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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사랑 (엡 3: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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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정근두 목사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한 주간보내길 원하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예수께서 누구시며 왜 세상에 오셨으며, 왜 십자가에 죽음을 당했는지 알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고난주간을 앞두고 여러분과 함께 그 아들을 십자가에 우리를 위한 제물로 내어주시기까지 한 상상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살피길 원합니다.

생사간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과거, 현재, 미래, 그 어떤 영역도 영향을 주지 않는 부분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불행히도 많은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자란 환경이 잘못된 신관을 갖게 합니다. 여러 가지 대중 매체들이 하나님을 잘못 생각하게 합니다. 고통스런 경험이 때로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던져준 한마디의 말이 불안한 우리의 삶이, 때로는 우리가 지은 죄가 하나님을 바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왜곡되고 부정확한 그림을 갖게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실로 어떤 분인지 바로 알지 못합니다. 멀리 계신 분, 엄청난 무슨 힘, 아니면 우리의 잘못을 집요하게 찾는 그런 분 한건 걸렸다하면 용서가 없는 무서운 잔인한 독재자가 같은 하나님을 심지어는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당연히 결과로서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나는 하나님 같은 거 믿지 않아”하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어떤 하나님을 믿지 않는지 그분이 생각하는 하나님이란 어떤지 한번 들어 보십시오. 아마 들어 보시면 여러분도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아니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곧 바로 우리 나름의 휴대용 하나님을 만들 것입니다. 우리에게 편리한 하나님을 만들어 필요한 순간에 사용합니다. 그러나 위기가 지나가면 용도 패기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입니다. 바른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모래 위에 건축되고 생은 위기를 만나면 무너지고 맙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창수가 일면 그 하나님은 도움이 되지가 않는 것입니다.

2부 예배시간에 잠깐 유리창이 흔들리니까 모두들 설교를 듣다가 말고 거기에만 관심을 갖더라고요. 그 정도가 아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신앙이 있는 사람은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기만 한다면 사랑하게 될 것이고 신뢰하고 그들의 삶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스티커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돌보십니다” 그런 글귀를 보셨을 것입니다.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셔요.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수많은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함으로 돌보신다는 사인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고난주간을 앞두고 그 중에서 세 가지만 생각하려고 합니다.

1. 자신을 나타내시기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기로 작정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두뇌로 하나님을 알려고 드는 것은 마치 개미가 여러분을 알려고 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두뇌는 하나님을 이해할 만큼 충분한 용량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수준으로 쉽게 나타내시기로 작정하셨기에 하나님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 게 되었습니다.

정말 친밀한 관계를 갖기 원하셔서 해결의 실마리를 남겨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도록 하기위해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가장 중요한 통로 하나가 창조입니다.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밤하늘의 별들과 항성들이 배치된 것을 보면 질서의 하나님이심을 질서를 사랑하는 하나님인 것을 알 게 될 것입니다. 지구의 기울기가 조금만 틀어졌던지 태양과 지구의 거리가 조금만 달라졌더라도 우리가 타 죽었던지 얼어 죽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체구조를 보십시오. 그 정교함 때문에 오죽하면 소우주라고 인간 몸을 일컬었겠습니까? 우리 주변도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균형이 깨뜨려지면 사람은 살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자연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능력 많으신 분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힘 있게 비치는 태양이, 부는 바람이, 끊임없이 밀려들어오는 파도가, 아니 작은 원자 하나의 힘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냅니다. 해마다 불어오는 태풍과 아까처럼 조금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고 엄청 큰 지진들이라든지 그 결과로 지난번에 밀어닥친 해일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만물을 만드시되 각기 다른 모습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양성을 즐기시는 분이십니다.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여러분과 닮은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들짐승과 하늘을 나는 새 종류, 여러 가지 기묘한 곤충들, 바다 속에 있는 형형색색의 해초들과 물고기를 한번 기억해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아름다움을 사랑하십니다. 여유를 갖고 저녁노을이 물드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시면 시시각각으로 색깔이 변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은 푸른색으로 회색으로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색깔들을 배합하시고 또 우리의 눈이 그것을 보고 즐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늘도 아름답지만 땅도 아름답습니다. 산과 들 강과 바다 대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 가운데서 피어나는 한 송이 꽃조차도 참 감동입니다. 저는 꽃 한 송이만 있어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끝까지 믿을 수 있겠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또 하나님께서는 유머감각이 뛰어나신 분인 것 같아요. 여러분 동물원에 각서 오랑우탄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원숭이들을 하는 짓을 보면 우리와 많이 닮은 점이 있지요. 오죽했으면 우리를 원숭이 후손이라고 까지 생각했겠습니까?

여러분 곁에 계신 분을 한번 슬쩍 쳐다보시지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서로 그렇게 다른 사람을 부부로 만나게 하셨는지 그 하나님의 유머 감각 때문에 우리가 어떨 때는 속이 터집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자연으로부터 배울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는 제 2의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2000년 전에 사람의 몸을 입고 직접 오신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개미와 여러분이 의사소통을 해 내려면 여러분이 개미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와 의사소통을 원하셔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을 일컬어서 예수님이라고 우리는 부릅니다.

우리가 헤아리는 2005년이란 연대도 그 분 오심을 기점으로 산출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지만 역사를 갈라놓는 가장 중요한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역사가 예수를 중심으로 갈라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나는 예수님이 그렇게 훌륭한 분인 줄 몰랐어요. 여러분은 그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해마다 2004년 2005년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그분이 오시기 전과 후로 세계 역사는 나뉘어 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시므온은 이렇게 아기를 안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기예수를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32)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그 분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골 1:15) 이십니다.

예수께서 그 제자 빌립에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얼마나 대단한 선언입니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보십시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내가 문이요.. 나는 생명의 떡이로다..” 내가 생명의 물이라고 그렇게 주님이 주장하셨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런 주장을 한 예수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남은 생애와 영원한 운명을 가름하는 것입니다.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위대하신 분, 인류의 스승, 탁월한 예언자라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그렇게 소개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시는 그분을  4대 성인으로 추앙할 수 있습니까? 그의 주장대로 하나님이든지 아니면 희대의 사기꾼입니다.

혹시 자기가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인줄 알고 살았으면 그런 사람을 일컬어 우리는 정신병자라고 합니다. 알면서도 그렇게 주장했으면 사기꾼이고 거짓말쟁이고 스스로 그렇게 알고 하나님 행세하겠다고 십자가에 죽었으면 완벽한 정신병자입니다. 한 사람을 자주 속일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한 번 정도 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을 계속해서 2000년 동안 속일 수는 없습니다. 보십시오. 수억의 사람들이 이 한 주간 그 분의 고난을 기념하면서 다음 주일에는 수억의 사람들의 그 분의 부활을 모두 축하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여러분이나 제가 직접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교회 나오는 사람 중에서도 사기를 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래서 목회를 하다보면 좀 골치가 아픕니다. 온갖 폐품들이 다 들어 왔으니까 졸업이 끝날 때가지는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희대의 사기꾼을 따르는 사기를 치는 사람들입니까?  정신병자들입니까?

정신이 말짱해서 오늘도 우리가 북한에 있는 우리의 동족을 도우겠다고 지금 헌금하기로 봉투를 나눠 드리고 있습니다. 이 예배당에 속한 당원들만큼 민족을 생각하는 당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열린 우리당, 열우당이지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한나라당 정말 희망이 없지요? 그렇지요? 우리야 말로 민족의 내일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아이들을 보면 제대로 발육을 못한 것을 보면 아무리 우리가 마음이 무뎌도 아프잖아요. 그래서 한 끼 고난주간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한 끼 금식하고 도와 보자는 겁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적이 있어 우리를 창조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미국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지금 놀라고 있는 사건 하나가 있습니다. 법정에서 판사를 총으로 쏜 악당이 한집에 들어가 여자를 인질로 사로잡았습니다. 그 여자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침착하게 형편을 그대로 이야기 했습니다. 내 남편은 3년 전에 병으로 죽었고 아이 셋이나 있는데 당신이 나 까지 죽이면 이 아이들은 다 고아가 된다. 한번 생각해 보아라. 그러면서 작년에 여러분이 읽었던 ‘목적이 이끄는 삶’ 33장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을 향해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으니까 자숙하고 새 삶을 시작하라”고, 그래서 뒷날 이 남자가 자기 발로 경찰서로 찾아 간 겁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토크쇼에도 나오고 ‘목적이 이끄는 삶’이 거의 모든 가정에 다 꽂힐 만큼 그런 일이 지금 일어났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누군지를 알지 못하면 무슨 짓이든지 합니다. 한사람은 하나님의 세계를 사랑하고 있다고 알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부모가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 알고 어디 가서라도 함부로 처신하지 못하는데 하늘에 하나님이 우리를 끔찍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하게 되어있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가 우연의 산물이 아닌 것을 가르쳐 주셨어요. 우리는 목적이 있어서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깊이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을 살펴보시고 돌보아 주십니다. 아무리 실수와 결점이 많아도 여전히 우릴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길 원하십니다. 상상이 안 되는 이야기지요. 우리는 부부 사이라도 실수와 결점을 감추기를 원합니다. 상상하지 못했던 자기의 초라한 모습이 드러나면 상대방에 대한 사랑을 자신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아주 놀라운 세 가지 비유가 있지요?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이야기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을 뒤지길 멈추지 않습니다. 찾도록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두 번째 비유는 잃은 동전에 관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 여인에게서는 드라크마 하나의 가치 이상으로 의미 있는 열 개의 동전은 어쩌면 중요한 증표로서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아홉 개가 무효가 되는 겁니다. 찾도록 찾습니다. 바깥을 쓸고 방을 닦고 선반위에 먼지 있는데도 털고 카펫 밑에도 들추고 마침내 찾아서는 사방에  친구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하는 이야기가 있지요.

세 번째 이야기는  잃어버린 아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탕자의 비유라고 하지요. “제 몫을 주십시오.”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어쨌든 내가 아들로서 몫이 있지 않습니까? 내 놓으십시오. 당돌하게 나선 아들이지만 아버지는 그 청을 허락해 줍니다. 해외로 나가서 흥청망청 술과 여자로 재산 말아먹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돼지를 치는 농장에 취직했지만 돼지가 먹는 먹이조차 부러운 겁니다. 그러다가 정신이 들었어요. 아버지의 집에 가면 품꾼들이 많은데 거기서 일하는 품꾼들은 먹는 것 가지고 이렇게 굶주리지는 않는데 생각이 들어서 아버지의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들로서가 아니라 품꾼으로 돌아갑니다. 만나서 할 말까지다 몇 번씩 되풀이해봤어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이제는 아들이라고 불릴 수는 없습니다. 그냥 품꾼의 하나로 써 주십시오. 그 말을 하려고, 멀리서 오고 있는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가 뛰어 나와서 키스를 하고 포옹을 하면서 씻고 좋은 옷을 입혀라 가락지를 끼어라 살찐 송아지를 잡아라. 하면서 잔치를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자에게 양 한 마리는 소중합니다. 여인에게 그 동전하나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부모 된 여러분에게 제가 설명할 것이 무엇있습니까?

그와 같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해하는 것보다도, 여러분이 살면서 더 깨닫게 되는 것 보다 더 여러분은 하나님에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세 비유 모두 찾기까지는 쉬지 않고, 돌아오기까지는 포기하지 않는 점이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2. 우리를 구출하시기까지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인생은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에게 필요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세 살짜리 아이라도 부모가 자기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 아이가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구원자가 필요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겠습니까? 우리가 구원자가 필요하지 않았다면 이 한 주간 동안 수난을 당했겠습니까? 우리는 관공서에 한번 가서 관리들하고 대화를 하고 나면 다시는 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얼마나 한 주간동안 모욕을 받았으면 가장 그 강권한 십자가에 당신을 내어 주었겠습니까? 우리는 다 모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가 너무나 소중했기 때문에 당신 이 직접 찾아 나선 겁니다.

주님이 탄생하신 밤에 천사가 목자에게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12) 그러면 예수님이 오셔서 무엇에서부터 우리를 구원합니까?

첫째는 과거의 덫에서부터 우리를 구원합니다. 우리를 죄에서부터 구출하시를 원하십니다. 인생은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다 실수하고 불안전 합니다.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법을 어겼습니다. 우리 끼리 도토리 키 재기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볼 때는 똑같다는 겁니다.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끼리 조금 그래서 어떤 사람은 착해 보이고 어떤 사람은 덜 착해 보이는 겁니다. 우리 집사람과 옛날에 한번 싸울 때 집사람의 말을 들어보니까 다 맞는 것 같아요. 다 기억을 하는데 나는 기억을 하지 못하잖아요. 일번 이번 옛날에 뭐 첫아이를 낳을 때부터 시작해서 짝 끼는데 다 맞더라고요. 그래서 듣고 나니 할 말이 없잖아요. 이상하다 어떻게 어떤 죄인은 100점이 되고 어떤 죄인은 빵점이 나오냐.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똑 같습니다. 조금 뭐 49점 61점이 될지 모르지만 그게 그겁니다.

2.1 예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부터 구출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법을 어겼습니다. 그러면 죄의 삯을 사망입니다. 다 죽어도 마땅한 존재들인데 이 하나님의 딜레마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는데 우리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형을 시켜버리면 사랑을 나타내는 대상이 없어지는 겁니다. 그렇다고 사형을 시키지 않고 받아 주면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지는 겁니다. 어떤 사회도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그냥 봐주면 질서가 문란해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대신에 죄의 벌을 아들 예수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신 겁니다.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히 9:15) 우리가 범한 죄를 속하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성 금요일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우리 죄 값을 대신 치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들을 십자가위에 재물로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모든 지금껏 지은 죄와 앞으로 죄를 포함해서 다 용서함을 받습니다. 이 사실을 받아드리면 여러분의 모든 죄는 용서를 받습니다.

사람은 죄를 지어서 지옥에 가질 않습니다. 죄를 지어서 지옥에 간다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지옥에 가야합니다. 사람은 다만 하나님의 용서를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가는 겁니다. 고난 주간에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용서받은 기쁨을 누리시는 이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2 예수님은 우리를 무의미한 삶에서 구출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왜 예수님이 그렇게 말을 할까요? 양 같은 인생들의 생명을 두고 더 풍성히 주기 위해서 왔다고 당신이 온 것을 주장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생명을 갖고 있지 못하단 것입니다. 사람이 참으로 사는 거답게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거지들 중에 이놈의 세상 못 죽어서 산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을 때에는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만물의 영장으로 우리를 만드셨을 때는 우리를 못 죽어 사는 정도로 살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꽃보다 더 아름답게 새보다 더 명랑하게 노래하는 존재로서 사는 것이 황홀하다고 고백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는데 우리가 그 수준의 삶을 살지 못하면 하나님의 목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새 생명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한숨을 쉬고 짜증내고 불평을 하는 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수준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루가 밝아지면 가슴 벅찬 기대감이 있어야 합니다. 하루를 마감하면 감사로서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는 것이 황홀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비로소 오체를 잃은 다음에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는 것이 황홀하다고 고백하고 그리스도께서 그 삶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는 것과 그냥 존재하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알지 못하면 이일을 손대고 저 일을 해 보지만 그 일에 만족이 없습니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일을 반복합니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이 술 마시고 저 여자 다 건드리고 다 해 볼 수 있습니다.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거기에 만족하기는 여러분은 너무나 고귀한 존재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재목적을 몰라요. 그들을 여기에 두셨는지를 모릅니다.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 여자가 목적에 이끄는 삶 한 장을 읽어 주니까 인생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고 우릴 만드셨고 우리 위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2.3 예수님은 죽음의 두려움에서 우리를 구출하십니다. 예수님은 무의미한 늪에서 우리를 건져 주실 뿐만 아니라 장차 죽음이라고 하는 두려움 앞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시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어린 아이가 어두움을 무서워하듯이 모든 인생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신자에게 죽음은 종착역이 아닙니다. 어떤 사건 사고가 일어나고 어떤 재난이 우리를 덮쳐도 암 선고가 우리에게 들려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내가 여기에 있으나 거기에 가나 하나님 앞에서 큰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지요.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여유를 같고 살 수 있습니다. 죽음은 다만 옮겨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는 겁니다. 죄의 세력을 십자가에서 끝이 났고 그 결과 우리는 부활의 축제에 초대된 사람들입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그분의 생명의 축제에 우리는 초대된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 우리의 몸은 우리의 육신은 끝날 때가 오지만 그것은 결코 우리의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한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정말 상여매고 나가는 사람들의 부르는 노래 가락처럼 인생이란 얼마나 비참하고 서글픈 존재입니까? 초목은 봄이 되면 싹이 트고 꽃이 피는데 한번가고 나면 인생은 다시 돌아 올수 없다면 얼마나 인생이야 말로 덧없는 존재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죽은 것 같은 지면에 움이 트는 것처럼 죽었던 것 같은 가지에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인생은 다시 살아 날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것은 여러분과 제가 지옥고통을 면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하늘에 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늘은 완벽한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고통과 눈물 슬픔과 애통 이별과 죽음이 없는 곳입니다. 그 완벽한 곳에는 다만 완벽한 사람만이 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나는 부적합 판정을 받은 겁니다. 여러분과 나를 그 영광의 자리에 초대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만드신 방법이 특별계획이 십자가 고난주간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완벽한 삶을  살게 하시고 우리의 이런 모든 죄에 대한 잃은 포인트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신 처벌당하게 하시고 예수님이 얻은 포인트로서 우리를 천국에 초대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여러분이 한 시간에 다 이해하지 못하셔도 상관이 없습니다. 구명대가 여러분에게 던져지면 여러분은 붙잡는 것이 급합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이 구명대는 재질이 뭐냐 이것이 정말 내 생명을 버텨 줄 것인가?  그건 한가한 이야기입니다. 붙잡으면 됩니다. 붙잡고 있으면 여러분은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삶은 재난으로 치닫는 삶입니다. 지금 까지 재난으로 치달았으면 이제는 생각을 달리 해야만 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입니까?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지금까지 살았잖아요. 만족이 있으면 계속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간간히 정신이 들 때마다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지 생각이 들면 이제는 다른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삶은 재난으로 치닫는 삶입니다. 주님을 꼭 잡으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보라! 그리스도 안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3. 우리를 회복하시기까지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돈 벌고 살다가 퇴직하고 늙거나 아파서 죽고 말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지 아니했습니다. 그러기에는 인생은 너무나 존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만든 존재입니다. 만물의 영장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분을 사랑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벅찬 감격을 가지고 감사하며 찬송하며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인생을 만드셨습니다.

난해한 것은 사실입니다. 거울을 놓고 여러분의 얼굴을 비춰 보세요! 어떻게 나 같은 것을 그렇게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는지 이해가 안 되지요. 난해 하지만 그것은 진리입니다. 제 멋대로 살다가 죽도록 내버려 두기에는 인생은 너무나 존귀한 존재입니다. 존귀함을 되찾아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태신자 카드를 정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생명 새 생명 가지고 산다면 어떻게 이 일에 동참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에 아람과 전쟁이 벌어져서 성이 포위를 당해서 짐승 뼈다귀도 엄청난 비싼 값에 팔려 나가는 시절입니다. 나중에는 오늘은 우리 아이, 내일은 너의 아이를 잡아먹자고 어른들이 그렇게 했던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포위하고 있었던 군대의 아까 흔들리던 정도가 아니고 “따따따” 소리가 났는데 이건 완전히 이스라엘이 군대 전세를 내어 우리를 휩쓰는 거라고 그냥 혼비백산하여 다 도망을 가 버렸어요. 이스라엘의 문둥이들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성에 들어갔는데 먹을 것이 있습니까? 가서 항복하는 수밖에 없다고 죽는 것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인데 가서 보니까 세상에 텐트마다 먹을 것이 귀한 보물들이 가득 가득 하잖아요. 처음에는 정신없이 자기 먹고 호주머니에 넣고 숨겨두고 왔다 갔다 하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지금 정신이 있나 맞나? 우리 사람이 맞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날 성중에서 사람이 자기 자식을 삶아 먹는 이 판에 우리가 이 많은 먹을 것을 두고 아무 소식을 전하지 않고 있는 것이 맞나? 잘하는 것인가? 우리 소위가 악하도다. 하면서 성중에 가서 그 이야기를 했어요. 이스라엘이 구출 당하는  이야기가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찬송하는 것이 진짜입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진짜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 만나니까 찬송하고 감사하고 기도하고 새 삶에 들어 왔는데 100만의 영혼이 여기서 시민들이 아직도 거기에 못 들어가서 사는 것이 아니라 존재 이하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데 우리끼리만 주일날 나와서 찬송한다고 우리 정신이 있는 사람입니까? 우리가 정상적인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예수로 인해서 날마다의 삶이 달라졌다고 하면 다른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면 바뀌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올해도 이 구원의 축제를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태신자를 작성하는 데서부터 시작하고 이번 태신자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지금 작정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안 내는데 여러분은 울산 교회 교인이 맞습니까? 여러분이 울산교회 교인이라면 주님의 양떼 같으면 순종하셔야 합니다. 저는 목양하도록 온 사람이지 염소 치라고 보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태신자 카드는 여러분이 올 한 해 동안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면 기도하며 소중히 여겨야할 VIP카드입니다. 써서 내십시오. 써서 내셔서 여러 사람들이 모든 컴퓨터 동원하여 오늘오후에 다 입력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그 이름들을 띄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에 따라 살다가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고 관계를 회복시키시려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지면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십리나 멀리 있는 것 같잖아요. 그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주님은 오셨습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고 나와 너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십자가라는 새로운 상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하늘과 땅이 맞닿게 되었고 나와 네가 새로운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고후 5:18)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여러분이 주님과 더불어 화해하게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화해의 직분을 나가서 감당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누구라도 하나님은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십니다. 세상에 알려진 무신론자라도 상관치 않습니다.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간음을 했건, 낙태를 했건, 마약에 찌들어 있건, 동성애에 빠져있건 하나님은 여러분을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누구며 무엇을 했느냐에 달려 있질 않습니다. 사람은 그렇습니다. 가까운 부부관계라도 배우자가 하는 짓이 신실하지 못하고 사람답지 못하면 우리는 그 관계를 단절하려고 듭니다. 하나님은 그러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누구냐 무엇을 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시며 이 고난절에 십자가 위에서 무슨 일을 하셨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무가치하게 느껴지고 희망이라곤 없어 보입니까? 한두 번입니까? 결심해 본적이, 그래서 이제는 아무 희망을 스스로도 갖지 못합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은 여러분을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무의미한 삶의 의미를 공급할 수 있습니다. 

지금껏 어떤 종교를 믿어왔던지 어떤 생활을 해 왔던지 개의치 않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단하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앞에는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친구로 만들어 주려고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입니다.”(롬5:11, 현대어성경)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친구로 만들어 주려고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그리스도 덕분입니다.

친구보다 더한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버지 정도가 아니라 “아빠”라고 부릅니다.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러분은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면 어떻게 합니까? 만나야 되고 이야기해봐야 됩니다.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알아가고 신뢰계좌를 쌓아가야 만 됩니다. 오직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에 대해서 오해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다 아시니까 사람은 서로 친구가 되겠다고 해도 내 말이 한계가 있고 그렇지요. 내가 표현하는 것이 한계가 있으니까 드러내기 힘들고 또 저 사람도 나를 오해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교제는 그런 염려는 놓아도 됩니다.

여러분은 짝사랑에 마음 아파본 경험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는 사랑의 불이 지펴졌는데 상대방은 꿈쩍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얼마나 아픕니까? “파도야, 파도야 난 어쩌란 말이냐”님은 묵같이 꿈적도 않는데 말이야 애꿎은 파도만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 심정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그리고 여러분을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대화하고 만나고 만나 대화하고 알기로 결단하면 교제는 시작됩니다. 결혼을 어떻게 합니까? 마음 맞는 사람 두 사람이 서서 주례자가 이 사람을 당신의 남편으로 혹 아내로, 받아드리기로 작정합니까? 긴말이 필요 없더라고요“예”어떤 사람은 신앙이 좋아서 “아멘” 합니다.  한 마디로 두 사람의 결혼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당신만이 내 이 삶에서부터 건져 낼 수가 있습니다. 건져만 주시면 이제는 당신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그렇게 한 마디만 하면 예수를 구주로 섬기기로 작정하느뇨? “예 ” “아멘” 그러면 충분한 겁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 놀라운 축복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필요한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나의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로 통해서 영광가운데서 그 풍성한 것들을 너의 모든 넘치도록 주시리라고 약속합니다. 우리는 배가 고프기도 합니다. 그러지요? 저도 6시 30분에 밥을 먹고 나와서 지금 1시가 넘으니까 배가 고프네요. 주님도 배고픔을 경험하셨습니다.

영적인 필요와 정서적인 필요도 포함됩니다. 경제적인 필요도 주님은 채워주십니다. 사람사이의 모든 것도 주님은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리는 하나님은 별것 아닙니다. 나라도 그런 하나님 같으면 믿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놀라운 분이십니다. 이번 고난주간에는 복 있는 사람본문을 따라 날마다 고난의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한번 추적해 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을 못 샀다고요? 그런 사람이 있을 줄 알고 우리는 얼마나 친절하게 주일 예배 밑에 주보를 보면 날마다 묵상해야 되는 본문 을 따라가 보면 예수님이 어떻게 고난을 당하셨는지 고난의 걸음을 걸으셨는지를 거기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소한 것도 소중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제가 총각 때 받은 집사람 사진이 나오기에 찾아서 액자에 꽂아서 책상 앞에 두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기 때문에 그건 소중한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면 그 분이 우리를 위해서 어떤 고난의 발자취를 걸어가셨는지 한번쯤 살펴보아야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마음이 지금 뜬 겁니다. 세상을 향해서 정조를 다 내어 준겁니다. 여기에 와서 앉아 있지 마음은 엉뚱한 곳에 가 있는 겁니다. 이 한 주가 여러분을 위해서 내일 새벽 5시부터 시작해서 5시 아침 6시 저녁 9시30분에 수요일 밤까지 다 해서 일주일 동안 같이 기도회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태신자 이름을 부르면서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내가 하나님 알고 이처럼 기쁜 것처럼 내 친구 5명 이 들이 그냥 떠내려가는 것을 나는 볼 수가 없습니다. 이들을 하나님 건져 주십시오. 라고 우리가 부르짖으면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놀라운 개입을 하십니다. 새벽도 좋고 아침도 좋고 저녁도 좋습니다. 자신과 우리가 정한 태신자의 이름을 두고 부르짖는 기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찾는 그들도 하나님께는 매우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이 이름이 특별 기도기간에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은 놀랍게 구원의 역사를 시작 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표준 새 번역으로 한 번 더 상기시키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가는 한 주간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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