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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을 전하는 복이 최고 (마 5: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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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금성 목사

최근에 고위 공직자들이 연이어 사퇴를 하고 있습니다. 부도덕하게 재산을 모은 것이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올해에 들어서 벌써 장관급만도 4 명이나 됩니다. 이들은 모두 부동산 투기의 의혹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관직에 오르려면 능력도 중요하지만 깨끗해야 합니다. 그 만큼 우리 사회가 투명성을 요구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입니까?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에는 오직 모세가 하나님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모세 외에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마음으로 하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마음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느껴지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디서나 하나님이 계신 것을 느낄 수 있다면 어찌되겠습니까? 한시도 경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나를 보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나쁜 생각, 나쁜 마음을 가질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했지만, 거꾸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마음이 깨끗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마음이 지저분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우선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또 이 말 했다가 저 말하는 사람입니다. 또 부정과 불법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 속에는 쓰레기가 가득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첫째로 정직한 말을 합니다. 말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말이 정화되어 나옵니다. 상대를 생각하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더러운 말들이 나옵니다. 악독과 거짓이 나옵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마 15:11>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시 5:9>

속이 악하면 목구멍이 열린 무덤 같습니다. 그래서 그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썩은 쓰레기들입니다. 저주와 욕과 험담과 비판의 말들을 토해냅니다. 상대를 찌르고 할큅니다.

그러나 마음이 깨끗하면 축복과 칭찬의 말들을 합니다. 위로와 기도의 말들을 합니다. 정직하고 바른 말을 합니다.

사람이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 말이 거짓말이겠지요. 그런데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면 금방 표가 납니다. 그래서 거짓말이 들통 나기 때문에 거짓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양심이 못 견딥니다. 양심이 무뎌진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에 더러운 때가 묻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의 두 번째는 이 말했다가 저 말했다가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은 두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깨끗하면 두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언제나 한 마음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마음이 깨끗한 것은 일편단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돈과 명예가 삶의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두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면 그것은 한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야고보서 4:8>

두 마음은 마음을 더럽힙니다. 가정을 두고서 바람을 피우면 두 마음을 가진 불결한 사람이 됩니다. 성가대 연습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데, 갑자기 앞차가 끼어듭니다. 그러면 찬양하던 입술이 참지 못하고 금방 욕을 하게 됩니다. 성경 공부하던 사람이 술집을 드나든다면 그것도 두 마음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의 세 번째는 부정과 불법을 행하지 않습니다. 내적 청결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겉으로는 완벽한 종교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십계명과 구약의 율법들을 확대 해석해서 탈무드를 만들었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적인 교훈을 담은 유전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은 말할 수 없는 불결함과 부패가 가득했습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죄가 없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더러운 것들이 다 보였습니다.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눅 11:3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 23:27>

사람의 겉이 반듯하고 깨끗하면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아는 것이 많다고 마음이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 교양이 풍부하다고 마음이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오래 한다고 마음이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 깊은 곳에 사랑이 있는지, 용서가 있는지, 겸손이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어린 아이 때는 누구나 하얀 도화지 같은 마음을 받습니다. 사는 것은 그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잘못 그릴 수가 있습니다. 그림을 망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 잘못된 그림은 죄로 인해 생기는 얼룩입니다. 이 얼룩을 지우려면 특별한 지우개가 필요합니다. 그 지우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흘려주신 보혈의 피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우리의 죄를 다 씻어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는 자가 마음의 청결함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우리 영혼을 적실 때, 우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됩니다. 그 피의 능력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팔복 가운데 일곱 번 째 복은 화평케 하는 자가 받을 복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9>

화평케 한다는 것은 단순히 평화를 사랑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화평케 하는 자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현장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싸우기를 싫어하는 것과 평화를 만드는 것은 다릅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평화를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합니다. 손해를 보기도 하고,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직장을 그만두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는 곳에서 버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고통과 죽음까지 내놓아야 할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평화 만드는 법에는 폭력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화해의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결코 반항하거나 폭력을 쓰신 적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의 중보자이십니다. 인간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주님은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신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먼저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입니다. 누구를 화해시키려면 먼저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경험한 사람이 화해의 중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신경질을 잘 부리는 사람, 화를 잘 내는 사람,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사람은 화해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의와 교만에 가득 찬 사람도 화해자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화해가 아니라 싸움을 더 부추깁니다. 양쪽을 오가면서 마음이 상할 때 한 말을 옮겨다 줍니다. 편 가르기를 부추깁니다. 걱정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개천 밑바닥에 가라앉은 부유물들이 있습니다. 막대기로 저으면 다 떠오릅니다. 가라앉은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중보기도 해 준답시고 화를 일으키는 경우를 조심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를 경험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 거듭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 단계로 다른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 화해의 사명이 바로 전도입니다. 전도는 먼저 자기가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죄와 죽음과 절망의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와 기쁨과 평안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평안을 보여주면서 전도할 수 있습니다.

화해자는 다른 사람의 약점을 들추어 내지 않습니다. 허물과 죄를 용서하도록 도와줍니다. 상대방끼리 서로를 이해하게 합니다. 서로를 용서하도록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4-16>

예수님은 화목의 직책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주의 자녀로 칭함 받기에 합당합니다.

잠자는 아기의 사진입니다. 젖을 빨고 만족한 녀석이 잠들어 있는 모습이 참 평화롭습니다. 엄마의 품에서 잠들 수 있기에 아기는 안심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 품에 품어주시니 우리는 평화를 누립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인생에 주님의 평화가 언제나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다음 팔복 가운데 마지막 복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5:10>

팔복의 처음도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 천국이었습니다. 마지막도 천국입니다. 사실 천국보다 좋은 선물이 어디 있습니까? 천국 하나면 다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우리가 사모하는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복은 최고의 복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천국이 아니라, 의를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한답니다. 박해와 고난을 받는 것이 왜 복이 됩니까?

기왕이면 편히 살다가 천국가면 좋을텐데요. 교회 잘 다니고 예배 안 빠뜨리고 은혜 받으면 충분하지 않나요?

본문은 고통 받으면 복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핍박이 복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 고통 가운데 복이 따르는 고통은 단 한가지입니다. 의를 위해서 일하다가 고통당하는 경우입니다.

얼마 전에 한 여승이 천성산에 도룡뇽을 지키려고 100 일 금식을 했습니다. 어떤 주장을 펴기 위해서 죽음까지도 자처하는 고통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고통은 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여승의 의는 다른 의와 대치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미련해서 받는 고통도 핍박이 아닙니다. 지혜로웠다면 당하지 않을 곤욕이라면 그런 것도 의를 위하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집을 부리고 남을 무시하는 태도 때문에 고난을 받는 수도 있습니다. 광신적인 열성 때문에 받는 고난도 아닙니다. 자기의 실수와 죄 때문에 받는 고난도 아닙니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치면서 몸에 신나를 붓고 분신한 사람도 복 있는 고통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것, 이데올로기를 위한 것, 사회 정의를 위해 고통당하는 것도 복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이라고 다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의를 위해서 고통 받을 때 복이 있습니까?

11 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복 있는 고난은 예수님 때문에 받는 경우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당하는 핍박입니다.

우리는 지금 편안히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누가 핍박하지 않습니다. 반대하는 가족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 반대가 목숨을 위태롭게 할 만큼 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세계에는 기독교를 무섭게 핍박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공산주의와 모슬렘 세계가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 사회에서 쫓겨나거나 감옥에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복은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핍박을 즐겁게 견디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순교를 영광으로 여기면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이 땅도 그런 순교의 피로 적시면서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어떤 장애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합시다. 생명을 구원하는 이 일을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전도의 상이 크다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이 상을 받아 누리며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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