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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약 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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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정근두 목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려고 나오신 여러분, 기독교의 예배는 일방통행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목욕재계하고 정성껏 손을 모아서 이른 시간에 정성을 드립니다만 기독교는 예배자의 정성만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 보다 더 우선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임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요즈음 우리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쓴 편지를 살피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는 “흩어진 열두 지파”의 형편은 야고보서5장 첫 부분에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였습니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어 살기가 좋아지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 지고 살기에 헉헉대는 그런 사회였습니다.

가진 자들의 착취가 극심한 가운데 희생당하는 성도들입니다. 가진 자들의 사치가, 그 연락이 도를 넘은지 오래입니다. 외식 한 끼 하면서 수십만 원을 우습게 쓰는 오늘하고 다를 바 없습니다.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난 그런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그 일에 돈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만족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몇 백만 원 짜리 모피 코트는 어떤 계층에서는 이미 보편화되고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옷이 불티나게 팔리는 오늘 현실과 닮은 시대 상황입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며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5절) 옛날 시골에는 잔치 때가 되면 집에서 키우는 돼지에게 평소보다 먹이를 많이 먹여서 살을 찌웁니다. 잔칫날 잡기 위해서입니다. 야고보는 가진 자들을 잔치 날 잡을 짐승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제 가진 자들의 ‘불의에 희생을 당하는 성도들의 인내’가 한계점에 왔습니다. 오직 하나의 소망이 그들로 하여금 견딜 수 있는 힘을 공급했습니다. 주님의 강림에 관한 간절한 바람이 극한 상황을 버틸 수 있는 힘을 공급했습니다. 더 나은 변화가 임박한 것을 믿는 사람은 현재의 어떤 고통이라도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강림을 대망 했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승천하시던 주님의 좌우에 섰던 천사들이 약속했습니다. “너희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만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또 성령께서 교회를 향해 하신 최후의 말씀에 근거한 소망입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디도서에서는 이를 가리켜서 #우리의 복스런 소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귀한 인내의 원천은 이 소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 원천으로부터 야고보는 자기 시대 백성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시니라.”

그때 이후로 고난과 오래 참음은 지상에 있는 성도들의 몫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야고보 선생은 핍박 중에 있는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세 가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1. 맨 먼저 농부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수확을 하기까지 기다리는 농부의 모습에서 얻는 지혜입니다.

우리가 사도들 하면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고 있습니다. 열두 사도 그렇지요? 세월과 함께 사도들이 하나씩 세상을 떠났어요. 그 자리를 이어갈 리더십을 계승할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그 사람들을 일컬어 교부들이라고 부릅니다. 그 교부 중 한 사람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야고보와 유다는 농부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집에서 짐승을 키우고 잔치 때 잡는 이런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 편지를 쓴 겁니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 .” 추수를 하기까지는 시간을 요합니다. 이른 비도 내려주어야 싹이 트고 늦은 비도 내려야 알갱이가 여물게 됩니다. 조급하게 군다고 해서 수확을 앞당길 수 없습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비를 주시도록 기다려야 합니다. 제때에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와야 됩니다. 한 방울의 비라도 농부가 좌우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며 기다려야 합니다.

어떤 부족은 기우제를 지내기만 하면 비가 온데요.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비가 올 때까지 계속 지낸다는 겁니다. 비가 올 때 까지 계속해서 기우제를 지내니까 그 부족은 기우제만 지내면 비가 온다.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어쨌거나 농사짓는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보고 삽니다. 그러나 도시 생활을 하면 그렇게 절박해 지지는 않습니다. 씨를 뿌릴 때 뿌리지 못하면 애 간장이 타는 그런 농부의 심정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농부들은 속절없이 하늘을 바라보면서 비를 내려 주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하늘을 의지하는  이런 모습이 좀 있었거든요. 농사짓는 일이 얼마나 고달픈 일입니까. 그러니 모두다 농토를 버리고 도시로 다 나와서 오늘 이만큼 많이 왔습니다.

도시에서는 자기 수완만 좋으면 될 것처럼 사람들이 착각을 하기 쉽습니다. 사업을 해도 직장을 다녀도 모든 것이 사람에게 달린 것은 아닙니다. 내 수완 그 수완도 하나님이 주신 것을 알아야 되고요. 내 건강 그것도 하나님이 주셔야 됩니다. 따라가서 돈을 모울 수 없습니다. 돈이 따라와야 부자가 된다고 사람들은 말 하지 않습니까? 하늘이 허락해야 된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는 농부들처럼 하늘에서 오는 구속의 완성을 위해 인내해야 합니다. 새로운 세상, 바람직한 공동체를 완성을 위해는 우리는 조금 더 인내하고 기다려야만 합니다.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되어 우리로 지극히 선할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원하노라고 우리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그것을 상상할 수 없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믿기 때문에 확신해도 좋습니다. 그분은“능히 우리를 보호 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을”우리가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2. 이어서 야고보 선생은 우리의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선지자들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고난과 오래 참음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면 선지자들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봐라 그럽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선지자! 정의가 뭐냐면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들, 주님이 하도록 하는 말을 전달하는 자들 그런 뜻입니다. 이 직무는 주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뜻을 백성에게 전하는 이 직무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주일날 한 번만 예배에 나오시는 분은 저를 부러워합니다. 야~ 괜찮다. 일주일에 한번만 설교하고도 엿새 동안 먹고 사니 괜찮은 직장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까이 보면 그렇게 한가로운 것도 아니고 또 직무가 쉬운 것도 아닙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에도 월요일부터 시작해서 하루도 빠짐없이 4~6시 사이에는 언제나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10시전에 어젯밤에 처음으로 한번 자리에 누워보았습니다. 보통 11~12시가 되어야 됩니다.

제가 서울에 있을 때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를 타고 운전사분과 길을 가면서 전도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개척 교회를 하는 목사라고 소개를 하자 자기는 개척 교회에 나가는 집사인데 자기아들에게는 절대로 목사를 시키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니까 자기가 개척 교회에 나가 보니 특히 개척 교회 목사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차라리 아들을 택시 기사를 시키겠대요. 그러면서 목적지에 도착하여 요금을 내니까 택시비를 안 받겠다는 것입니다. 개척교회 목사에게는 택시비를 안받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서울 같은 각박한 세상에서 제가 공짜 택시를 한 번 탄 적이 있었습니다.

목사의 직무는 사람들을 칭찬하는 것이 주요 임무가 아닙니다. 칭찬은 하나님 나라에 가서 하나님께 다 받으시고 저는 칭찬만 하는 것이 아니고 잘못했을 때 잘못했다고 이야기를 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잘못한다고 이야기를 하긴 해야 되는데 제가 지혜가 없어서 본문이 심각하면 제 표정이 심각해 져서 듣는 사람들을 긴장을 시켜서 이제는 그러지 않아야겠구나. 내용은 타협이 없어야 하겠지만 표정을 부드럽게 해야겠다는 이런 지혜가 나이가 드니까 조금 생기네요. 그래서 어떤 때는 본의 아니게 ‘아 ~ 여러분들이 목사님 굉장히 심각하게 우리를 나무랬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것도 내 형편을 다 일러바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도 가끔 합니다.

저는 직무상 여러분들이 잘못하는 것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치도록 해야 제가 하는 일이 잘하는 겁니다. 교통순경의 직무는 교통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주어야 하는데 지도는 하지 않고 딱지만 떼는 것은 자기 직무를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장님에게 말했고 경찰청장에게도 편지를 보냈어요. 그런데 답장이 빨리 없으면 내용 증명을 해서 또 보냅니다. 그래도 답이 없으면 인터넷에 들어가서 항의를 할 것입니다. 이래저래도 대책이 서지 않는다면 우리 3부 예배 마치고 차를 가지고 경찰청으로 모두 올라갑시다.

때로는 잘못을 지적하고 죄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며 돌이키기를 호소하는 일은 언제나 인기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려 않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우리 중에 누가 악한 사람이 있을까?’살피지 마십시오.

그것은 마치 간첩 포스터를 그릴 때 언제나 험악한 인상의 모습의 간첩을 그리고 얼굴에는 빨갛게 칠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험상궂은 사람을 간첩으로 보내지는 않습니다. 꼭 우리와 똑같은 보통사람을 보냅니다. 악한사람, 죄인, 오만한 사람 성경이 그렇게 말하면 생긴 것부터가 무언가 다르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보통 우리 같은 사람도 악인노릇을 할 수 있고 죄인 노릇을 할 수 있고 오만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악인은 어떤 사람, 죄인은 어떤 사람,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사는 사람이 성경은 악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행동을 계속하면 죄인이라고 부릅니다.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보고는 오만한 사람들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경말씀이 우리 안에 가득해 있으면 뭐가 나올까요? 성경말씀이 나오게 되어있지요. 그래서 일주일 내내 하나님 말씀을 매일 묵상하고 생각하면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하는데 성경책은 주일날만 들고 나오니까 엿새 동안 살 때에 자기 방식대로 사니까 하나님은 그런 사람보고 악하다고 합니다.

그런 삶의 방식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우려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와서 예배만 참석하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배당에 나오는 유일한 이유가 마치고는 빨리 돌아가려고 나온다니까요?

자기 죄악을 메모하는 사람들은 죄를 지적하는 사람을 거리를 두고 나중에는 등을 돌리고 때로는 끼리끼리 패를 만들고 대적하고 그렇게 됩니다. 말씀 듣고 좋은 쪽으로 바뀌지 않으면 생긴 것 때문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데 좋은 쪽으로 바뀌지 않으면 누구나 말씀 전하는 사람하고 거리가 생기게 되고 등지게 되고 필요하면 칼질도 하려고 달려듭니다.

비가 내리는데, 내리는 비를 받아서 곡식이 자라지 않으면 그 땅은 점점 굳어져 갑니다. 저도 제가 하는 충고가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리고 이 일을 충실하게 하면 나에게 어떤 대가가 돌아오리라는 것을 예상합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하지 아니 한 적이 있느냐”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적당히 제사장, 선지자 노릇하면서 적당하게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면 사람들 사이에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대언하던 사람들 치고 핍박을 받지 아니한 선지자는 없었습니다. 핍박을 받은 선지자들의 대표적인 경우가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본래 성격상 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명한 눈물의 애가를 쓴 사람입니다.

백성들의 죄악을 볼 때에 자기 가슴에 아픔을 느끼고 그들이 받을 고통을 생각할 때에 “어떻게 하면 내 머리는 눈물의 근원이 되며 내 눈은 눈물이 흐르는 샘이 될꼬?”라고 탄식을 했습니다. 살육 당할 그 백성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늘 그 백성의 죄악을 볼 때에, 그리고 그 죄악 때문에 당하게 될 내일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대언 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지나칠 만큼 민감하고 다감한 마음을 소유했던 그는 백성들이 반기지 않는 설교를 연속적으로 해야만 했습니다.

그 결과 구타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어떤 때는 웅덩이 속에 빠뜨려 지기도 하고 결국은 톱으로 켬을 당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11장에서 톱으로 켬을 당했다는 언급은 기독교 전통에서는 예레미야의 경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는 예레미야입니다만 야고보는 한 선지자가 아닌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예로 삼고 있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을 예로 내세웁니다. 그들의 충실한 직무를 오래 참음의 예정으로 들고 있습니다. 충실하게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핍박을 받았다는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선지자들, 늘 평강과 축복을 선언하는 설교자들은 고난과 핍박과는 먼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랑합니다. 이 시계는 금시계인데 몇 백만 원 짜리라고 그리고 이번 구정에도 몇 십만 원짜리 한복 티켓이 몇 개나 들어 왔다고 그렇게 자랑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충실하게 사는 결과는 가끔 고통과 핍박을 동반합니다. 앞서간 선지자들의 생애를 우리가 기억할 때 우리는 용기를 얻습니다.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면서, 아니 받는 것이라고는 무시와 조롱이지만 그 사람들을 향해서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그들을 향해서 미움의 씨앗을 갖고 있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았던 사람들을 본을 삼으라고 두 번째 예를 들었습니다. 3. 야고보 선생이 들고 있는 마지막 예는 욥입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욥의 인내를 너희가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자시니라.”

욥은 당시 동방에서 경건한 사람의 대명사였습니다. 신앙 좋은 사람하면 그 동네 사람들은 욥을 떠 올렸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부자하면 요즘 사람들은 빌게이츠를 수년 동안 떠 올리는 것처럼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은 당시 동방에서 부유한 사람의 대표였습니다. 아들 일곱, 딸 셋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들 딸 농사에서도 복 받은 사람이라고 모두들 생각했습니다. 그때에 말입니다.

요즈음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워낙 하나 낳아서 알뜰살뜰 잘 키우자는 어리석은 정부의 세뇌를 당해서 아들 일곱에 딸 셋을 낳았다고 하면 야 ~ 역시 야만인들은 어쩔 수가 없었구나.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 시대 사람이 야만인지 오늘 우리가 야만인지 한번 따져 봅시다. 옛사람들의 생활과 오늘 우리와 한번 비교해 봅시다.

윗대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이해서 자식을 죽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것도 스스로 방어할 아무런 능력이 없는 태속의 아이를 죽인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이 시대에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식도 부모도 서로 죽이는 것을 보면 어느 쪽이 야만입니까?

적어도 하나님이 지으신 땅위의 사람들이 살고 난 이래로 한 50년 전까지만 해도 자식이 많으면 복이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이 50년 동안에 가치관이 바뀌었어요. 열은 말 할 것도 없고 넷째만 태어난다고 해도 벌써 바라보는 눈초리가 달라지잖아요. 시대의 야만인이 어디서 나타난 것처럼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세상을 살아오면서 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하고 오늘 50년 동안 우리가 복이 있다고 한 것과 달라졌어요. 그러면 어느 쪽이 맞는지 생각해 보라고 제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자주 제가 말씀드렸지요. 논산 훈련소에서 3000명이 전체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나가는데 자기 아들만 오른발 왼발하고 있으면 어느 쪽이 틀렸지요? 자기 아들이 틀린 것입니다. 우리 아들만 맞고 나머지 모두가 틀렸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수 천년동안 사람들이 자식이 많은 것이 복이라고 여겨왔는데 이 시대 사람들이 자식이 적은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면 어느 쪽이 맞느냐 말입니다. 그동안 인류는 자녀가 많은 것이 축복으로 여겼는데 유독 이 시대 사람들은 야만으로 여기니 어느 쪽이 맞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라는 겁니다.

하여간 성경은 아들 일곱, 딸 셋 참 복 받은 사람이라고 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양도 7천 마리이고 약대도 3천입니다. 약대는 그때 무슨 일을 했느냐면 요즘 타이탄이나 픽업이 하는 일을 하는 겁니다. 짐을 실어 나르는 일을 하잖아요. 게다가 소가 오백겨리, 오백겨리라고 하면 천 마리입니다.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은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다는 것입니다.

신앙 좋고 돈 많고 그런 신랑이 있으면 좋겠지요?  정말 골고루 갖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욥이 끔찍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어찌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하나님하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닮은 점이 몇 개 있는 것 같아요. 일단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자기 손자 손녀들을 좋아하더라고요. 아이들이 무차별하게 좋아지면 ‘당신 나이가 50대가 된 줄 알아라.’고 그러던데 나이가 많아지니까 할머니들끼리 모여 자기 손자들 이야기를 하니까 벌금을 매긴데요 만원 그러면 아예 만원을 내 놓고 이야기를 하겠다고 그러는게 할머니들의 모습입니다.

하늘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악한 천사도 거기 끼었던 모양입니다. 거기 모인 자리에서 하나님이 자랑을 하신거예요. “너희가 내 종 요셉을 보았느냐? 악에서 떠나서 그렇게 순전한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네가 다른데서 만나 본 적이 있느냐?”그러니까 별 말씀 다 하십니다. 어찌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겠습니까? 욥에게 부어주신 것처럼 그렇게 복주시고 욥을 보호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지켜 주시면 하나님을 사랑 안할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래 그랬어? 한번 너 마음대로 한 번 해 봐라, 욥의 생명에는 손대지 말고 내가 욥에게 주었던 모든 것 네 마음대로 해 바라 그래서 느닷없이 욥이 사탄의 시샘에 욥의 삶이 풍비박산이 된 것입니다. 이건 우리끼리 안는 이야기이고 욥은 몰랐다는 것이 문제이거든요. 욥이 그런 일이 하나님과 사탄사이에 겨루기를 하고 있다면 얼마나 그런 고난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하면서 나아갈 수 있지만 문제는 그것을 전혀 몰랐다는 겁니다. 그것이 어려운 겁니다. 왜 얻어터지는 줄 모르고 얻어터진다는 것이 힘든 것이거든요.

자녀들은 잔치를 하고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풀을 뜯는 그 평화스런 장면은 일순간에 비극적인 현장으로 바뀌고 맙니다. 갑자기 나타난 소바 사람이 그 가축을 빼앗습니다. “나만 홀로 피하였는고로 주인께 고하려 왔나이다.” 종의 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또 한사람이 뛰어들어서 재난의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천재와 인재가 교대로 계속 밀어닥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종과 양떼들을 불살라 버립니다. 떼 지어 나타난 갈대아 사람이 약대들을 탈취하고 갑작스런 태풍이 불어 잔치하던 집이 무너져서 아들 일곱 딸 셋이 동시에 압사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빼앗고도 사탄은 만족해하지 않습니다. 그 몸까지 질병을 뒤집어씌웁니다. 그 품에 아내까지 조소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 정도 되어서 뭐 신앙생활을 한다고 그래요 죽어버리소.” 그런 아내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게다가 친구들조차 이해가 안 되네요. 욥이 고난당한다는 소문을 듣고 일주일동안 예의를 지키고 아무 말도 안하고 있더니 그 다음 입을 열어서 이야기를 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전체가 너 무슨 나쁜 짓을 했니? 이런 이야기입니다. 욥,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 지경이 되었니? 욥이 내가 이런 처지에 빠질만한 죄를 지은 것이 없다고 하니까 친구들이 그 다음 말이 뭡니까? “욥 너 다시 봐야겠네. 괜찮은 줄 알았더니 너 굉장히 지독하네. 사람이 그 정도 되면 평소에 큰소리치다가 그 정도 되면 자기 죄를 토설하기 마련인데 너는 아직 잘못한 것이 없다고 그러내” 이런 식으로 몰아세웁니다. 

천지간에 욥의 입장을 이해 해 줄 사람이나 대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하나님을 바라보았겠습니까? 여러분, 욥의 이야기만 이 아니라 요즘도 그렇거든요. 자식들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지요. 마누라마저 주일날 교회에 가자면 반대하지요. 백화점이나 영화관에 가자고 그러면 자기가 앞장서서 잘 가다가도 교회에 가는 일은 늘 늑장 부린다면 남편으로서 속 터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실상을 이야기 하면 아내들을 속 터지게 하는 남편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요즘은 그래요. 그러나 거꾸로 되면 이건 더 속이 터집니다.

고통 뒤편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처지에서 하나님에 대한 한 가닥 신앙은 놓지 않습니다. ‘그가 나를 죽이실 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조급 하구나.’

이렇게 고통 중에 살다가 죽어 내 몸이 다 썩어 살아져도 내가 후일에 하나님을 만날 것인데 그 생각하면 내가 지금부터 마음이 급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때 주님을 보면  닭 소 보듯이, 소 닭쳐다보듯이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조급하구나!

극한 고통 속에서도 욥은 마지막까지 자기 상황에 대답해 주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설명해 주실 때까지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다 알지 못했지만 욥은 끝까지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분을 뵈옵고 그분으로부터 설명을 듣기를 고집합니다. 폭풍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마침내 만나고 보상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좋은 더 좋은 아내를 만나서 또 일곱을 낳았데요. 딸 셋 을 또 낳았데요, 그러면서 가졌던 재산을 더블로 주셨대요.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소유만이 보상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상하시는 것은 영적으로 회복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특별히 돈 하면 껌벅하는 이 21세기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뒤에라도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끝까지 견디며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알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주신 것입니다. 그전에 욥도 친구들처럼 어떤 사람이 어려우면 가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안할 때 알아봤지’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심방을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아픈 사람에게 찾아가서 물론 앞에서는 그렇지 않겠지요. 나오면서 쑥덕쑥덕 그러면 안 되지요. 여러분이 어떻게 세상을 다 압니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사건을 통해 고통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신비한 목적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욥이 전능자의 위엄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 자기가 얼마나 피상적인 삶을 살았는지를 깨닫게 되고 죄를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욥을 단련하신 하나님이 베푸신 보상을 생각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할 따름입니다. “오 하나님! 당신은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극한 고통 속에서 번민했지만 결국 인생은 하나님의 장중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 생의 주인이심을 이전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고보는 농부에게 선지자들에게 욥의 예를 들어서 주의 강림을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을 대망하며 사는 동안 우리를 향한 실제적인 권면을 빠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바깥세상을 돌아보니까 극한 사치와 방탕으로 내 닫고 있습니다. 예수 모르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교회에 나와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 같지 않는데 더 잘삽니다.

안팎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짜증이 나는 겁니다. 짜증이 나면 괜히 옆에 사람을 못살게 한다니까요? 저는 개척교회를 처음시작 할 때부터 나를 가장  사랑하는 두 여인에게 부탁을 했어요. 할 만큼만 하십시오. 짜증이 나도록  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남편이나 아들뿐 아니라 하나님도 짜증을 내며 일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거든요.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는 것을 원하시지 뭐 큰일 한다고 혼자 일 다 한다고 설치다가 나중에 피곤해져서 혼자 다 불평을 하고 이래서는 일이 제대로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본문에는 원망하지 말라 라는 말이 있는데 이 원망이란 단어는 바깥으로 꼭 표출된 것이 아니라 안에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밖으로 튀어 나와도 문제이지만 안에 품고 있는 것도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죄악은 그 싹도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네가 뭔데 남에게 불만을 가지느냐? 네가 심판자냐?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를 향해 불만과 원망을 일삼는 것은 심판 행위요. 그 심판은 스스로를 심판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초림하신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 오셨어요. 다시 오실 주님은 우리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그래서 예배 때 마다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외우지 않습니까? 심판할 자는 그분이라니까요? 그분이 오셔서 하실 일을 여러분이 내가 먼저 해버리면 심판주의 역할을 찬탈하는 것입니다. 대역죄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곧 있을 줄 알았는데 오시지 않고 악은 흥왕해 가니까 성도들이 견디다가 이제 한계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불만스럽고 짜증스러우니까 누구에게나 큰 소리를 하고 살지 죽을지를 모르고 그것이 얼마나 잘못인지도 모르고 설치는 겁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마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기다리느니라.”

동료 신자를 향한 계속적인 불만과 원망은 단호히 멈추라고 경고합니다. 도대체 집사가 되어서 그렇게 되느냐? 장로가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렇게 말하지만 하나님이 여러분이 나중에 집사가 되었을 때 장로가 되었을 때 그 말 가지고 하나님은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별도의 법을 통과시킬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이 말 했던 그 입의 말을 가지고 여러분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강림하시는 주님 그분만이 우리의 심판자이십니다. 인자됨을 인하여 아들에게 심판하시는 대권을 맡기셨습니다. 그분에게 맡긴 그 권리를 여러분이나 내가 찬탈하려는 것은 무서운 죄악입니다. 그분이 곧 오시고 있습니다.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느니라.”

헬라어에서는 ‘문들 밖에 서 계시느니라’고 그렇게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마치 우리들의 마음 마음마다 그 문밖에 서 계신다는 의미 같습니다.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의 문밖에 그가 지금 서 계시며 듣고 계십니다. 각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을 아시며 입술의 말을 다 듣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울산 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의 강림을 대망 하십시오. 주님의 강림이 가까움을 기억하게 되면 사람들을 관용할 수 있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모든 사람에게 여러분의 관용을 알게 하십시오. 주님이 가깝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흘만 고생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시한부 인생의 시어머니가 모시는 것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렇게 구박을 했겠습니까?  아니 일주일 후에 끝나는 생명 같으면 일 년 동안 나를 애 먹인다고 암 걸려서 나를 애 먹인다고 그렇게 바가지를 긁겠습니까? 마지막 한주간이라도 좀 편안하게 살다가 떠나도록 했을 건데 하고 후회스럽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오신다는 것을 의식을 못하니까 힘들고 짜증만 나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서로서로 관용 하십시오. 같은 마음 같은 뜻을 품으십시오. 우리 모두는 남을 향해 원망할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남을 향해 원망할 때는 자기가 누군지를 잊어버렸어요. 

내가 어떤 은혜를 입은 자인지 잊어버리니까 남을 보면 못마땅한 것이지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자인지를 잊고 나면 다른 사람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듭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한 모습, 어리석은 모습, 죄악 된 모습을 직시하는 자는 남을 향해 판단할 여유가 없습니다. 내 코가 석자인데 어떻게 남을 붙잡고 시비합니까?

야고보 선생이 서신 앞부분에 한 말을 아직 기억하고 계십니까? “긍휼을 행치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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