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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실한 자의 복 (잠 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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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일해 목사

옛날 어느 수도원에 아주 훌륭한 원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장은 많은 제자들 중에 한 제자를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그 제자는 외모도 형편없고 무엇을 가르쳐도 늘 쉽게 잊어버린 사람이었는데 원장은 그를 특별히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제자들의 불만은 대단했습니다. 그 불만이 쌓이고 쌓여서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마침내 모든 제자들이 마당에 모여서 원장에게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원장은 아주 조용히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내가 문제를 하나 내도록 하겠다. 그것을 풀어가지고 오면 내가 이 제자를 왜 특별히 사랑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하면서 원장은 제자들에게 아침 일찍 새 한 마리씩을 나누어주고는“아무도 안 보는 곳을 찾아서 그 새를 해가 지기 전에 죽여가지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절대로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죽여야 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해가 질 때쯤 되자 제자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해서 마당에는 죽은 새들이 쌓여 갔습니다. 그런데 원장이 특별히 사랑하는 제자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참 뒤에야 헐레벌떡 돌아오는 그 제자의 손에는 작은 새가 아직 산 채로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다른 제자들이“저 바보는 원장님이 무얼 시켰는지도 모르는가봐”하면서 비웃는 가운데 원장은 그 제자에게 왜 새를 죽이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제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원장님이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새를 죽이라고 하셨는데 아무리 으슥한 곳을 찾아가도 거기에는 하나님이 보고 계셨고, 아무리 조용한 곳을 찾아가도 거기에도 하나님이 보고 계셨어요. 그래서 새를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눈에 바보처럼 보여도 원장에게 사랑을 받던 한 사람의 제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적으로 느끼고, 섬기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제자에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 제자는 원장에게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사랑받기에 충분한 제자였습니다. 그 많은 제자 중에 이 한 사람만이 삶으로 기도하는 제자였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진실이 살아 있는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이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인격적인 성품 중에<성실>을 그 최고로 꼽습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소속된 공동체 생활을 중요시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동물적인 집단생활과는 다릅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인간관계를 바르게 하고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일을 행하며 사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생활을 유지하려는 데는 필요한 규칙이 있고 지켜야할 규범이 있습니다. 그것이 제대로 지켜지고 올바로 이행했을 때 얻고자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됩니다. 그 소중한 결실의 열쇠가<성실>입니다.

성실(誠實)이라는 말의 뜻은 모든 일에 정성스럽고 거짓되지 않은 참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진실이 우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성실한가 하는 것은 곧 그가 얼마나 진실한가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진실해야 정성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곧 진실한 마음과 참된 행위를 가진 자 만이 성실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오늘 성경에는“성실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으로 일러줍니다. 성실은 복입니다. 성실한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두 가지 인간의 삶의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는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자기가 꾀하는 악한 길로 끌어들여 망하게 유인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심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남이 나보다 더 잘 되는 것을 원치 않는 심리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두드러지는 정서인데 저가 나보다 잘 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가 나보다 더 성공하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그가 나보다 더 존경 받는 것을 참아내지 못하는 심리입니다. 이것을 우리는<가인 콤플렉스>라 합니다. 그래서인지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마음속으로는 남이 잘 되었을 때 느끼는 축하의 기쁨보다 남이 잘 안되었을 때 더 큰 희열을 느낀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인간의 악한 본성 중에 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더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봅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작정하고 남을 악에 빠뜨리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나쁜 마음이냐 하면 뻔히 잘못 되는 길인 줄 알면서도 유인합니다. 그가 망할 줄 분명히 알면서도 내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를 악에 빠뜨립니다. 그런데요 이런 사람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성경은 스스로 자기함정에 빠진다고 말씀합니다. 마침내는 자기가 망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의 무덤을 자기가 판다는 것이지요. 세상에는 이렇게 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건 악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모양이라도 버려야합니다.

그런가하면 또 하나의 삶의 부류는 성실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매사에 진실하여 삶을 살아가는 하나하나에 정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복이 주어진다는 성경말씀입니다. 이 둘 중 어떤 부류의 삶을 살아야할 것인가를 묻는 만큼 어리석은 질문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우문현답을 기대하며 여러분의 마음에 질문을 던집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어떤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까? 어떤 사람이 성실한 자가 받을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먼저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성실한 사람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수 없이 생각해 왔던 문제입니다. 자신에게 얼마나 진실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사람이 자기에게 진실하지 못하는 데는 가장 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체면이라고 하는 것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살다보면 잘못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과 잘못 된 것을 잘못 되었다고 인정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모르면서도 체면과 위신을 생각해서 아는 척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분명히 자기 잘못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내가 잘못했다 미안하다.”는 이 말을 못합니다. 아니 체면 때문에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불성실한 겁니다. 유교 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그 체면 때문에 죽어도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죽을 수밖에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모르고 아는 척 하는 것은 정말 큰 거짓입니다. 또한 잘못을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것 역시 큰 거짓입니다. 이 모든 것이 곧 자기 자신에게 대한 불성실입니다. 자신에게 성실한 것이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아는 건 아는 거, 모르는 건 모르는 거, 할 수 있는 건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습니다. 가진 것은 가졌고 못 가진 것은 못 가졌습니다. 못 가지고 가진 것처럼,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묘한 심리가 있어서 때로는 진실보다도 진실 아닌 것에 더 기분 좋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분들, 특히 여자 분들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이 무언지 아십니까?“젊어 보입니다.”혹은“예뻐 보입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냉정하게 생각해 봐야합니다. 젊어 보이는 것과 젊은것은 다릅니다. 어떤 게 진실입니까? 젊어 보이는 게 진실입니까? 늙은 게 진실입니까? 늙은 것이 내 실제요, 진실입니다. 그런데 젊어 보인다는 말에 기분이 좋습니다. 사실 젊어 보인다는 말을 잘 분석해 보면 그 속내는 늙었다는 소리거든요. 예뻐 보인다는 말 역시 정신 차려서 잘 분석해 보면 실제는 안 예쁘다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이 말에 좋아할 거 하나 없어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게 성실이요, 사람은 먼저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성실해야합니다.

또 하나 생각 할 것이 있습니다. 복 받을 사람은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성실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곳에는 어디든지 실수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실수라는 것이 곧 잘못된 결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런데 잘못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몇 가지로 나타납니다. 먼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기의 잘못만 구별해서 인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대부분의 모습입니다. 내 잘못만큼은 내 탓으로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깨끗이 정리를 하는 사람입니다. 현대인의 이미지에 맞게 반듯하게 사는 사람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는 대부분 인간미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내 책임만 다하면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는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길들여진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의 잘못도 내 탓으로 여겨 마음 아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식이 잘못되는 것도 내 탓이라 생각해서 마음 아파합니다. 남편이 잘못된 길을 가는 것도 깊이 생각해보니 내 탓인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픕니다. 물론 본인들에게도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빨리 제 자리로 돌아오는 데는“다 내 책임이다”,“나의 부덕함이다”,“나의 허물이다”이렇게 신실하게 나의 불성실도 인정하고 나의 책임을 돌아보아 그를 생각하는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실함이란 바로 이런 것이거든요.

지난 주중에 우리교회 여 집사님 한 분이 찻길을 건너다가 중앙선을 침범하여 마주 달려오는 승용차에 부딪쳐서 병원에 입원을 하셨습니다. 자동차 백미러에 부딪쳐 나동그라졌는데도 벌떡 일어나서 집사님이 운전자에게 하신 말씀이“미안합니다. 저 때문에 백미러가 깨어져서 어떻게 합니까?”했답니다. 자동차 백미러가 깨질 정도로 부딪치면 사실 많이 다칠 수도 있고 몸이 많이 아프거든요. 병원에 가서 들은 이야깁니다만 그래놓고도 깨진 자동차 고쳐 줘야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답니다. 자기 잘못으로 자동차가 깨졌다 싶다는 겁니다. 이런 마음에 정말 나쁜 운전자가 아니라면 양심이란 게 있기 때문에 더 미안한 마음이 들게 마련이고 더 큰 책임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 우리가 받지 못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삽니까? 바로 그것을 고맙게 여기는 마음이 그게 성실입니다. 제 잘난 것처럼 살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착각하지 말아야합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의 갚을 수 없는 신세를 지고 삽니까? 이것이 인생임을 알고 책임을 생각하는 것이 성실입니다.

또 한 가지 복을 얻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성실한 자입니다. 곧 자기의 받은바 신앙의 은사와 은혜를 알고 충실한 자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나라를 여행했습니다. 끼니때가 되어 식당에 들어갔는데 옆 사람이 먹는 요리가 매우 먹음직스럽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그 음식을 시켜 먹었습니다. 너무 맛있는 음식이라 먹고 나서 식당 주인에게 무엇으로 만든 요리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식당 주인의 대답이 대나무 순을 삶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며칠 동안이나 그 맛을 잊지 못했습니다. 입안에서 그 맛이 맴돌아서 견디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궁리하다가 집에 있는 대자리 잘라서 삶았습니다. 대자리 끓는 냄새가 가히 그 여행지 음식의 냄새 같았습니다. 그는 군침을 삼키며 솥뚜껑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대자리는 익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익지 않은 대자리를 보고 실망하여 투덜거리기를“나쁜 사람 같으니라고 그 나라 사람이 거짓말을 했어. 거짓말로 나를 속이다니, 괘씸한 사람 같으니라고.”여러분, 의외로 단편적인 지식이나 경험을 가지고 그것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신앙생활에도 이런 남의 흉내나 내는 정도의 신앙인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은 흉내가 아닙니다. 믿음이란 다른 사람을 보고 자라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바 대로 하나님 앞에 성실히 행할 때에 주어지는 은사요, 선물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오늘 내가 가진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 곧 모든 것이 은사요, 은혜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크냐? 작으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많으냐? 적으냐의 문제도 더 더욱이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곧 은사요, 은혜임을 알고 단지 우리가 성실할 뿐입니다. 청소하는 일이면 어떻고, 관리하는 일이면 어떻고, 운전하는 일이면 어떻습니까? 정말 위대한 사람은 성실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실한 자의 복>을 아십니까? 오늘 성경에 약속하신바 대로 성실한 자는 복을 얻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얼마나 성실하게 행하며 살아가십니까? 자신에게나, 이웃에게나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정말 성실히 살아가노라고 고백할 수 있는 신앙이라면 여러분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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