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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인의 중심 (마 26:6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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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이용호 목사

몇 일전에 열차를 타기 위해 서울역에 간 적이 있습니다. 제가 역 광장에 앉아 있거나, 또 열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 새로운 생각을 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8시 새마을호를 타기 위해서 저는 7시 30분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는 것을 보니 제각각 도착 시간이 달랐습니다. 10분전에 오는 사람, 5분전에 오는 사람, 심지어 출발 직전에 뛰어오는 사람 등 형형색색이었습니다. 그러나 열차의 출발은 8시에 똑같이 합니다. 빨리 왔던 늦게 왔던 출발은 똑같이 합니다. 그리고 열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면 우리 인생살이의 축소판 같습니다. 3분의 1은 피서객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열차 안에는 여러 가지 일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열차 안에서 우리 인생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중심의 문제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특실에 탔느냐, 일반실에 탔느냐, 앞자리에 탔느냐, 뒷자리에 탔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이 열차를 타고 가는 사람의 중심이 어떤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다 라는 생각을 혼자 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중심

  우리 인생 열차를 타고 가는 수많은 사람들, 성경 열차 속에 나타나는 수많은 사람들 모두 인생으로 나서 인생의 종착지인 죽음으로 가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 일생동안에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고, 한 부류는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살던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는 그 좋은 환경에서 하나님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중심을 잃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로 인생들은 자리를 잃어버리고, 방향을 잃어버리고,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0-41절에 보면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밭에서 일하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환경이 아닙니다. 운명이 아닙니다. 상황이 아닙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고 , 한 사람은 하나님을 등지고 있는 이것이 인간의 중심문제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완행열차를 탔느냐, 급행열차를 탔느냐가 아닙니다. 이와 같은 인간의 중심문제는 성경역사 속에 그대로 흘러 내려옵니다. 같은 형제로 태어났지만 아벨은 하나님을 향하고, 가인은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향하고, 에서는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롯은 소돔과 고모라를 마음에 두고 갔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형태는 같고 같은 공간 안에서 같이 살아가지만 인간의 중심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느냐, 하나님을 등지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삶의 선택

  그런데 이와 같은 문제는 인간의 운명이 아닙니다. 선택의 문제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갈 수 있는 선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등질 수 있는 선택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인간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선택도 이루어지고 있고, 하나님을 등지고 가는 선택도 부지런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에는 책임이 따라 옵니다. 그래서 선택은 어떤 중심으로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자세로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선택에 의미가 판결나는 것입니다.

  지금 지구촌에서 휴가가 가장 많은 나라는 불란서입니다. 공식 휴가일이 1년에 145일이나 됩니다. 그리고 신년 휴가는 별도로 보내는데 그것도 포함하면 150일입니다. 텅 빈다는 ‘바캉스’라는 말은 불란서말입니다. 그야말로 정기 휴가철에는 도시가 텅 빈다고 합니다. 구라파 사람들은 휴가를 한 주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몇 주간 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4-5주간 휴가를 보내고 오면 또 일년 휴가계획를 짠다고 합니다. 그렇게 휴가가 많은 나라가 불란서이고 구라파입니다.

  그런데 이 기록이 대한민국 울산에서 깨졌습니다. 현대자동차가 주5일 근무를 채택함으로써 남자들이 년 165일, 여자들이 177일의 휴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휴가만 아닙니다. 5일제 근무를 해도 월급은 그대로 받습니다. 오히려 인상을 위해서 협상을 하게 되고 근로자 평균년봉이 6000만원을 넘는 회사가 되었습니다. 충분히 놀면서 충분히 월급을 받는 근로자의 지상천국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나 회사측에서 우려하는 것도 있습니다. 근로환경이 좋아지고, 휴가가 많아진다고 해서 노동의 질이 높아 가는 것인가? 결코 노동현장의 분위기에서 그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노동운동이 회사를 위해서,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모두가 자기 입장을 위해서 너무나 강력한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근로자들이 중심을 바로 잡고 있으면 주5일 근무를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6일 동안 일하던 것을 5일 동안에도 질 높은 노동운동으로 생산성을 높이면 가능하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 우리나라의 모든 기업현장에는 중대한 위험이 온다고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환경탓이 아니다

  오늘 우리는 자꾸만 상황을 쫓아갑니다. 환경만 쫓아갑니다. “내 불신앙은 불가피했다”라고 변명을 합니다. “나같이 못난 인생이 이렇게 살 수 밖에 없지 않느냐” “나같이 못난 부모 만나서 못 배우고, 나같이 열악한 인생환경 속에서는 이렇게 살 수 밖에 없지 않느냐”고 변명을 하지만 인생은 변명이 아닙니다. 인생은 상황이 아닙니다. 인생의 성패는 선택에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가장 애석한 인물 중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입니다. 그는 수많은 왕자들 가운데 가장 다윗의 총애를 받는 왕자입니다. 그는 인물도 준수합니다. 그는 무예도 능합니다. 그는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왕자입니다. 압살롬보다 더 환경에 유리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아버지를 등지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았던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가롯 유다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가장 유능합니다. 그리고 가장 유리한 직책을 가지고 있었던 가롯 유다, 그의 선택은 주님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인생은 환경과 여건이 결정적인 조건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인생을 풍요케 하는 결정은 선택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선택의 질을 분석하고 하나님 앞에서 부지런히 믿음의 선택을 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립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 곳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면 안하무인의 재판관입니다. 그 사람에게 걸리면 모든 사람이 불행해지는 불의한 재판관입니다. 이 재판관에게 한 과부가 와서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밤낮으로 와서 졸라댑니다. 그런데 이 재판관이 과부에 대하여는 상대를 못합니다. 이 사람이 불의한 재판관인데도 이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나와서 원한을 풀어달라고 매달리는 과부에게는 속수무책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네 원한을 풀어주리라” 왜 풀어주느냐 하면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이 재판관은 재판을 정의로 하지 않았습니다. 법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정의와 법은 제쳐놓고 자기를 괴롭히는 과부를 멀리하기 위해서 이 재판이야 어떻게 되던 간에 법률상으로, 과정상으로 종결해 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비유를 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 말씀은 제자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전체로 연결해 보면 이런 적용이 됩니다. “애들아 지금 너희들은 나를 믿느냐, 불의한 재판관이 자기가 괴로움을 당하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어 과부를 자기에게서 떼어내기 위해서 재판을 한 자기 중심의 재판, 자기 유익을 위해 재판을 한 그 불의한 재판관처럼 너희들이 나를 따르고 있지만, 아직도 너희 중심을 가지고 나를 따르고 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그 믿음을 보겠느냐” 나를 향하는 믿음, 나를 중심에 잡고 있는 이 믿음을 보겠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제자들이 자기를 향하고 있지 않은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중심은

  오늘 여러분의 중심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의 중심은 주님을 향하고 있나요?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권유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처음으로 말하신 음성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제자리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회개는 신앙고백과 다릅니다.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 이것은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중심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세상으로 향하고 있는 내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해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가 아니고 내 중심이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되고 하나님께 잡혀야 됩니다. 중심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고백은 늘 ‘카타르시스’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감정의 심리적인 느낌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 중에 우리는 신앙고백을 가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예배가 끝난 후, 신앙고백 이후 우리의 삶 속에서 중심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람이 회개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으로 향하고 있다면 아직도 이 사람은 회개가 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6장16절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고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이 고백을 했던 베드로가 만찬석상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님께서 말하길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리라” 그러나 베드로는 마태복음 26장33절에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니야, 오늘밤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다 흩어지리라” 35절에서 베드로가 말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정말 든든한 제자입니다.

  베드로의 자리

  드디어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기도를 하시던 중에 대제사장들과 종들과 군병들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주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기도할 때는 졸던 베드로가 그때는 칼을 뽑아들고 호기를 부리면서 말고의 귀를 잘라버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잡혀 끌려갔습니다. 가야바 제사장의 뜰에 끌려갔습니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도 멀찍이 따라 갔습니다. 주님이 가야바 뜰에서 심문을 받는 동안에 베드로는 가야바 뜰에 들어가서 구경꾼들과 함께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한 비자가 와서 “이 사람도 그 사람과 함께 있었도다”라고 일렀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고 주님을 부인합니다. 그러자 또 옆에 있는 계집종 하나가 “아니라 이 사람도 같은 당이라, 갈릴리 사람이라”고 하자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곁에 있는 한 사람이 “이 사람도 그 당이라”고 고발을 하자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고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이 본문의 문맥을 보면 첫 번째 부인과 두 번째 부인은 연속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부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 번째 부인은 성경을 보면 한 시간 후에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을 하고 이 사건을 해석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것은 얼떨결에 세 번이나 부인을 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 부인을 하고는 당황을 해서 두 번, 세 번 부인을 했다고 동정해서는 안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시간은 무려 한 시간에 걸쳐 일어난 사건입니다. 한 시간 동안이나 같이 앉아서 주님을 부인을 했는데 이건 한 시간 동안이나 어둠에 잠겨 있었고, 주님을 잊어버리고 있었고, 의도적으로 주님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베드로는 정확하게 의지적으로 주님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염두에 두고 이 사건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드디어 이 베드로가 회개하는 장면이 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 74절과 75절에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 가지 과정이 있습니다. 닭 울음소리를 들었고, 그 닭 울음소리를 듣자 말씀이 생각났고, 생각이 났기 때문에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을 했다고 세 가지 과정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닭 울음소리를 들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 닭 울음소리를 통해서 주님이 “내가 오늘 밤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도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닭 울음소리가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지성과 감성이 주님의 말씀을 생각했고, 그 결과로 그는 밖에 나가 회개하는 행동이 일어났습니다. “와, 닭 울음소리가 영험이구나, 닭 울음소리를 들어야 회개가 일어나는구나” 그렇게 닭 울음소리에 성경해석에 초점을 맞추면 안됩니다. 이것은 우화적인 해석이 됩니다. 물론 유대인들의 전통에는 닭 울음소리를 매우 싫어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닭 울음소리가 베드로를 회개의 자리로 이끌어간 능력이 아닙니다. 엉뚱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주께서 돌이켜 보시니

  누가복음 22장에도 이 사건을 그대로 기록합니다. “한 시간쯤 있다가” 이 말은 두 번째 부인을 하고 세 번째 부인하기까지 간격이 한 시간쯤이라는 것입니다.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정적인 동기는 닭 울음이 아닙니다. 닭이 우는 그 순간에 주께서 베드로를 돌이켜 보셨다고 했습니다.

  이 장면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야말로 베드로는 너무나 가증한 제자입니다. 저의 감정으로는 내 옆에 있었더라면 한 대 먹였을 것입니다. “너같이 제자답지 못한 놈, 너 한 대 맞아야 돼” 하고 한 대 때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있는 그 자리가 예수님이 잡혀서 심문 당하고 있는 제사장 뜰 안입니다. 같은 뜰 안입니다. 서로 볼 수 있는 간격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있는 그 음성도 주님이 들을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 장소에서 주님을 부인하고 있었던 그 베드로, 그냥 봐줄 수 없는 친구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할 때, 부인할수록 목소리가 줄었겠습니까? 그곳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고발을 당했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대중들을 설득하기 위해 큰 소리로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주하고 맹세했다는 것은 큰 소리로 했다는 것입니다. 큰 소리로 주님을 부인하는 베드로의 이 음성을 주님이 듣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옳지 못하게 한 말을 주님이 다 듣고 계십니다. 내가 숨어서 한 일 주님이 다 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한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베드로의 말을 듣고 계셨던 주님, 그러나 세 번이나 부인하는 그의 제자를 주님은 긍휼과 자비의 얼굴로 돌이켜 보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마주보는 그 순간 화살에 맞은 사슴처럼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그 마음속에 화살을 맞은 베드로는 밖으로 뛰어나가 통곡하며 회개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이 하이라이트라고 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기 때문에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도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가 되도록 여건을 만들어 놓고 회개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가슴을 치고 통곡하면서 회개하는 것은 주님께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이 베드로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이 베드로의 모습을 다시 한번 연상을 해보면 주님이 보이는 곳에, 주님이 들으시는 자리에 있을 때는 베드로의 중심은 주님을 등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밖에 나갔을 때, 곧 대제사장의 뜰을 벗어났을 때는 주님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울부짖는 베드로의 마음은 예수님께로 담장을 넘어서 주님의 품에 안기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영적인 위기감을 느낍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하는 이 자리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뜰 안에서 주님을 등지고 있는 베드로처럼 예배를 드리고 있는 한국교회 성도들이 오늘도 중심은 예배당 밖의 그 무엇에다가 중심을 두고 집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를 드리고 있는 오늘 우리들의 공간은 주님과 함께 제사장 뜰 안에 있는 베드로와 같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뜰 안에 있다고 모두가 주님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비록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해도 통곡하면서 주님께 돌아가는 베드로처럼 우리 중심을 바로 잡고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자리를 바로 잡으시기 바랍니다.

  맺는 말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로 이동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는 마음, 사단에게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께로 이동하는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 자녀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돌아오면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넘어서는 축복으로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탕자는 품꾼만 되어도 만족하겠다고 돌아갔지만 아버지는 품꾼이 아니라 아들로 회복을 시켜 주셨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와 같이 영접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옆에 계십니다. 우리가 선택만 하면 그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십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들에게 그 좋으신 하나님은 아버지로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 우리 마음의 중심을 이동을 시킵시다. 그리고 우리 마음자리가 중심을 잡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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