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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과 함께 동행하십니까? (눅 2: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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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오주철 목사

요즘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임진왜란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당시에 남쪽 바다에서부터 파죽지세로 치고 올라오는 왜적들 때문에 조선에서는 다급해서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명나라에서는 우선 현지 상황을 판단하기 위하여 심유경이라는 자를 파견했습니다. 그는 교활하고 야심적인 성격의 소유자로서 조선 정부를 여러모로 괴롭혔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막 압록강을 건너기 위하여 나룻배를 타려다가 보니 뱃사공이 눈 하나가 상한 애꾸눈이었다고 합니다. 심유경은 뱃사공을 보고 갑자기 손가락 하나를 쑥 내 보였습니다. 그랬더니 뱃사공은 손가락 둘을 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심유경은 손가락 셋을 내밀었습니다. 뱃사공은 이번에는 주먹을 내보였다고 합니다. 심유경은 껄껄 웃고 그를 아주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강을 건너자 조선에서는 오성 이항복 대감이 통역과 함께 접반사로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심유경은 이항복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의 나라에는 인물이 많습니다. 일개 뱃사공까지도 놀라운 수준의 인물입디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뱃사공을 보고서는 우주(宇宙)는 하나요 그랬더니, 뱃사공이 천(天)과 지(地)는 둘이요 하고 대답합디다. 그래서 천시(天時), 지리(地理), 인화(人和)의 삼요소는 근본을 이루는 것이라고 표시했더니, 그는 그 세 가지 요소는 정신은 모두가 하나요 라고 대답합디다. 일개 뱃사공까지 그 정도이니 과연 조선은 군자의 나라이요."
이상하게 생각한 이항복은 다음날 그 뱃사공에게 어떻게 대했기에 그렇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뱃사공이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아, 그 놈이 흉악하게 건방진 놈입디다. 그놈이 나를 보자마자 너 눈깔이 하나이구나 라고 하겠지요. 그래서 나도 본래는 너처럼 둘이었다 라고 했더니, 그놈은 네 누깔, 내 눈깔 합치면 셋이다 라고 하겠지요. 그래서 내가 화가 나서 주먹을 내밀며 너 죽을래 했더니, 껄껄 웃으며 물러서기에 가만 두었던 것입니다. 에이 고놈의 똥뙤놈."

구세군 창시자 윌리암 부츠는 "인류의 마지막날이 가까워 올수록 교회마다 종교적인 형식은 있으나 성령의 능력은 없고, 교회 조직은 화려해져 가나 예수가 없는 시대가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우리들 주변에는 그가 교회에 다니고, 또 그가 교회에서 직분을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요? 예수를 잃은 예수꾼들. 예수 없는 예수쟁이들. 예수 없이 종교 노릇만 하고 있는 사람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상하게도 그들의 삶은 엉망진창이 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정도 엉망입니다. 직장도 엉망입니다. 자신의 삶은 혼돈과 좌절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황량한 바다에 나침반이 없는 배처럼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그는 신앙을 포기합니다. 교회를 떠나갑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우리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가고 있습니까? 한 때 오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자청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 곁에 남은 사람은 열한 명에 불과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역시 예수님 곁을 떠나고자 하는 유혹을 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을 떠나고 있기 때문에 나도 역시 그러고 싶은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역경과 어려움들은 우리로 하여금 머리를 흔들며 예수 곁을 떠나도록 유혹을 합니다. 자신에게 유익할 때에만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곤경이 닥칠 때에는 쉽게 예수 곁을 떠나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신념이 없는 사람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쉽게 동화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수의 목소리가 항상 하나님의 목소리는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넓고 안전한 길을 원합니다. 쉽고 편안한 길을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 다수 가운데 피하는 것은 결코 안전하지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도 넓은 길로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넓고 문도 커서 쉬운 길을 택하지만 그 길은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떠나게 하려는 강하고도 집요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리스도 곁에 남아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가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그가 바로 신앙의 주역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는 신앙의 주역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혼돈과 혼란스러운 일들을 당합니다. 좌절과 곤고함과 같은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계속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 안에서 신앙의 주역으로 산 사람들은 이런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어떤 아픔과 혼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최선을 다합니다. 때마다 일마다 묘한 방법으로 도우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나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환경을 의지하지도 마십시오. 이런 것들을 의지하다보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지도 모르고, 오히려 자신을 자꾸만 작게 만들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의타심이 많아지고 독립심이 없어져서 배짱도 없어집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환경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보다 훨씬 더 약합니다. 그래서 쉽게 흔들립니다. 그래서 쉽게 넘어집니다. 그래서 쉽게 절망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분의 도우심과 능력을 사모하십시오. 우리가 한 생애를 살면서 예수를 믿어도 시간마다 때마다 기가 막힌 일을 많이 당합니다. 그러나 가나안을 정복한 믿음의 사람들의 공식은 언제나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공간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공간을 만드십시오. 약하고 부족한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마음껏 역사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드리십시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못 이룰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신다면 두려울 것이 무엇입니까? 기억하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들어서 사용해 주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마른 막대기 같은 나를 들어서 사용하신다면 나는 홍해를 가르고, 요단을 건너는 믿음의 산 증인이 될 것입니다. 신앙의 주역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앞 뒤 좌우를 돌아보시면서 "신앙의 주역이 됩시다"라고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신약 성경 중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탄생 기록을 빼고 나면 공생애 이전의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공생애 이전의 아동기에 관한 유일한 본문입니다. 그 내용이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던 해에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부모님을 따라서 예루살렘 성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축제를 마치고 집으로 내려오는 길에 하룻길을 내려와서 보니까 예수님이 없었습니다. 분명히 그들과 함께 동행하고 있는 줄로 알았던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던 길을 되돌아서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면서 예수를 찾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에 도착할 때까지 예수를 찾지 못했습니다.

사흘 후에야 그들은 성전 안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보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들과 함께 앉아서 율법 문제를 토론하고 계셨습니다. 깜짝 놀란 예수의 어머니가 점잖게 나무랍니다.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곳곳을 찾아 헤맸단다." 어머니의 이 말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을 하십니다. "왜 나를 그렇게 찾아 다니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 집인 성전에 있으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주님의 이 대답에는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큰 암시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 부르고, 성전을 내 아버지 집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그 부모는 깨닫지 못했지만, 모친은 이 말을 마음에 두었다는 이야기로 오늘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곁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예수가 나와 함께 아니 계셨습니다. 나와 함께 아니 계시다는 사실조차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 가운데는 예수님이 계십니까? 여러분의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여정 가운데 예수님이 여러분과 동행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가치관속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소원하는 기도 속에, 비전 속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고난을 겪고 있는 고난의 현장에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지켜주고 동행하고 계십니까? 진정,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동해하고 계십니까?

구약 성경에 보면, 삼손이 드릴라에게 빠져서 힘의 근원이었던 머리카락이 잘려지게 됩니다. 자기 힘의 근원이 사라졌는데도 알지 못하고 힘깨나 써보겠다고 일어섰다가 두 눈이 빠지는 비극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기둥에 깔려 마지막을 맞게 됩니다. 성경은 삼손의 생애에 대하여 한 불행한 기록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난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없는 인생, 하나님이 없는 가정과 민족, 이것은 비극 중의 비극이요, 불행 중에 불행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바빌론에 멸망당하여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 그들을 힘들게 했던 것은 나라가 멸망했다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절망하게 했던 것은 자신들이 고향 산천을 떠나 머나먼 이방 땅에 포로로 잡혀왔다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정말로 그들을 힘들게 하고, 절망하게 만들었던 것은 하나님이 나와 유대 민족을 버리셨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가셨다는 생각은 그들로 하여금 절망하고 절규하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최대의 비극은 '하나님 없음'입니다. 보십시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를 잃었습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예수를 잃어버리고 엉뚱한 것들을 붙들고 산다면 이것은 분명히 가장 중요한 핵심 가치,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잃은 예수꾼, 예수 없는 예수쟁이들에게 남은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를 잃어버렸던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오늘 이 시대의 교인들이 예수 없는 종교꾼에 머물러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번잡한 생활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잃어버리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모여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민족이요, 백성임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들면 약 300만 명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말이 300만 명이지 이것이 얼마나 많은 숫자입니까? 지금 울산의 시민이 백만이 조금 더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보통 일입니까? 거기에다가 유월절에 잡는 제물의 피 냄새가 예루살렘 성 10리 밖까지 진동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길이 얼마나 분주하고 번잡했겠습니까?
나사렛에서 살고 있던 예수님께서도 열두 살이 되어서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일주일동안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는 곳곳마다 축제의 마당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월절의 축제가 끝나고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떠난 마리아와 요셉은 하룻길을 간 후에야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를 잃어버린 요셉과 마리아를 보십시오.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이라는 시골에서 올라왔습니다. 오랜만에 예루살렘에 올라온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을 것입니다. 세상에 볼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세상 것이 좋았으면 예수님이 옆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하룻길을 달려 왔을까요. 결국 그들은 번잡한 세상 문화에 푹 빠져서 예수님이 동행하고 있는지 조차도 몰랐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주위가 번잡하면 정신을 뺏기기 쉽습니다. 관심을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린 예수를 그만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게 예수를 잃어버릴 수 있는 아주 확실하고도 분명한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저 세상만 바라보고 가십시오. 세상의 번잡한 문화에 완전히 빠져보십시오. 취미도 좋습니다. 세상의 취미에 한번 정신없이 빠져보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100% 완벽하게 예수님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확실히 보증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러다가 지옥에 가는 것은 제가 책임을 지지 못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주위가 번잡하면 정신을 빼앗기기 쉽습니다. 바른 일에 관심을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세상 문화와 취미에 빠져버리면 우리는 예수 없는 예수쟁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확실한 한 가지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을 도외시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중심이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도가 세상에 있다고 세상 것만 바라보면 틀림없이 방황하게 되어 있습니다. 혼돈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세상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에서 있다고 해서 세상 것만 바라보면 교회는 혼돈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교회로서의 본연의 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문화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려야 합니다. 세상의 취미도 주님과 함께 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필경 예수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대인들이 얼마나 번잡한지 모릅니다. 저마다 바빠서 죽겠다고 합니다. 눈동자에 초점이 없습니다. 취미생활은 어쩌면 그렇게 많습니까? 주부들도 아침 식탁을 다 정리한 다음에 커피 한잔 끓여놓고 성경책 펼쳐놓고 하루일과를 묵상하며 기도하는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손에 설거지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또 다른 번잡한 일에 시달립니다. 산란하고 불안정하고 산만합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이 동행할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너무 집착해서 살다 보면 예수를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지금 보면 세상에 너무 집착해서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가지 일에 전념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지나치면 이롭지가 않습니다. 취미는 좋은 것이지만 지나치면 좋지 않습니다. 지나친 취미가 마침내 예수를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지금도 산 때문에, 낚시 때문에, 골프 때문에, 이 취미를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해서 예수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헛되고 헛된 것들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신기루와 같은 것들에 너무 매이지 마십시오. 가짜만 보고 살면 진짜를 모릅니다. 번잡한 세상 문화에서 벗어나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내가 정말로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 없는 예수쟁이가 아닌지 나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오늘의 복잡한 현대 사회 속에서 많은 성도들이 분주한 생활 속에서 정신없이 살다가 정작 예수님은 잃은 줄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시니까 그런 줄 알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차라리 잃은 줄을 알면 그래도 다시 찾고자 하는 소망이라도 있습니다. 더욱이 답답한 것은 잃은 줄도 모르고 사는 어리석은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나 교회의 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많은 행사를 준비하며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정작 신앙은 간 곳 없고 영적으로 지쳐 쓰러질 때가 많습니다. 주의 일을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복음의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비본질적인 것에 매달려 허우적거리다가 본질을 놓쳐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번잡합니다. 이것은 어른만이 아니고 아이들까지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아이들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아이들의 직업은 노는 일입니다. 이렇게 놀아야 할 아이들이 세살만 되면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어느 교육자는 어린아이들의 아이다움은 모래판에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학교는 놀이터의 모래판이라는 말입니다. 거기서 모래를 한 움큼 쥐어 봅니다. 그런데 모래알들이 모두 손가락 사이로 술술 빠져나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여기서 아이들은 비로소 철학을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아이들이 모래성을 높게 쌓아 놓습니다. 집도 쌓아 올립니다. 그때 힘센 아이가 와서 모두 무너뜨리고 도망갑니다. 그 아이의 행패를 이 아이는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화가 났지만 하는 수가 없어서 그냥 참습니다. 그때 이 아이는 거기서 삶의 질서를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오면 더럽게 흙장난을 했다고 어머니로부터 혼납니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집에 와서는 모래 장난을 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 마자 주머니에서 모래가 쏟아져 나옵니다. 양말 틈에서 모래가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면 어머니로부터 또 거짓말을 했다고 매를 맞습니다. 그때 이 아이는 거짓말은 좋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이 아이는 비로소 도덕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렇게 커야 할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너무나 조급하게 자랍니다. 너무나 분주하게 자랍니다. 그러다가 이 아이들이 더 커서 입시 때가 되면 생활이 더 분주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와는 아주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설득을 합니다. "교회에 잘 다니다가 대학에 떨어지는 것보다 잠시 쉬었다가 공부 열심히 해서 합격한 다음에 다니는 것이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된다" 그래서 아이들이 모든 교회생활을 중단하고 공부만 열심히 해서 대학에 갑니다. 그리고 대학에 합격을 한 다음에 교회에 가 보려고 하니까 이게 잘 안됩니다. 서먹서먹합니다. 아주 생소합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이 차츰 교회로부터 취미를 잃고 멀어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화려한 것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부질없는 일입니다. 예수를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 다른 것을 모두 얻으면 무엇을 한다는 말입니까? 과연 무엇이 더 중요한 일입니까?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번잡한 생활이 최고의 장애물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그래서 예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본문 44절에 보면 허둥대고 살아가는 인생들을 향한 비극적인 한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 4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했으나 예수는 동행 중에 아니 계시더라. 마리아는 예수가 요셉과 함께 있으려니 생각했고, 요셉은 예수가 마리아와 함께 있으려니 생각을 했던 겁니다. 당시의 유대인 풍습을 알면 우리는 이 말씀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 갈 때나 내려 올 때에 여자는 여자들끼리 남자는 남자들끼리 이야기하며 갑니다. 그런데 아이는 엄마 손을 붙들었다가 남자들이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아빠 손을 붙듭니다. 그리고는 조금 가다가 다시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엄마 손을 붙잡습니다. 그러니 내 곁에 없지만 마리아 곁에 있겠거니, 내 곁에 없지만 아버지 곁에 있겠거니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가 안보이네? 지 엄마한테 있을 거야. 그리고 하룻길을 내려오게 됩니다. 결국 둘 다 예수를 잃은 채 인생 길을 걸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날 때에 친척이나 동네 사람들과 함께 동행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대 교회에 교인들 중에는 예수 없는 신자가 얼마나 많아지는지 모릅니다. 큰 교회를 좋아하는 현대 교인들은 군중 속에 끼어서 함께 따라가다 보면 천국에 도착하려니 생각합니다. 내 아내가 열심히 기도하니까 아내 손을 붙들고 열심히 교회 왔다 갔다 하면 천국에 다다르려니 생각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니까 어머니를 따라가다 보면 천국에 도달하려니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현대 교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 쾌락을 구경하며 함께 즐기는 종교 도착증 환자들이라고 날카롭게 비평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거기에 나의 문제가 있고, 우리 모두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한 마을을 지나오며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한 집에 교패가 붙어 있습니다. 너무 반가워서 벨을 눌렀습니다. 마침 집을 지키던 새댁이 나왔습니다. 목사님께서 엉뚱한 질문을 남깁니다. "이 집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당황했던 이 새댁은 얼떨결에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이 가정은 장로님 가정입니다. 제 남편이 집사이구요. 저도 교회 집사입니다" "아니, 교회의 직분 말고 이 댁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엉뚱한 질문을 남기고 낯선 길손은 떠나갔습니다. 이 분이 떠나고 난 다음에 새댁의 귓전에 쟁쟁거리는 소리가 남아있습니다. "이 집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정말 내 속에 예수님이 계실까? 내 생각 속에 예수님이 계실까? 내 언어 속에 예수님이 계신가? 내가 행복해하는 이 심장 속에 예수님이 계신가? 내 우선 순위 속에, 가치판단 기준 속에 예수님이 계신가? 진지하게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나와 살아 주시겠거니 하는 막연한 상상이나 추측이 아니라 정말 내 삶 속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내가 걸어가는 삶의 자국마다 예수님이 내 곁에 계십니까? 내가 몸부림치고 고통하고 힘들어하는 그 삶의 현장에 예수님이 나를 지켜주고 계십니까? 내가 기뻐하는 그 기쁨 한 가운데 예수님이 계십니까?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이 곁에 있으려니, 뒤에 따라오려니, 앞서 갔겠거니 생각했으나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나를 따라 오도록 내 뒤에 팽개쳐 둘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사랑방이나 안방에 모셔놓고 살아가도 좋은 그런 분이 아니예요.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앞에다가 세워놓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라왔더라면 예수님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일하게 우리는 예수님 보다 내가 앞장서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보다 앞장서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인생을 살아갔더라고 하면 그래도 예수 없는 예수꾼 노릇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 길은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집에다 물건을 놔두고 와도 다시 집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어제 갔던 길이 궁금하면 다시 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 길은 되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인생은 연습도 시행착오도 없습니다. 한번 걸어가는 직선이 있을 뿐입니다. 완전한 일방통행입니다. 인생 길은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인생은 리허설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종착점에 섰을 때에 내 곁에 예수가 아니 계시더라. 이렇게 된다면 그의 인생은 정말로 망한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기억하십시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중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대에 우리의 절박한 문제는 잃어버린 예수를 다시 찾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없이 하루종일 간 것은 헛된 하루였습니다. 예수 없이 가는 만큼 헛수고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니 시간 낭비요, 정력 낭비요, 물질 낭비요, 심령은 근심이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예수 없이 되어지는 것은 그만큼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요, 헛수고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은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여기에만 평안과 만족이 있습니다. 예수 없이 가는 길에서 빨리 돌아서야 합니다. 때가 늦으면 늦을수록 손해입니다.

그렇다면 요셉과 마리아가 언제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은 예루살렘 성전을 떠났을 때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교회를 떠날 때입니다. 물을 떠난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예수님을 떠난 심령은 살 수가 없는 법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교회에 뿌리를 잘 내리는 성도가 마지막날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때로 교회가 모순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이야기는 여기 모이는 성도들이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보혈의 능력이 역사하기 때문에 이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교회가 하나라는 이야기는 여기 모이는 성도들의 마음이 모두 하나가 되기 때문에 하나가 아닙니다.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입니다. 교회가 영광스럽다는 이야기는 여기 서 있는 목사가 영광스럽기 때문이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에 교회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기독교 이천년 동안 모자라지만 부족하지만 거기에는 갈등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왔습니다.

초대교회 교부 키프리아누스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종교 개혁자 요한 칼빈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는 교회를 어머니로 섬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삶의 중심에 성전을 두고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할 때에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게을리하지 마시기를 축복합니다.

보십시오. 요셉과 마리아가 어디에서 예수님을 찾았습니까? 성전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전은 바로 예수님을 찾는 곳입니다. 오늘 주님의 전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내가 왜 교회에 왔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쾌락과 재미를 찾아오셨다면 정말 실수하셨습니다. 세상 밖에 나가면 쾌락과 재미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려고 여기에 왔습니다. 예수님을 보려고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오면 예수님이 보여야 합니다. 설교 속에서 예수님이 보여야 합니다. 찬송 속에서 예수님이 보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그렇게 낙심됩니까? 왜 불평이 생깁니까? 왜 미움이 생기고 원망이 생깁니까? 왜 자기 인정 요구에 이글거려야 합니까? 왜 자기 왕국을 무너뜨리지 못해서 근심하며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전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서, 찬양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우리 교회가 화려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를 통하여 이 성전을 찾아오는 성도들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로 충만하여 돌아가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상처난 심령들이 치유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갈증난 심령들이 성령의 생수로 충만하게 적셔지기를 축복합니다. 방황하는 심령들이 마음의 안정을 찾고 헌신의 사역에 동참하는 은혜가 있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계십니까? 주님의 손에 붙잡혀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목자 되시는 주님의 손에 붙잡혀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에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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