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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하시는 일 (요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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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이용호 목사

아기들이 자라면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가장 먼저 하는 질문은 "이게 뭐야?"입니다. 보는 것마다 "엄마, 이게 뭐야?" "아빠, 이게 뭐야?"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성숙하면 질문도 성숙해집니다. "왜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이런 질문은 부모가 조금 생각을 하고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그런 질문을 할 때, 그저 귀찮다는 듯이 대답을 하면 안 됩니다. "왜 꽃이 피는데?"그러면 설명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조금 더 성숙해지면 질문이 상당히 성숙해집니다. "그럼 난 어떻게 해요?" 이렇게 질문합니다. 제법 근거 있는 답을 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아이들은 묻고 답하고 자랍니다.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도 모두가 문제를 가지고 답을 구하고 있습니다.

  탓하는 세상

  사람들은 사건 속에서 원인을 추궁합니다.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이건 가난, 돈 문제이다' 하고 경제적인 요인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이 있고, '이건 정치를 잘못해서 그렇다' '우리 정부가 잘못되어서 그렇다'고 정치적인 문제로 탓하는 경우도 있고, '사회가 부정부패, 부조리가 많다' 고 사회적인 문제로 돌리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속담에 악담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일이 잘못되면 '전(前)생애 무슨 죄가 많아서...'이렇게 탓합니다. 잘못된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인간에게 당연하지만, 이렇게 모든 것이 그 추구하는 양식이 인간의 타락된 방법으로 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알지 못하면서도 큰 문제로 앓고 있는 것이 바로 "자살"사건입니다. 2002년도 13,550명이 자살했습니다. 하루 36명이 자살했습니다. 전쟁도 아니고, 사고도 아닌데 그저 자살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습니다. 왜 자살하는가? 그것은 앞에 말했던 3가지 요인의 집합입니다. 경제, 정치,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그렇게 자살을 합니다. 그 외에 학교성적 때문에 아이들이 자살합니다. 아들, 딸이 저질러 놓은 카드 빚 때문에 부모가 자살합니다. 부부불화 때문에 애매한 아이들이 자살합니다.

  우리 사회는 잘못되면 원인을 추구하는데, 두가지 심리를 가지고 합니다. 하나는 남의 탓에 초점을 두고 원인을 규명하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과거에 집착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께서 길 가시다가 나면서 소경된 자를 만났는데 주님의 제자들이 이 소경을 두고 아주 잘못된 논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 죄입니까? 자기입니까? 그 부모입니까?" 여기 2가지가 있습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그 다음 "무슨 죄를 저질렀는가?" 이것을 따지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그런 실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면서 소경된 사람, 그 불쌍한 사람을 두고, "누구 죄 입니까?"하고 따지는 제자들의 논쟁은 그 사람에게도 불쾌할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세상은 그 문제로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주님은 제자들의 그 질문을 받고는 아주 획기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것은 제자들의 질문과 정반대되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철저하게 과거에 초점을 두고 원인을 따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런데 주님은 미래목적을 두고 답을 하셨습니다. "부모의 죄도 아니요, 그 자신의 죄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이것은 놀라운 의식의 전환이고 우리주님의 입으로 들어보지 않고는 도무지 들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어떤 설명도 하지 못한 말을 주께서 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도

  나면서 소경된 것은 본인의 탓은 아닙니다. 누가 소경으로 나고 싶겠습니까? 부모의 탓도 아닙니다. 부모가 자기 자식을 소경으로 낳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요한복음 9장 뒤의 본문에 보면 이 사람의 나이가 40세쯤 되었다고 했습니다.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나면서 소경되고, 그것도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거지노릇을 하면서 살아야 했던 이 사람은 더 이상 설명할 길이 없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두고 이렇게 제자들이 시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주님은 이 사람에게 참으로 아름다운 말씀으로 다가갔습니다. 과거가 원인이 아니라 미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제자들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왜 놀랍습니까? 우리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누가 그 소경에게 기대를 합니까? 누가 길거리의 거지 소경에게 희망이 있다고,  소망이 있다고 지목을 합니까? "이 사람아, 자네도 희망이 있어. 자네도 기대를 가져"라고 아무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습니다. 그런 존재입니다. 그 소경을 향하여 주님은 "이 사람아, 자네에게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있어. 너를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어." 굉장한 선언입니다. 이 메시지는 우리자신에게 다
가옵니다.

  버려진 거지 소경, 아무도 다가가지 않는 거지 소경에게도 하나님의 나타낼 계획이 있다고 한다면 눈이 멀쩡한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볼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의식하기 바랍니다. 길거리에 버려진 소경거지에게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 각자에게도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이런 미래목적으로 우리의 삶을 해석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고통이 있습니까? 누구 죄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얽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무엇을 내게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지, 우리하나님의 연단의 목적이 무엇일까? 그것을 믿음으로 보실 줄 알기 바랍니다. 이 소경 거지는 버려진 과거입니다. 상처투성이 과거입니다. 잘못된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는 운명지어진 불행한 사람입니다. 나면서 소경,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팔자소관이라고, 운명이라고 돌립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는 운명도, 팔자도, 실패도, 고통도, 잘못된 과거도 하나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그런 용어도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역사 속에는 그런 용어가 없습니다. 이 소경은 운명이 아닙니다. 이소경은 팔자가 아닙니다. 그에게 일어났던 놀라운 역사적인 현실을 직시하기 바랍니다.

  역사적 필연

  첫째, 이 소경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것도 팔자, 운명입니까? 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고 했습니다. 이 문맥을 자세히 보면 소경이 앉아 구걸하던 길가에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입니다. 주님은 그 길에 다니는 많은 사람도 보셨지만 특별히 이 소경 거지를 주목하셨습니다. 소경된 사람을 '보셨다' 이 말은 영어로 'to see'가 아닙니다. 그저 보는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로 보면 달리 보십니다.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소경거지로 그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에 주님의 관심에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만약 소경이 아니었더라면 한평생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소경이라는 그 불행 때문에 지금은 하늘나라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신 것입니다.  위대한 역사가 소경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결정적인 약점이 있고 지난날의 실수도 있지만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에 다른 사건으로 다가옵니다. 사람들의 놀림 앞에 자존심도 다 짓밟혀 버린 거지 소경, 그에게 메시야가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자기에게 다가온 낮선 사람이 메시야인지 모릅니다.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젊은이가 다가와서 그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 오늘 본문에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주님은 2가지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첫째는 흙을 침으로 이겨 눈에 발라 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입니까? 40년동안 한번도 당해보지 못한 일을 당하는 것입니다. 사람 눈에는 먼지만 들어가도 불편합니다. 그런데 흙을 이겨 눈에 바르다니! 여러분, '예수님이 하시는 것이니까 할 수 있지' 그런 차원입니다. 이 소경은 왜 흙을 눈에 바르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에게 다가온 그 소경은 낯선 사람이 자기 눈에 흙을 바르고 있습니다. 보통 인간의 상식으로는 '아, 오늘 재수 없는 날이네, 조금 전에는 누구 죄냐고 따지더니만 이건 또 무슨 짓이야, 내가 아무리 소경이지만 내 눈에 흙을 발라서 되는가? 한푼 주든지, 안 그러면 그냥 지나가든지 해야지 무슨 행패야' 그렇게 생각 안 하겠습니까? 이해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소경에게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했습니다. 소경은 걸음걷기가 불편합니다. 흙을 바른 그 모습으로 실로암 못에 가서 씻는 다는 것은 혼자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소경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명령을 하셨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명령하셨습니다. 오늘 성경 결론에 보면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할렐루야!

  눈을 뜬 과정이 중요함

  이 사람은 낯선 사람이 와서 자기에게 몹쓸 짓을 해도 그것을 받아 들였습니다. 눈에 흙을 발라도 그것을 참아냈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그 어려운 명령도 그는 순종했습니다. 가서 씻었더니 밝은 눈으로 왔습니다. 사람은 바라지 않는 일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원치 않는 일을 당하는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과 이 소경거지 사이에 일어난 이 행동에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왜 주님은 이 소경거지에게 이런 어려운 작업을 통하여 능력을 베푸시는가? 그저 말씀 한마디로 "소경이여 눈을 뜰지어다" 하시든지 아니면 최소한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면서 기도하시면서 그렇게 치유하시든지, 그렇게 하지 않고 왜 이 소경에게 이렇게 육체적으로 경험을 하게 하시는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9장 읽어나가면 뒤에 그 목적이 나옵니다. 언젠가 이 사람은 유대인들 앞에서 "내게 눈을 뜨게 한 사람이 있다. 그가 누군지 모르지만 내가 분명히 눈을 떴다. 내 눈에 흙을 발랐고 내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었다" 그것을 증언해 주기 위해서 주님이 미리 그런 육체적 경험을 통하여 눈을 뜨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이 사람에게만 이렇게 한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만 필요성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내게 주시는 은혜의 방법은 내게만 해당되는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사람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하셨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힘 입을려면 납득되지 않는 일을 감수하고, 뛰어넘고, 순종해야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면 납득되는 일만 있습니까? 교회 섬기다 보면 내 맘에 안 드는일 많이 생깁니다. 굳이 받아 들이지 못할 일이 많이 생깁니다. 만점 목사 있습니까? 내 눈에 만점 교인이 없는데 어떻게 만점목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만점 아내도, 남편도 없습니다. 내 맘에 납득 안 되는 일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음으로 뛰어넘어 가야 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정말 안 좋은 습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조용히 은혜 받으려는 것입니다. 조용히 하나님의 축복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저 다니면서 은혜 받으려고 합니다. 그것을 본 회퍼라는 목사님은 값싼 은혜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40년동안 눈 한번 못 떠본 이 사람이 위대한 하나님의 기적을 보려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주님의 그 명령을 받아들여야 일어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려면 힘든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려면 납득되지 않는 고비를 넘어가야 합니다. 내게 눈이 뜨는 역사가 일어나려면 내 상식에 맞지 않는 주님의 음성을 순종해야 합니다. 멀쩡한 내 눈에 흙을 바르더라도 참아야 하고, 나 혼자 갈 수 없는 곳에 가라해도 가야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너무 점잖게 은혜 받으려 하고, 너무 신사적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 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 소경의 눈을 뜬 과정을 보십시오. 얼마나 힘든 과정을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넘어갔습니까?

  모든 것이 은혜로다

  우리 교회 50년사를 돌아보면, 상처도 있고, 실수도 있고, 우리의 불충도 있고, 애석함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누구의 죄 때문이냐?" 하고 과거에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과거를 잊어버리라고 하면서도 과거를 잊지 말라고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성도들이 과거를 죄관으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구의 죄냐"는 죄관으로 과거를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은혜의 관으로 과거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였고, 저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다. 사도바울의 이 모습으로 우리의 과거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
럴 때 우리는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워싱턴 DC에 가면 기념공원이 있습니다. 한국참전기념공원입니다. 6.25때 유황도 전투를 염두에 두고, 병사들이 폭우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우비를 입고 중무장을 하고 행군하는 모습을 동상으로 조각해서 공원 앞 입구에 세워놓았습니다. 병사들의 비장한 표정을 조각에 담았습니다. 그 공원에 이런 글귀가 새겨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나본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켜달라는 부름에 응한 미국의 아들, 딸들을 기린다"는 글입니다. 저는 한국인으로서 그 공원 앞에서 참 숙연해 집니다. 1950년 이후부터 미국은 우리나라에 연 150만명의 군인을 파병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미군 10만명이 부상하고, 3만명이 전사하고, 8,000명이 포로로 실종되었습니다. 그런 큰 대가를 지불하고 대한민국은 자유와 평화를 얻었습니다. 우리의 희생 때문에 한국을 살렸다는 그 대가를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아이젠하워가 한국전쟁을 두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Never again Korea"라고 했습니다. 이런 미국의 값진 아들, 딸들의 생명을 희생하여 구원한 코리아를 결코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 말은 누구의 죄를 탓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가서 희생하여 한 민족을 구출했다는 그 사실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 공원 앞에서 한번 묵상을 하고, 반미운동을 하고, 친미운동을 하든지 해야 합니다. 우리도 월남에 파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국익을 위해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나라, 한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도와 달라는 그 음성의 부름에 응했던 미국의 아들, 딸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맺는 말

  여러분, 과거는 은혜로 보면 모두가 감사할 일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과거는 상처가 있어도 은혜의 눈으로 보면, 거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우리교회의 50년사도 발걸음마다 우리는 연약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넘쳐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멈추었다면 어떻게 50년을 지탱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의 생애가 오늘 이 자리까지, 오늘 이 모습으로 산 것도 발걸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의 눈으로 우리의 남은 미래를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내 고통도 하나님의 나타내시는 일을 위함입니다. 이 믿음으로 앞으로 전진 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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