 사실이 확실히 믿어지십니까? 
우리와 동질(同質)인 인간도 아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나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이 사실이 확실히 내 마음에 믿어지십니까? 그리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십자가와 부활이 믿어지면 여러분은 구원받았습니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진리인 것입니다.

부버(Martin Buber)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헤이라 목사님이 베를린에 살고 있는 부버를 찾아와서 시오니즘(Zionism)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역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가는 길에 석탄으로 뒤덮인 ‘검은 길’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에 왔을 때 헤이라 목사님이 멈추어 서서 부버에게 물었습니다.
“우리에게 시오니즘도 참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신앙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부버는 당황한 나머지 말을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물론... 믿지요.”하고 겨우 대답하고 그 순간을 모면했습니다.
헤이라 목사님을 기차로 보내고 돌아오는 부버의 가슴 속에 “당신은 하나님을 믿습니까?”하는 헤이라 목사님의 질문이 메아리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대답은 “물론, 믿지요.” 했는데 그것이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자책(自責)했습니다.
부버는 ‘검은 길’에 왔을 때 “당신은 하나님을 믿습니까?”하는 말이 생각나서 그 길을 도저히 걸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내 신앙은 왜 이 모양인가? 믿느냐고 물었으면 자신 있게 믿는다고 말해야 되는데 나는 확실하게 믿는다고도 말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안 믿는 것도 아니고 내 신앙은 왜 이 모양인가?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이곳을 떠나지 않으리라 하고 그 곳에 서서 명상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내가 왜 이렇게 신앙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가? 하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묵상하고 있을 때 그의 마음을 스쳐가는 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이렇게 희미하게 신앙한 것은 예수님을 3인칭(3人稱)으로 알았기 때문이구나. 2인칭(2人稱)으로 대해야 할 하나님과 예수님을 3인칭으로 대했구나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이야기 속에 나오는 3인칭의 하나님과 예수님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역사상에 있었던 한 인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3인칭의 대상이 아니라 2인칭의 대상입니다.
예수님을 성경 속에 나오는 예수님, 설교 속에 나오는 예수님이 아니라 2인칭으로 ‘나의 죄 때문에 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이 확실히 내 마음에 믿어집니까?  성경 속에 있는 예수님이 아니고 ‘나 때문에’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리시고 그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신 예수님. ‘나 때문에’ 라는 사실이 확실하게 믿어집니까? 
그리고 그 예수님이 죽음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믿어집니까? 이것만 믿어지면 구원받았습니다. 이것만 믿으면 삶이 달라집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나 때문에 나대신 피 흘려 돌아가셨다는 이 사실이 믿어진다면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이것만 믿어지면 헌신, 자동적으로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그 사실이 믿어지는 사람은 첫 번 째 나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이렇게 돌아가셨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살면 되겠습니까? 내 몸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내 삶을 헌신하겠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하는 헌신의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
         
삶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날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으면 신앙의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예수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확실히 믿어지는데도 예수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 안 되어진다고요? 그것은 안 믿기 때문에 헌신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안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까운 것입니다. 안 믿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아니요’ 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 믿어진다면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만 믿으면 이미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일서가 왜 기록되었는가하면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기 위해서 요한일서가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을 한 구절 찾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을 찾아서 같이 읽겠습니다. 이 말씀을 꼭 외우시기 바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아멘>.

짧은 설교 시간이지만 오늘 제가 요약해서 말씀을 드린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 아니고 이미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것이 아니고 이미 옮겼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실, 십자가와 부활이 믿어지면 이미 영생 얻은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이렇게 읽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성진이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성진이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아멘>. 여러분들도 그렇게 한번 읽어보시고, 내가 십자가와 부활을 믿기 때문에 나는 영생 얻었고, 구원받았고, 천국가게 되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바랍니다.

5. 구원의 회의(懷疑)가 드는 이유

이 사실을 믿고 흔들리지 마세요.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말을 굳게 믿고 지키면, 흔들리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간 설교를 들을 때는 믿어지는데 교회 문 밖을 나가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왜 흔들리느냐하면 구원의 시제(時制)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면 믿는 순간에 이미 구원받습니다.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구원은 과거시제(過去時制)입니다. 구원받았다는 말은 신분이 변화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천국 백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한번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구원은 영원합니다.

속을 많이 썩이는 자녀가 있어서 집을 나갔다고 합시다. 하도 속을 썩이니까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소리친다고 해서 자식이 안 되는 것입니까? 호적을 파 버린다고 해서 자식이 아닙니까?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혈연의 관계이기 때문에 영원합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때로는 낙심하여서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하다가 세상 떠나기 전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불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믿습니다. 이게 과거의 구원입니다.     

현재도 우리가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화(聖化)의 구원입니다. 생활의 구원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미래의 구원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화(榮化)의 구원입니다. 장차 우리가 육신도 예수님처럼 변화되어서 영광스러운 천국에서 죽음도 한숨도 걱정도 없는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더불어 영원히 살게 될 그 영광스러운 구원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시제를 모르면 어떤 때는 구원받은 것도 같고, 어떤 때는 구원받지 못한 것도 같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믿음생활 잘하고, 기도생활하고, 말씀대로 살면 구원받은 것 같고, 범죄하고, 기도도 쉬고,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 것 같은 감정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구원은 감정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기반(基盤)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내 감정에다 기반(基盤)을 두면 하루에도 열두 번씩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합니다. 한번 구원받은 것은 영원한 구원이고, 지금은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聖化)의 구원단계이고, 앞으로 영원한 미래의 영화(榮化)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달려가고 있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부잣집에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너무 기뻐했는데 아들을 키워보니까 좀 모자라요. 좀 모자라는 사람을 팔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십 푼이 되어야 하는데 팔 할 정도 밖에 안  되요. 지능이 떨어지고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합니다. 그 아들이 자라서 장가갈 때가 되었습니다. 어느 처녀가 시집을 오려 하겠습니까?
그런데 돈이 많으니까 가난한 집의 처녀를 사다시피 해서 결혼을 시켰습니다. 아내가 아기를 가졌습니다. 온 집안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해산할 때가 되었습니다. 낳고 보니까 아들이었습니다. 집안에 경사가 났습니다. 팔푼이가 밖에서 일을 하고 집에 들어가니까 온 집안이 야단입니다. 야! 이제 너도 아들이 생겼다. 방에 들어가서 네 아내에게 수고했다고 위로도 하고 네 아들도 얼마나 잘 생겼는지 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팔푼이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방에 들어가면서 기대를 합니다. 내가 들어가면 중학생 쯤 되는 내 아들이 “아버지, 이제 오십니까. 저는 아무개입니다.” 하고 인사도 하고 그럴 줄 알고 들어갔는데 방안 들어가니까 그런 애가 안 보여요. 
아기를 낳았다고 아내가 누워있는데 보니까 베개만한 핏덩어리가 누워 있습니다. 아기 어디 있느냐 하니까 핏덩이를 보고 아기라고 합니다. 이게 사람이냐며 “일어나 봐! 아버지 왔어! 네 이름이 뭐냐?”해도 아무런 대꾸가 없습니다. 팔푼이는 너무 실망을 했습니다. 아내를 보고 이것도 아기라고 낳고 누워 있느냐고 일어나라고 야단을 치고는 나왔습니다.
부모님에게 “저것도 아기라고 낳았는지, 말도 못하는 것을 낳았다”고 투덜거리니까 부모가 “야 이놈아! 그래도 너 보다 낫다, 너 보다 낫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팔푼이와 같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재주가 있다고 교회 나오자마자 하나님을 알아보고, 설교를 척척 이해하고, 기도도 유창하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태어나면 어린아이로 태어나는 것이지, 중학생으로, 고등학생으로 바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말 잘 못합니다. 기도 잘 못합니다. 말씀도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날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믿어지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지마는 아직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일단 믿어서 태어났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자라나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믿어지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구원받았습니다. 흔들리지 말기를 바랍니다. 감정에 따라서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비록 말씀대로 잘 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기도도 잘 못한다고 할지라도, 말씀이 이해가 안 된다고 할지라도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줄 확실히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천사를 보내서 지키시고 이 땅에서 필요한 것을 다 채워주시고 장차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상속받을 자로 우리를 준비시키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구원만 자꾸 생각해서 신분만 강조하지 그 특권에 대해서는 누리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고, 환경의 구원, 삶의 구원을 생각하지 못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배를 타고 건너갑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기의 가장 석학(碩學)인 아놀드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는 말하기를 바울이 타고 간 배에 복음만 싣고 간 것이 아니고 현대물질문명도 함께 싣고 갔다고 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에는 그 복음 안에 물질문명과 온갖 축복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 신분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천국에서만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도 물질문명의 온갖 축복을 다 누리도록 되어있는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믿는 나라마다 선진국이 되어 잘 살지 않습니까?
많은 지하자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안 믿는 나라는 지혜가 없어서 얼마나 후진국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복음을 바로 알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우리 생활도 달라져야 되고 우리 삶의 환경도 복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전인적(全人的)인 구원이요,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의 변화 뿐 아니라 그 신분에 어울리는 풍성한 축복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장차 영원한 천국에서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정말 이와 같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지금 세상을 떠나도 천국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된다고요? 믿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믿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기만 하면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특권을 누리게 되고, 그 특권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복음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 정말 감사하고 감격하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서 성화의 구원을 이루어 가면서 영육 간의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도 복되게 살고 주님께서 부르시는 날 영광스럽게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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