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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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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신만교 목사

(요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6)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 21: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復活)하신 예수님을 꿈에 떡 맛보듯 뵙기는 했으나 지난 며칠 간의 십자가의 악몽(惡夢)에서 깨어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베드로의 마음이 더욱 심란했습니다. 베드로는 정말 상상이 안 되는 큰 실수를 저질렀던 겁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죽기까지 주를 따르겠습니다'라고 장담을 해놓고는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던 겁니다. 

  공산당(共産黨)이 내려와서 총칼을 들이대고 예수를 부인하라고 했으면 또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조그마한 계집아이 앞에서 그처럼 비굴하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잡아뗐으니 얼마나 창피한 노릇입니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예수님을 뵙고 백배 사죄하고 결코 내 본의(本意)가 아니었노라고 고백하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고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심란(心亂)한 제자들은 이제 모든 것을 접고, 옛 생활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불안과 공포의 도시, 미움과 시기가 득실거리는 예루살렘을 속히 떠나고 싶었습니다. 성질 급한 베드로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본문 3절에
(요 21: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제자들 다수가 정든 고향, 갈릴리로 가고자했던 겁니다. 내심 예수님이 부활 후에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씀도 기억하고 있었을 겁니다. 제자들이 모두 갈릴리 해변(海邊)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이나 방치해 두었던 배를 띄웠습니다. 그물을 다시 바다에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밤을 새워 그물을 던져도 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습니다. 헛고생만 하다가 어느덧 날이 샜습니다.
  바로 그때 해변 가 쪽에서 "이보슈 친구들, 고기 좀 잡았소?", 누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는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라고 되어있습니다. "아니오,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말짱 헛탕입니다.", "그러면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려보시오. 그래서 제자들은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렸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신기하게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를 낚게 되었습니다. 몇 마리를 잡았습니까? 153마리를 잡았습니다. 모나미 볼펜의 수입니다. 축복의 수(數)가 되었습니다. 

  그때,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이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고 소리쳤습니다. "주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셨다." 베드로는 '주시라'는 말에 너무나도 깜짝 놀라면서 배에서 뛰어 내려 헤엄을 쳐서 주님 계신 곳으로 갔습니다. 
  3년 전, 처음 제자로 부름을 받던 갈릴리 호숫가에서 동이 트는 새벽에 부활하신 주님과 제자들이 방금 잡은 생선을 구어 먹으면서 아침 식사를 같이 나누고 있습니다. 꿈인가 생시(生時)인가 했을 겁니다. 식사를 마치신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주목하셨습니다. 그리고 입을 여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라고 부르지 않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그의 본명(本名)을 부르셨습니다. 베드로의 본명은 시몬입니다.
(마4: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마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베드로란 이름은 반석이란 뜻으로 시몬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신앙고백을 하였을 때 새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왜 베드로라고 부르시지 않으셨을까요? 지금은 견고하고 단단한 반석을 상징하는 베드로란 이름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반석이 푸석 돌처럼 깨어지고 말았으니까요. 그래서 베드로라는 이름 대신, 처음 제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의 이름, '요한의 아들 시몬(Simon son of John)"'이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베드로와의 관계를 회복하시고자 하십니다. 원점(原點)에서 다시 시작하시고자 하십니다. 가식이 없고 꾸밈이 없는 만남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베드로로 만나기보다 차라리 시몬으로 소박하게 인간적으로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이런 꾸밈없는 만남이 별로 없습니다. 
  그 중에 소박한 만남이 있다면 초등학교 동창회 모임일겁니다. 서로간에 가식 없는 어린 시절의 모습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초등학교 동창회에 갔더니 '야, 신만교 너 자식- 아이고 아니지 저 목사님' 막 헥깔려요.
  베드로란 이름은 너무 무겁고 부담되는 이름입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실패와 좌절을 맛보았습니다. 이제 주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과 꾸임 없는 만남을 원하십니다. 

  여러분도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직분(職分)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을 겁니다. 중직자들은 집사 때가 좋았는데, 집사들은 아무 직분 없이 교회 다니던 초신자 때가 그립다!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그때가 더 순수했다는 거지요. 여러분이 무슨 직분을 맡았든 초심(初心)을 잃지 마십시오. 첫 믿음, 첫 사랑이 퇴색되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만나시고자 하십니다. 예배의 자리는 신분(身分)으로, 직분(職分)으로 앉아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외식의 옷과 직분(職分)의 옷을 벗으십시오. 집사, 권사, 장로, 사장, 부장, 대표가 아닌 여러분이 처음 주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의 순박한 모습을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부모님 앞에 가식을 피우고 거드름을 피우는 자식은 웃기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사장입네, 교수입네, 거드름을 피우면 부모님이 속으로 웃으셔요. '어렸을 때 오줌 싸고 똥싸고 하더니 이제 많이 컸구나'하셔요. 부모님 앞에는 가식이 없어요. 그래서 가장 편한 거예요. 하나님 앞에 있을 때도 그래야 돼요.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는 겁니다. 

1.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 하시사 날 받으옵소서 
2. 큰 죄에 빠져 영 죽을 날 위해 피 흘렸으니 주 형상대로 빚으사 날 받으옵소서
후)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여러분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 거드름 피지 마세요.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의 진솔한 만남과 교제를 갖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주님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요 21:15)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님은 다른 것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보고 '너, 내 제자 맞아, 너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지? 너 참 비겁하더라'그렇게 책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단, 한가지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는 겁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Do you love me?) 라고 물으셨습니다. 비록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기는 했지만 베드로의 변함 없는 사랑을 확인하시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에 보면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출 20:6)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또한 사랑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자다"라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너도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네,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독재자들은 목숨 바쳐 충성(忠誠) 할 것은 강요하지만 목숨 바쳐 사랑하라고는 요구하지 않습니다. 왜? 그들이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만 사랑하기를 고집하십니다. 왜요?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까지 주셨거든요.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되 십자가에 피 흘리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요구하시는 겁니다. 
(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지금 주님은 여러분의 주께 향한 사랑을 확인하시고자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감정은 맛보고 경험하는 겁니다. 가령, 첫 사랑, 짝 사랑, 모성애, 부성애, 모두 경험을 통하여 아는 겁니다. 가슴으로 느끼는 겁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대하여, 예수님께 대하여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것이 중요합니다. 때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을 위하여 죽는 길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고 교회를 다닙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맛보지 못한 신앙생활은 사랑이 없는 부부생활과 같습니다.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따분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의 사랑을 반드시 경험해야합니다. 십자가 밑에서 울어본 경험이 있어야합니다. 
  아내를 잃고 혼자되어 외동딸 하나를 키운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딸이 사랑스럽습니다. 그 딸은 그 아버지의 전부(全部)였습니다. 그 딸도 아버지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대학에 들어가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목숨까지 바쳐 사랑하는 그런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를 아버지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아버지는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리쳤습니다. '도대체 나의 딸을 내 품에서 데려간 나사렛 예수는 누구인가? 그가 나보다 내 딸을 더 사랑하였단 말인가?' 그 아버지가 나중에 딸에 인도를 받아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가 고백하기를 '내가 내 딸을 사랑한 것을 예수님의 사랑에 비하면 천 분의 일, 만 분의 일도 안 되는 사랑이었다.' 

  여러분은 이 같은 주님의 사랑을 맛보았습니까? 우리는 주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을 외면해 왔습니다. 주일(主日)이면 결혼식이다, 야유회다, 친목회다, 직장 일이다 하면서 사랑하는 주님을 예배하지 못하고 주님을 등졌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족, 친척, 친구들, 동료들 때문에 주님을 외면(外面)하였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그 어떤 소유보다, 물질보다, 가족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십니까? 여러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까? 컴퓨터 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어떤 목사님이 왜 주일을 빠졌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교회에 주차할 공간이 없어서 오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마 그 분은 천국에도 못 갈 겁니다. 내가 아무리 성경을 찾아 봐도 천국(天國)에 주차장이 있다는 말은 없으니까요'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걸어서도 옵니다. 
  어떤 교회에서 여자 분이 주일예배에 강아지를 안고 왔습니다. 그래서 안내위원이 강아지를 안고 예배실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 강아지를 맡기시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강아지를 맡기면서 잘 돌봐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그분이 다시 나와서 하는 말이 불안해서 도저히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하더랍니다. 그리고 강아지를 찾아서 안고 나가더랍니다. 그 분은 주님보다 강아지를 더 사랑하는 분입니다. 강아지만큼도 대우받지 못하는 예수님은 슬퍼하십니다. 어떤 엄마들은 애기는 사랑하면서 그 애기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은 애기 만큼 사랑하지 않아요. 주님이 섭섭해 하셔요. 
  지금도 주님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김 집사야, 박 집사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베드로의 대답은 '주님이 내 마음을 아십니다'였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면 '예, 사랑합니다. 말하면 뭣합니까?' 그렇게 대답을 해야지요.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어떻게 보면 참 싱거운 대답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 말에는 '주님, 아시지 않습니까?' 더 줄이면 '다 아시면서...' '주님, 아시면서 왜 자꾸 물으십니까?' 이런 표현입니다. '주님, 차마 내 입으로 주님 사랑합니다. 소리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 아시지 않습니까?' 라는 대답입니다. 
  좀더 솔직히 표현하면 이 말 속에는 '주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 때는 정말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죽일 놈입니다. 원래 제가 그렇게 능력 없는 인간 아닙니까? 그리고 내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울었는지 아십니까? 내가 모른다고 하고, 맹세하고, 저주한 것이 절대로 본의(本意)는 아니었음을 주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주님, 비록 제가 주님을 부인하기는 했으나 주님, 저 주님 사랑합니다. 아시잖아요?'

  베드로는 차마 예수님 앞에 완전한 사랑을 고백할 수는 없었습니다. 주님을 3번씩이나 부인했던 그가 어찌 또 큰소리를 치겠습니까? 다만 "주님 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 베드로의 고백은 완전한 고백은 아니더라도 진실한 고백이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 속에는 회개(悔改)하는 마음이 동반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고백을 받으셨습니다.
  사실 따져보면 이 말이 얼마나 좋은 말인지 모릅니다. 가슴속이 답답하고 원통하고 억울해서 못내 풀지 못한 사람이 주님 앞에 나왔어요. 뭐라고 기도하면 좋을까요? 많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저 주님 앞에 엎드려서 '주님 아시지요. 내 마음 아시지요?'만 해도 다 되는 겁니다. '아시지요' 한 마디가 감사(感謝)도 되고, 회개(悔改)도 되고... 다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아시면 됐지 그 외에 더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여러분 힘들고 어려울 때 이때 베드로의 모습을 생각하세요. '주님, 아시지요.' 찬송하시고 기도하십시오. 베드로를 일으켜 세우시고 그의 상한 마음을 깨끗이 치료해 주기고 다시 쓰시기를 원하셨던 주님이 여러분도 치료해 주시고 회복(回復)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4. 주님은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간절히 부탁하셨습니다. 

  사랑에는 의무(義務)가 수반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이제 의무를 감당하라는 겁니다. 말보다는 행동(行動)으로 너의 사랑을, 너의 회개(悔改)를 보이라고 하십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처럼 사랑은 표현돼야 사랑입니다.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다. 네가 진정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내 양을 먹이고 돌봐 달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오늘 당신에게도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사랑할 수 있니? 내 양을 위해 희생(犧牲)할 수 있니?" 라고 물으십니다. 순종(順從)과 헌신(獻身)이 동반되지 않는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면 "아멘"이라고 대답은 잘 합니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그 아멘 한 것을 실천하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찰스 하워드 박사(Dr. Charles B. Howrad)는 말하기를 "당신은 예수를 믿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구원받아서 천국(天國)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당신은 예수 믿는 사람처럼 살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것 때문에 지옥(地獄)에 가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베드로에게 아주 중요한 일을 맡기셨습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겁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치라'는 겁니다. 이 순서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먼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양을 사랑하는 겁니다. 베드로가 어린 양떼를 돌아보며, 초대교회를 위해서 큰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버리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그 양떼들을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맡기십니다. 양들을 먹이고 돌봐주라고 간곡히 부탁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우리도 잃은 양을 찾는데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잃은 양을 찾는데 관심이 없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은 베드로의 위임식입니다. 실패하여 흔들리고 있는 베드로를 초대교회 지도자의 위치로 회복시키셨습니다. 베드로의 실추된 명예는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후 초대교회 지도자로서 사명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어느 날,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거센 박해를 피하여 빠져나오는데 예수님이 로마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잡고 말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때 주님은 '네가 버리고 떠나는 로마의 잃은 양들을 찾으러 간다' 베드로는 그 시로 다시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합시다. 그리고 주님이 맡겨주신 양들을 사랑합시다. 511장 찬송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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