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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의 진리를 깨닫는 순간 (눅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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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최 종 천 목사
 
우리 인생에는 이전까지 전혀 체험하지 못했던 어떤 사실이나 사항을 발견함으로 말미암아 삶의 대전환을 이룰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보통 우리는 삶의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뉴턴이 사과나무 아래에서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볼 때 ‘아, 모든 만물은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구나’ 하고 깨달아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던가 아니면 BC 220년경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 들어가다가 자기 몸의 부피만큼 물이 밖으로 밀려나오는 것을 보고 부력의 법칙을 발견하였다던가 하는 것은 과학이나 또 여러 가지 우리 인생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발견일 것입니다. 과학뿐 아니라 인문학적 철학적 발견 및 깨달음들은 우리 인류의 살아가는 삶에 더 큰 더 많은 유익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과학이나 철학이나 인문학적 사실뿐 아니라 우리 생활에도 진리를 깨달아 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찾아와 어떤 상황과 여건을 통해서 진리를 깨닫게 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 우리 삶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날것을 먹다 불을 발견하여 그것을 익혀 먹게 되고 또 불을 발견하여 여러 가지 유익에 사용하게 됩니다. 석탄을 사용하게 되고 또는 원자력을 사용하게 되고 또는 전기를 사용하게 되고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종류의 에너지를 사용함으로 삶의 유익을 받습니다. 요즘 같은 많은 IT제품을 발견하여 편리한 삶을 영위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에 있어서 어떤 새로운 사실을 깨달아감으로 말미암아 우리 삶은 이전과는 체험해 보지 못했던 예상해 보지 못했던 다른 지경으로 나아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주님이 주시는 진리를 발견하게 되면 우리 삶은 전혀 다른 은혜의 세계로 초청을 받아 새로운 삶을 이루게 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된 것도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만 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마 영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어렴풋이 느끼리라 생각을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이 참 많습니다. 제가 오늘 1부 7시 예배를 드리는 이른 아침에도 또 지난번에 예배를 드린 9시 예배에도 참 많은 성도들이 새로 나오셔서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또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이와 같은 귀한 역사를 이루신 것을 볼 때 참 감사합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오실 때 옆에 계신 분들, 가까이에 사시는 분들, 친지 혹은 멀리 사셔도 또 가까이 평상시에 느끼던 분들, 또 직장에 있는 분들 여러 사람을 통해서 아마 초청을 받아서 이 자리에 오신 줄 압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분이 초청을 한 것이 아니고 목사가 모시고 오라고 해서 모시고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목사가 초청을 해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번 따지고 보면 목사가 초청을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초청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초청을 하셔서 오라고 하셨기에 목사의 마음에 우리 성도들에게 모시고 오십시오 하고 말씀을 드렸고 우리 성도님들이 여러분을 모시고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 여러분을 초청 한 것은 옆에 계신 성도님들도 아니고 이 앞에 있는 목사도 아니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초청하셔서 여러분들께서 이 자리에 오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이 자리에 부르셨을까요?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실 말씀이 있어서 우리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어린 아이들을 부를 때도 있지요. ‘얘 이쪽으로 좀 와봐라.’ 그리고 오면 ‘됐어 그냥 가봐’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거의 드물 것입니다. 실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 부르셨을 때 분명한 어떤 계획과 뜻이 있으셔서 부르셨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고,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온 것도 여러분의 발로 걸어서 오셨지요? 그러나 여러분 발로 걸어서 오셨다고 생각지 마세요. 우리가 어릴 적에 자석을 모래에 휘두르면 나중에 자석을 꺼낼 때 모래에 새까만 철가루가 붙어나옵니다. 철가루를 가져다가 종이에 툭툭 털어 놓고 우리가 그 밑에 자석을 대고 왔다갔다하게 되면 그 자석이 움직이는 것에 따라서 종이위에서 철가루가 춤추며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놀곤 했습니다.
우리의 발밑에 자석이 붙어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한 것처럼 주의 성령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교회를 향하여 오게 된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자리에 온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우리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이 있기에 그것을 주시기 위하여 주님이 우리를 이 자리에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시기 위한 주님의 부르심을 생각하면서 오늘 성경말씀을 잠시 묵상하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베드로는 게네사렛 호수에서 밤이 새도록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척박한 사막 기후지요. 그런데 이 게네사렛 호수, 갈릴리 호수라고도 부르는 이 호수는 바다와 같이 대단히 큰 호수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서 있어서 젖줄과 같은 이와 같은 원천이 되는 호수입니다. 거기서 물이 흘러들어가 각 곳에 물이 공급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로 먹고 살게 되는 물이 많은 호수입니다. 바다와 같은 호수에서 베드로는 늘 물고기를 잡고 사는 직업이 어부인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밤에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보셨지요? 여러분들이 물고기를 낮에 잡나 밤에 잡나 보시려면 밤에 바닷가에 나가 보시면 알 것입니다. 여러분 주로 낮에 물고기를 잡습니까? 밤에 물고기를 잡습니까? 밤에 가보면 불야성을 이루는 것처럼 배들이 바다에 가득 떠 있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것을 보면 참 어부들이 그 추운 날에도 그 추운 파도 마다하지 않고 그 추운 겨울바다에서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는구나 생각해보면 산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또 한번 해봅니다.
베드로도 오늘 밤에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이 새도록 물고기를 잡았는데 안타깝게도 거기서 평생을 물고기 잡는 직업을 가진 어부 베드로에게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이와 같은 날이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기운이 빠졌어요. 물고기를 잡아서 물고기를 팔아야 내 자식의 밥을 사주고 내 자식의 옷을 사주고 그리고 우리 가족이 살 수 있는데 오늘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으니 나는 어떻게 하나? 마음에 걱정가지고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수고의 아무런 대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허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차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오시더니 ‘깊은데 그물을 내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그 말씀을 듣고 마음에 무슨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아니 나는 평생을 직업을 어부로 산 사람인데 아니 예수님이 갑자기 나타나시더니 깊은데 그물을 내려라라니. 아니 깊은데 그물을 내린다고 고기가 잡히나 고기가 잡히는 것에 대해서 이 게네사렛 호수에서 내가 잘 아는데 이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이래도 저래도 해봐도 안 된다는 것을 베드로는 체험했기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 따라서 한번 깊은데 그물을 내려 보자 하고 그물을 털렁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밤새도록 한 마리도 고기를 잡지 못했는데 그물 가득히 고기를 잡아서 그물이 찢어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웃 배에 있는 동무들을 불러와서 같이 끌어당겨 고기를 잡았더니 한배에 가득 채우고 그 동무의 배에도 가득 채워서 두 배에 가득 물고기를 채웠습니다. 그 물고기를 가득잡고 나고 베드로는 주님께 인사를 해야 할 차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인사가 이상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저는 밤새도록 한 마리도 못잡았는데 주님이 말씀하셔서 그물을 던졌더니 이렇게 물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지 않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뭐라고 얘기 했는가 하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은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하는 물고기에 대한 기술이 있는 분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이 행할 수 없는 것을 하실 수 있는 자연을 능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그는 순간적으로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고기 잡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그는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십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리고 마침내 저희들은 그 잡아놓은 물고기 그리고 배를 뒤로 하고 예수님의 뒤를 좇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장면입니다.

즉 오늘 장면은 물고기를 잡는 장면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과 야고보를 예수님의 제자로 초청하는 제자 선택의 장면인 것입니다.
이런 장면 속에서 우리 인생의 무엇인가를 깨달아가는 순간 우리 인생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깨달아감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우리 삶이 바뀌어지며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깨닫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성경 가운데 첫 번째 깨닫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발견할 때 인간들은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베드로는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밤이 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한계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평생 동안 물고기 잡고 사는 이와 같은 어부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는구나. 일찍 일어나며 늦게 눕고 수고의 떡을 먹어도 헛된 것이 우리의 삶인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분당 톨게이트 7시면 벌써 길 막히기 시작하지요. 전에는 7시 30분, 요즘은 7시 조금 있으면 더 일찍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일찍 나간다고 해서 일찍 들어오십니까? 또 늦게 들어와야죠. 늦게 들어온다고 해서 무엇인가 손에 쥐어지는 게 있습니까? 아무것도 쥐어진 것 없고 그저 허슥한 어깨 가지고 그저 힘없이 벨을 누를 때 '우리의 인생이 참 힘들구나'라는 것 느낄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 인생은 자기 자신이 아무리 수고하고 애써도 이루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과 수고와 시간을 쏟아도 이루지 못하는 절대 한계의 때를 느끼게 됩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보니 베드로는 밤이 맞도록 수고를 했지만 아무것도 얻은 것도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의 인생은 이와 같은 한계를 맞이할 때가 있는데 이와 같은 한계를 발견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게 있어서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뜻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의 국면으로 전환하라는 뜻인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안 되면 다른 것으로 전환하라는 하나님의 의미임을 우리는 보게 된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는 자기 자신이 열심히 물고기를 잡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제 주님의 은혜로 물고기 잡고 나니 그의 인생에는 새로운 깨달음의 눈이 떠졌던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가 열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 한계의 지경에 다다르게 할까요? 인간은 조금만 여지가 있어도 주님께 나아오지 않고 자신의 방법 다 사용해 본 다음에 그 다음에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을 봅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 도망을 칩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저기 골목의 끝이 벽이에요.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하겠습니까? ‘야 이거 잘못 들어섰다.’ 생각해서 뒤로 돌아서서 잘못했습니다 하고 그 사람에게 붙잡힙니까?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막다른 골목이 있으면 그 골목 끝까지 가보고 나서 그 다음에 더 갈 때가 없을 때 거기서 붙잡히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조금이라도 갈 곳 있으면 그곳까지도 가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한계지경까지 이르게 하셔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되는 경우를 봅니다. 사람은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합니다. 갈 수 있을 때까지 갑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순간까지 몰아가셔서 마침내 우리들에게 대전환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는 그물질 해봐야 소용이 없고 이제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안될 이와 같은 절명의 순간에 몰리게 되니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한계를 발견한다는 것은 아픈 일이지만 이 순간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는 귀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일에 최종적인 한계를 느낀다, 주님이 나에게 찾아오셔서 나를 만나주시고 나에게 무엇인가 새로운 은혜를 주신다라는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이 믿음의 백성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나 자신의 한계를 발견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감사한 일입니다. 많은 경우에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면 부끄러워하거나 아니면 극단적으로 삶을 포기하고 좌절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들에게 있어서 좌절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음악을 했는데 다른 사람보다 몇 배 노력했는데 음악적인 재능이 없었던지 그가 일정한 수준에 이르지 못해요. 그 사람이 마음을 바꿔서 ‘이게 내 길이 아닌가봐.’ 생각해서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일정한 수준에 이르니 그는 재능을 발휘해서 정말 훌륭한 작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이 사람에게 있어서 음악은 한계지만 그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심으로 그에게 빛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임을 우리는 봅니다. 인생을 근본적으로 아무리 애써도 되지 않을 때가 있으니 그러나 그때는 우리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의 길을 열어주시는 은혜임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물고기 잡았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어요.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물고기를 많이 잡았어요.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물고기 잡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그의 인생에 진리를 발견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는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았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 베드로가 물고기 잡아서 돈을 벌고 살았다면 우리가 베드로의 이름을 알기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물고기 잡아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놔두고 예수님을 좇아 제자가 된 결과 그는 예수님 좇아 다니다가 순교하고 죽었지만 그 베드로는 믿음의 조상으로서, 믿음의 선배로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도전을 주고 우리의 삶 가운데 용기와 소망을 주는 사람으로 남겨져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한계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시고 방향을 전환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알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새로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을 부르셨어요. 이 가운데 모든 사람들이 번연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마음속에는 많은 일들이 있을 줄 압니다. 근심하는 이들, 기뻐하는 이들, 마음이 무거운 이들, 오늘도 예배 끝나고 급히 달려가야 할 이들, 많은 각각의 사정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모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인생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수고하고 애쓰는 것만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내 자신의 한계를 보았습니까? 좌절하지 마시고 주님을 만날 기회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베드로는 자기의 한계를 보았을 때 주님을 만나게 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새로운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어떤 때에 우리가 인생의 진리를 깨닫습니까? 예수님의 능력을 발견할 때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발견한 이후에 이루어지는 주님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자기는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주님께서 말씀 한마디 하니, 그대로 실행하니 물고기를 두 배나 가득하게 잡았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능력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있어서 주님의 능력을 깨달았다는 것은 주님은 물고기 잡는 것을 잘 가르쳐주시는 분이야라고 깨닫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물고기 잡는 것을 가르쳐주는 분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인생의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생의 모든 일은 주님의 말씀대로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에게는 진정한 지혜가 있었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내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는 물고기 잡는 분으로 주님을 파악하지 않고 인생의 참된 진리를 가르쳐주는 분으로 그리고 인생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으로 그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학교 다니면서 배우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독해력이지요. 어떤 지문을 읽고 그 지문 내용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이 독해력이 있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람과 대화할 때도 저 사람이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도대체 이러저러 말하는데 무슨 의도를 가지고 말하는가? 나에게 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들에게 독해력이 아닙니까?
여러분도 오늘 설교말씀 듣고 가서 ‘아, 오늘 목사님이 무슨 말씀하셨어?’ 이렇게 얘기하는데 여러분 뭐라고 얘기하시겠습니까? 단 한마디 목사님이 오늘 이런 말씀하셨어라고 마음에 요약할 수 있다면 그것은 대단히 훌륭한 독해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엉뚱하게 본질을 놓치고 어떻게 지엽적인 한마디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거죠.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진정한 독해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고기 잡게 해주는 분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앞에 베드로가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우리를 바꾸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변화를 이루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바꾸기에 충분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발견한 후에는 그 삶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으로 전환할 만큼 그 깨달음은 획기적이고 절대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너희가 사람을 취하는 사람이 되리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배를 놔두고 가득 잡은 물고기를 놔두고 그리고 예수님을 좇았던 것입니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밤새우던 사람이 물고기 가득 잡았는데 그 물고기를 놔두고 예수님을 좇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큰 획기적인 변화였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발견하니 물고기 한두 마리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 삶을 다 바쳐서 내가 예수님을 따를 가치가 있다는 것을 그는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잠을 자지 않고 쉬지 않고 일을 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내가 돈 한번 벌어서 잘살아봐야 되겠다. 내가 권력을 쥐어봐야 되겠어. 내가 원하는 자리에 올라가 봐야 되겠어. 그것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로운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돈 버는 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야. 내가 어떤 자리에 오르는 것이 전부는 아니야. 내가 인간답게 살아야 되지 않겠어? 내가 돈을 벌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내가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돈을 써서 어떻게 무엇을 이루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려지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그는 또 다른 세계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내가 돈을 벌어서 그리고 내가 어떤 선한 일을 하고 어떤 위대한 일을 하는 것도 좋아. 그런데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어차피 내 인생이라는 것은 한번 마쳐지게 될 것인데 그 다음은 무엇일까? 내가 이 세상 떠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내 인생도 얼마 남지 않았는가? 라고 생각하면 그 다음에 무엇인가 또 다른 영원한 영적세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이런 인사했다고 합시다. 여러분 내년에 이 자리에서 꼭 만납시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 교회도 참 장례가 많습니다. 일년에 150가정 이상이 장례가 있습니다. 저는 장례를 많이 치르는 목사가 되다 보니 참 이상한 게 한 가지 생겼는데 삶과 죽음의 간격이 좁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살았다 죽었다 하는 일이 그렇게 멀리 있는 얘기가 아니라 아주 근접해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숨 쉬면 살아있는 것이고 갑자기 숨 멎으면 죽어있더라고요. 어제까지 ‘안녕하세요. 목사님’ 인사하던 분이 갑자기 오늘은 싸늘해져서 도무지 인사 못할 분이되더라고요. 어제까지 건강한 분이 오늘 갑자기 여기가 이상한데요, 하더니 병원에 갔다 오시더니 그 순간 이후로 점점 기울어져 얼마 후에 이 세상에 안 계시더라고요. 참 사람이 아픈 것도 이상하더라고요. 어제까지 건강하게 뛰어다녔는데 오늘 갑자기 좀 이상해 하더니 갑자기 기울어져 가시더라고요. 지난번에 뉴스 보다가 암센터 소장되시는 분이 나오셔서 발표하시는 것 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암에 걸릴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압니까? 우리가 암에 걸릴 확률은 50%입니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설명해서 더 보충하기를 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부부 중에 둘 중에 한 사람은 암으로 죽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설명의 요지는 그러니 우리들에게 누구나 암은 다 걸릴 수 있으니 혹시라도 우리에게 암이 왔을 때 특별한 것이다 생각하지 말고 누구나 다 걸릴 수 있는 것이니까 마음 편안하게 먹고 잘 관리하며 다스리다 가는데까지 가다 이렇게 건강하게 지내십시오 하는 말이었습니다. 마음 편안하게. 그런데 우리 생각해봐요. 정말 둘 중에 하나가 암으로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이 세상에서 자기 건강을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제가 심방을 하다보니 소아암 병동도 있었습니다. 어린이들만 암으로 입원해있는 이런 병동도 있더라고요. 저도 생후 얼마 안된 이런 아이 세례주고 바로 세상 떠난 경우도 제가 목사로서 겪었습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정말 말할 수가 없더라고요. 세상에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아서 그 아이가 뭐 어떻다고 세상을 떠납니까? 젊은이도 어린이도 나이 드신 이도 어느 날 문득 주님께서 우리 부르시면 가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분명히 뒤에 무슨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한번쯤 생각해 보지 않겠습니까? 과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숨 멎으면 끝인가? 아니면 그 다음에 무엇이라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 우리 한번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으시렵니까? 우리들에게는 이제 이 세상뿐 아니라 영원한 세상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는 주님을 보고 그의 능력을 깨달았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어느 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어요. ‘하나님 아버지 정말 내 딸이 내 아들이 꼭 합격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정말 했어요. 합격해서 감사합니다라고 끝나는 것입니까?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시고 인생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군요.’ 라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깨닫고 합격시켜주셔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있어서 감사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진정한 발견이라 생각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지금까지 추구하던 가치보다 더 고귀하고 아름다운 가치를 발견하게 되면 우리 인생은 진정한 새로운 순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다른 사람들이 배에 대한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왜 예수님을 좇았을까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귀한 것을 그들은 발견했기 때문이에요.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가 생각이 없어서 그가 가지고 있는 배를, 물고기 잡은 것을 버려두고 좇아갔겠습니까? 더 귀한 것이 있으니까 좇은 것입니다. 이전에 추구한 가치보다 더 고귀한 가치가 있으니까 좇은 것입니다.
자 따라서 합시다. ‘상위가치, 하위가치’ 사람은 하위가치를 가지고 누리다가 어느 날 문득 상위가치를 발견하게 되면 하위가치를 그냥 버리고 상위가치를 향해서 좇아갑니다. 그런데 이 하위가치에 대해서 아무런 미련이 남지 않아요.
여러분 금덩어리 좋아하죠? 안 좋아하세요? 금덩어리를 주머니에 가득 넣었어요. 금광에 가서 금덩어리를 가득 넣었어요. 주머니에 넣을 데가 없으니까 손에 가득, 어디다가 더 넣을까요? 넣을 데가 없잖아요. 입에도 문다고요? 손에 가득 가지고 너무 좋아서 갔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해요. 손에 있는 금덩어리를 다 버리는 거예요. 주머니에 있는 금덩어리를 다 버려요. 왜 그럴까요? 이 사람은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니 금덩어리보다 다이아몬드가 더 비싸니까 그걸 가지고 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지고 갈 수 있겠어요? 주머니에 있는 것 꺼내 버려야 가지고 갈 수 있지요. 그 금덩어리를 막 버립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미친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 미치지 않았어요. 그 사람은 하위가치를 버리고 더 귀한 상위가치를 소유하기 위해서 하위가치를 다 버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이전에 그렇게 귀하던 그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고상한 진리에 비하면 그것을 다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내게 그것은 배설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순간 내가 그렇게 추구하던 삶의 모든 것들이 정말 별것이 아니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삶이라는 것이 언제든지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원하는 것 이루면 그렇게 기쁠까요? 아닌 것 같아요. 사람은 절대 가치 속에서 기뻐하지 않고 언제나 상대적 비교 속에서 자기 기쁨을 감정으로 느끼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했었습니다. 분당에 처음 와서 보니 심방하면 너무너무 기뻐하셨어요. 분당에 살던 사람들 100대 1, 200대 1 당첨이 돼서 들어온 분들이니까 ‘목사님 저는 하나님이 우리 집을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저는 이제 집에 대한 욕심은 없어요.’ 그러더니 몇 달 지나서는 그 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다른 집에 심방도 가고 다른 집에 놀러도 가고 그러더니 ‘아니 우리 집은 왜 이리 좁은 것일까요?’ 그렇게 얘기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우울한 표정을 짓습니다. 사람은 절대 가치 속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상대적 평가 속에서 무엇인가 마음에 느낌을 가지나 봅니다. 그렇게 느끼는 한 우리 기쁨은 영원히 유지될 수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렸죠. 제가 여러 성도들 돌아보면서 행복해하는 사람이 누군가?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어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감사하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면 아무리 많이 가져도 아무리 편안해도 감사할 줄 모르면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추구한 것보다 더 귀한 가치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새로운 깨달음을 이루고 주의 역사를 이룹니다. 더욱이 우리 인생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삶의 열정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우리 인생의 변화를 이루게 됩니다.
오늘 베드로, 안드레, 요한은 마음이 뜨거워졌어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했을 때 ‘나를 따르라 내가 너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때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그냥 예수님을 좇은 것입니다. 배도 놔두고 잡았던 고기도 놔두고 예수님을 좇았어요. 왜냐하면 그들에게 뜨거운 마음의 열정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인생에는 선택이 중요합니다. 선택이라는 것은 언제나 기회가 주어졌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선택을 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그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다 때를 잃으면 그에게는 다시 그 때가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때를 주셨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선택해야 합니다. 요즘 자동차를 타고 가다 보면 먼 산을 바라보면 왠지 모르게 아주 따스한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겨울에 그 날카롭던 그 가지들이 왠지 모르게 좀 부드러운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이제 조금 있으면 요만한 싹이 날 것입니다. 나뭇잎이 날 것입니다. 그것이 조금조금 더 커지면서 색깔이 점점 파래질 거예요. 아마 왠지 모르게 느낌상으로 아 온 세상이 녹원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름이 되면 이파리가 커져서 온 세상이 푸른 녹원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유리창이 있지요. 유리창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게 되지요. 유리창이 얼룩져 있으면 뿌옇게 보일 것이고 깨끗이 닦여 있으면 깨끗하게 보일 것입니다. 내 마음의 창에 의해서 바깥세상을 우리는 구별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의 창을 닦아야 합니다. 내게 있는 죄악의 요소를 제거해내고 우리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을 영접하면 내 마음의 창이 닦이고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은혜로 보여지게 됩니다.
여러분 참 이상하지요?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내가 선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기쁨과 감사함이 내 마음에 넘치면 세상이 아름다워 보여요. 저는 우리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의 마음에 느끼기를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세상의 자연만물을 보면 참 아름답게 느껴졌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는 왜 이렇게 나쁜 사람들만 살아. 세상에는 안되는 일만 많아. 세상에는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일만 많아.’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주님의 은혜가 있고 사랑이 있고 꿈이 있고 소망이 있으니 그래도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며 아름답게 살 수 있어.’ 라는 소망을 가지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저희 교회에 처음 나오신 성도들이 꽤 많으신 것 같습니다. 앞에 꽃을 놓고 계신 분이 많을 것을 보니 새로 온 성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진심으로 반갑고 환영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아세요?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김으로, 약속을 어김으로 죄를 지었어요. 인간들이 죄를 지니까 인간들에게 다가오는 것은 죽음과 영원한 수고와 땀과 고생이에요. 인간들은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어요. 죽음의 세계에 살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인간들을 사랑해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어요.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못 박아 버리고 우리는 영원히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살아나심으로 죄의 권세를 이기시고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자유롭고 죄의 권세를 이기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예수님을 믿으면 소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의 백성이 되어 하늘나라의 아름다움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 번 살다 가는 것은 정한 이치지만 우리가 이 세상 떠났을 때 무엇인가 새로운 세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를 믿을 때 그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 하나님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세계에 여러분들을 초청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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