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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처음 사랑을 간직하라 (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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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에베소. 지금은 에훼스(EFES)라는 이름의 도시입니다. 원래 두 개의 산맥에 의해 형성된 카이스트로스 강 가, 구석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아시아 최초의 도시요, 최대의 도시로서 부귀와 영광을 누린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는 알데미스 즉 다이아나 신전으로 유명했는데, 당시 많은 금, 은 세공업자들을 고용하여 다이아나 여신의 작은 신상을 만들어 판매하였습니다. 그러다가 262년, 다이아나 신전은 불탔으며, 은으로 만든 신상의 판매는 폭락했고, 그 후 신전은 다시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에베소는 당시 항구 도시로서 에베소의 전성시대에는 당시의 초대형 선박들이 드나들었으며 소아시아의 중소도시들과 육로소통이 가장 잘되는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항구가 모래로 메워졌고. 그래서 해안으로부터 10km 멀어지게 됨으로 말미암아 도시의 중요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사도행정 18:19-21에 보면,
사도 바울께서 2차 전도여행에서 돌아올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고린도에서 배를 타고 에베소에 들러 유대인의 회당에서 변론하고 가이사랴로 갔습니다. 이때가 52년경으로 추정됩니다. 그때 사람들은 바울에게 좀 더 오래 머물러 달라고 청하였으나 바울은 거절하고 “하나님의 뜻이면 내가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하고 작별인사를 한 뒤에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3차 전도여행 때인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이르러 사람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 회당에 들어가서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강론하고 권면하면서 담대히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마음이 완고하게 되어서 믿으려 하지 않고, 온 회중 앞에서 이 ‘도’ 곧 복음을 비난하므로, 바울은 그들은 떠나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나가서 날마다 두란노서원에서 강론하였습니다. 이런 일을 이태 동안 하였습니다. 지금은 셀수스 도서관이라고 있는데 그 곳이 두란노서원이라고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손을 빌어서 비상한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이 몸에 지니고 있는 손수건이나 두르고 있는 앞치마를 가져다가 앓는 사람 위에 얹기만 해도 병이 물러가고 악한 귀신이 쫓겨 나갔습니다.

그런데 귀신 축출가로 행세하며 떠돌아다니는 몇몇 유대사람이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힘입어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다.”하고 말하면서 악귀 들린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귀신을 내쫓으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스게와라는 유대인 제사장의 일곱 아들도 이런 일을 하였는데, 오히려 귀신이 그들에게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지만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요?”하고,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짓눌러 이기니, 그들은 몸에 상처를 입고서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였습니다. 이 일이 에베소에 사는 모든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에게 알려지니 그들은 두려워하고 주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도가 된 많은 사람이 와서 자기들이 한 일을 자백하고 공개하였고, 마술을 부리던 많은 사람이 그들의 책을 모아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살랐는데 그 책값을 계산해 보니 은돈 오만 닢에 맞먹었습니다.
그 무렵에 데메드리오라고 하는 은장이가 은으로 아데미 여신의 모형 신전들을 만들어서 적공들에게 적지 않은 돈 벌이를 시켜주었는데, 사도 바울께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은 신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많은 사람을 설득해서 마음을 돌려놓았습니다. 그래서 데메드리오는 사람들을 격동시켰고, 이들은 격분해서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 여신은 위대하다”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래서 온 도시는 큰 혼란에 빠졌고, 군중이 바울의 동행자인 마케도니아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서 한꺼번에 극장으로 몰려 들어갔습니다.

그 극장은 지금 야외 원형극장으로서 그대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약 2만 4천명을 수용할 수 있답니다. 쭉 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저 밑에서 노래하거나 말하면 꼭대기에 앉아있는 사람에게도 똑똑히 둘렸습니다.
이곳 에베소에 교회가 세워지고 여기에 상업 차 왔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들이 가면서 골로새,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 등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에베소에는 성모마리아 교회와 사도 요한의 교회의 흔적이 있습니다.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바울이 순교 당한 후 사도 요한 곧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랑 받는 제자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이 곳에 와서 전도하면 노년을 보냈던 것입니다. 변화했던 에베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요한의 무덤이라고 전해진 곳에 교회가 세워져 있던 유적들이 있었습니다.

요한의 밧모 섬에서 계시던 편지를 기록하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때는 에베소교회가 생긴지 40년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가 설립도던 당시와는 다른 세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교회를 세우고 봉사하던 세대들이 가졌던 뜨거운 감격과 자발적인 활동의 기쁨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선대들이 가졌던 그리스도를 위한 사명감도 없었습니다.

이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칭찬 받는 교회입니다.
(2절) “나는 네가 한 일과 네 수고와 인내를 알고 있다. 또 나는 네가 악한 자들을 참고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과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 낸 것도 알고 있다.”
(3절) “너는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견디어 냈으며 낙심한 적이 없다.”
(6절) “그런데 네게는 잘하는 일이 있다. 너는 니골라 당이 하는 일을 미워한다. 나도 그것을 미워한다.”
데살로니가에서 1:2-3엔, “우리는 여러분 모두를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기 그리스도인들이 의당 지녀야 할 품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와 사랑에 의한 수고 그리고 소망을 위한 인내 입니다.
믿음은 행동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말이나 교리에 지나지 아니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마틴 루터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행함을 이야기하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취급했습니다. 야고보서 어디에도 예수 믿으므로 구원 받는다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곳곳마다 믿음을 강조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12, “그러나 그들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인 요한복음 20:31,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께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동안 믿음과 행함을 놓고 논란이 있었습니다.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병자 고치시는 장면을 보십시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시면서 고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열 두 해 동안 혈루 증으로 앓아온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나을 텐데 하는 생각으로, 예수께 나아가 정말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더니 그 몸이 나은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여인과 같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나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렇게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며 기도해 주는 사람들이 기도해주어도 안 나으면, 그 사람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때로, 예수님의 치유에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가 없습니다.
회당에 손 오그라진 사람. 그냥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라.” 말씀하셨고 그래서 손을 내미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이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셔서 바다와 바람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바다와 바람이 잔잔해 진 것을 보고도, “이 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하고 말합니다.
때로는 믿음이 있어 주님의 은혜를 입었는가 하면, 때로는 믿음이 없음에도 주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이 성전의 ‘아름다운 문’이라는 곳에 앉아서 구걸합니다. 어느 날 그 앞을 지나가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벌떡 이러나 걸었습니다.
그는 믿음이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 앞에 서셨다면, 혹 소문이라도 들었으니, 눈곱만한, 그야말로 크기를 따져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었겠지만,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난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걸어 다니는 것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으며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이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였고,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비로소 믿음을 가진 겁니다.
반면에 누가복음에 나오는 열명의 나병환자를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지나가자,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소리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깨끗하게 해주셨습니다. 어떻든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친 것은 그래도 예수님을 눈곱만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고침 받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 아홉은 제 갈 길로 가버렸습니다. 이방사람 한 사람만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 사람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 영광 돌리러 되돌아 온 사람은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 그러 다음에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믿으면 되는 거 아니냐?” 생각합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그랬는데, 그래서 예수 믿으면 되는 거 아니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7:21에서 예수님은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거기 24절에서는,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하셨고 26절에서는 “나의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둘 다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은 듣기는 들어도 행함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은 그 집이 반석위에 세운 집이기에 무너지지 아니했지만,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행함이 없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지은 집 같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태복음 5:17)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5:2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말의 고백이 전부가 아닙니다. 믿음은 마음의 확신만도 아닙니다. 말의 고백으로만 생각하고, 마음의 확신만으로 생각하니까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사도행전 2:38에서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회개 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은 무엇입니까? 선물이니까 받아서 어디 기념품으로 보관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그것 꺼내보고 나도 예수 믿어 죄 용서 받았다 그러라는 겁니까? 마치 세례 받으면 주는 세례증서 같은 겁니까?
사도행전 1:8에,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 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능력입니다.
그러한 믿음의 행함이 밖으로 나타나는 거기에 사랑의 수고 입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그런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 그리고 소망에 대한 인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참고 어려움을 견디면서 믿음을 잘 지켰습니다.
사실 당시의 신앙생활은 목숨을 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참고 견디어 냈습니다.
사실 어떤 선한 일을 한다고 해요 때로 낙심할 때 있잖아요? 신앙생활 그것이 곧 복 받는 일이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일인 줄 믿지만 그래도 낙심할 때 있잖아요.
사랑하는 손자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병원에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 밖에 이 아이를 살려 줄 분이 없다고 믿었으니까요. 처음엔 조금씩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더 이상 차도가 없는 겁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조금이도 나아지게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분이 낙심하셨습니다.
이건 이분만이 아닙니다. 누구나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도에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에베소 교인들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그 당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아있을 때 예수님 재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예수 믿는 사람은 숱한 핍박으로 고통당하며 죽어가고 있는 겁니다. 얼마든지 낙심할 수 있지요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믿었습니다.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예수께서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군가 나를 알아준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겁니다. 더욱이 혼자서 낑낑대며 수고 했는데 누군가 그것을 알아서 “참 수고 많이 하셨지요,” 그렇게 말해 주면 기쁜 겁니다.
사람들은 그래요. 남이 수고해도 수고했다고 하지 않아요. 심지어 다른 사람들은 수고 했다고 말하는데도 “수고는 무슨 수고 저 할일 지가 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주님은 알고 계신 답니다.
그것 뿐 인가요?
에베소 교인들은 악한 자들과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 니골라 당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불의와 죄악에 대해 조금도 분노를 느끼지 못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죄에 대해 민감해야 합니다. 바늘 하나만 훔쳐도 가슴이 쿵쾅거려야 합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그랬어요.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이단들을 파악하여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니골라 당. 사실 이들이 누군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도 그들을 미워한다 하셨지만, 왜 미워해야 하는지 거기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다만 계시록 2:14-15에 미루어 보면, 이들은 이방신들에게 제사 했던 음식을 먹게 하고 음락을 행하도록 가르쳤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 2:14-15, “너희 가운데는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발람은 발락을 시켜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 올무를 놓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란한 일을 하게 한 자다.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버가모 교회는 그들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이방신 앞에 드려진 제물을 아무 생각 없이 먹었습니다. 음란한 일 역시 아무렇지 않게 행했습니다. 그래서 버가모 교회는 그 일로 인해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그 니골라 당을 미워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방 신 앞에 드려진 재물을 먹지 않았습니다. 음란한 일 역시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들 미워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성결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뒤따라 주님의 나무람을 듣습니다.
4절,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랬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믿음의 행위가 있었습니다. 사랑의 수고도 있었습니다. 소망을 가지고 인내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참고 견디어 냈으며, 악한 자들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 니골라 당의 교훈 등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그들의 신앙에는 사랑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 사랑이 없는 수고 사랑이 없는 인내가 되었습니다.
아마 어떤 분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냐고 말할 겁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 수고, 인내가 가능합니다.
한 아내가 남편을 위해 뭔가 하는데 소문날 정도로 잘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이도 할 수 있는 겁니다. 아내로서의 임무에 대한 책임감만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겁니다.
신앙인들.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습관이 되어버립니다. 의무나 책임감에서 합니다. 물론 의무와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집사는 집사로서, 권사는 권사로서, 장로는 장로서의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 그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동기이어야 합니다.
분명,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소망에 대한 인내 이 세 가지는 셋이지만 하나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을 나무라십니다. 왜 믿음이 없느냐? 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잃었느냐?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구원 받는 거 아닙니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2:14-17,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이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1,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가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 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소유를 나누어 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불효자식도 아버지를 아버지로 믿습니다. 어머니를 어머니로 믿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 아버지, 자기 어머니를 모독하거나 나쁘게 하면 화를 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그 부모를 무시합니다. 부모는 먹을 것이 없는데도 자기들은 배불리 먹습니다. 부모는 헐벗었는데도 자기들은 명품만 두르고 삽니다. 그래서 불효자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정말 우리가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 고통당하셨고 나를 살리기 위해 당신이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을 믿으면서도, 나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시간이 짬이 나면 그때 예배하고 예수님을 위해 뭔가 하는 그럴 수 있겠어요? 우리가 정말 믿는다면, 내 쓰고 싶은 거 다 쓰고 그래도 남으면 그것으로 예수님께 드릴 수 있겠어요?
혼자 사는 여인이 드린 두 렙돈. 그 작은 헌금을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이유가 뭡니까? 그 여인은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적게 드려도 되는구나.” 하는 거 아닙니까?
사랑이 없으며 믿음도 껍데기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겁니다. 없는 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수고도 그래요. 사랑의 수고이어야 합니다. 자기의 공로를 나타내고자 하는 수고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 “그래도 사랑하니까 수고 하지요.” 라고 합니다.
만약 주일 낮 주방을 들어와 보니 사람이 부족해요. 그래도 오늘은 내 당번이 아니라고 안 들어가는 사람 있어요. 또 들어가서 봉사는 하면서 왜 오늘 당번이 빠져서 내가 수고하느냐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어요.
뭡니까? 사랑이 없는 수고라는 말입니다.
악한 자들이나 이단, 그리고 니골라 당도 그래요.
에베소 교인들은 이들과 싸우다 보니 정죄하는데 만 눈이 밝아졌습니다.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 일을 밝혀내고선, 만나는 사람마다 진짜인가 아닌가 시험하는 겁니다. 물론 그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그러다 보니 용서하거나 하는 사랑이 식은 겁니다.
마치 강도만난 사람을 피해가는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을 끄집어내 구원하는 것이 기독교인데, 그 죄가 싫다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조차 싫어해서 멀리 하는 꼴이 되고 말겁니다.
어쩌다 듣는 이야기. “저는 마, 9번 잘 하다가도 한번 아니다 싶으면 끝장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 있어요. 그런 사람을 어떻게 사귀겠어요? 어떻게 열 번 다 잘 할 수 있겠어요?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대합하셨습니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끝까지 사랑하라는 겁니다.
악 한자들, 이단에 빠진 사람들, 그렇다고 “나쁜 놈들”하고 뭐 묻은 것같이 취급하지 말고,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길 수 있어야지요. 그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지요. 그들을 위해기도 할 수 있어야지요. 그들을 움켜쥐고 있는 악한 영들과 싸워 그들을 구원하려고 해야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행위에 수고와  인내를 알고계십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그 믿음과 수고와 인내에 사랑이 없음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말씀하십니다.
사랑을 회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고통당하며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여전히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향한 여러분과 사랑 역시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이길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수고가 사랑의 수고이길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인내가 예수님의 이름을 사랑하기에 참고 견디는 인내이길 축원합니다.
그래서 이기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하나님의 낙원에서 먹는 여러분과 저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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