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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암나귀들을 찾으라 (삼상 9:1-10, 골 2:12-15, 눅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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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오동 목사

1. “인간만사새옹지마(人間萬事塞翁之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사 모든 일이 돌고 돌기 때문에 좋은 일이라고 너무 좋아할 것도 없고 어려운 일이라고 해서 너무 절망할 필요도 없다는 뜻의 이야기입니다.

옛날에 중국 북쪽 변방에 한 노인이 살았습니다. 그 노인에게 말이 한 마리 있었는데 어느 날 이 말이 도망을 갔습니다. 재산목록 제 1호였던 말을 잃은 노인은 큰 상심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이 말이 다시 돌아왔는데 혼자 오지 않고 아주 좋은 다른 말 한 필을 데리고 왔습니다. 갑자기 재산이 배로 불어난 이 노인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들이 말을 타다가 잘못해서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부상으로 말미암은 노인의 아픔은 형용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호(胡)나라와 전쟁이 벌어져서 그 나라의 모든 청년들이 징집되어 전쟁터로 가게 되었는데 그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많은 젊은이들이 그 전장에서 전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노인의 아들은 낙마 부상 때문에 군에 가지 않아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새옹지마”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베냐민 지파의 기스라고 하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전개되는 이야기가 암나귀들을 잃은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기스는 아들 사울에게 잃은 암나귀들을 찾아오라고 내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많은 수고에도 불구하고 잃은 암나귀들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사무엘서 본문 4절에 “그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으로 두루 다녀보았으나 찾지 못하고 사알림 땅으로 두루 다녀보았으나 찾지 못하고 베냐민 사람의 땅으로 두루 다녀보았으나 찾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숱한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래서 몸도 마음도 지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거듭되는 어려움 가운데 뜻밖에도 그의 사환이 “하나님의 사람”을 생각해 냈습니다. 당시 속담 가운데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물으려거든 선견자를 찾아가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토록 찾지 못해서 애쓰는 잃은 암나귀들의 소재도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서 물어보면 알 것 아니냐는 생각이었습니다. 다소 유치하고 또 미신적인 생각인 것 같으나 이 곤경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떠올랐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행은 숩 땅의 한 성읍에 거하던 선지자 사무엘을 찾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이미 이이야기의 결론을 다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 사울을 만난 사무엘은 하나님의 지시로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임직하는 예식을 치르게 됩니다. 전혀 예상하지도 않았던 엄청난 일이 아주 뜻밖의 상황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흔히 사울을 일컬어서 “암나귀들을 찾다가 왕국을 찾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정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묘한 섭리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든지 잃는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입니다. 물질을 잃는 것도 그렇고, 건강을 잃는 것도 그렇습니다. 또 모처럼의 기회를 잃는 것도 역시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안타까워하고, 속상하게 되고, 낙심하게 되기도 합니다. 어떤 탤런트들은 인기를 잃고서, 또 어떤 유명인사들은 명예를 잃고서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일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무엇인가 잃었기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일들이 있었고 또 지금 그런 일을 겪고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저 사울의 사환의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내가 잃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오늘 내가 겪는 이런 고통에 개입하셔서 그것을 바꾸어 선이 되게 만들어 주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고통이라면 그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 있습니까? 불행이라면, 실패라면 그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거기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그 고난의 십자가는 마침내 부활로 이어지는 승리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에 우리 주님은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고 했습니다. 오늘 모두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로 인하여 고통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오늘 우리 모두 함께 십자가를 지고 섬기는 우리 교회도 역시 우리 짐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십시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오늘 우리들의 고난의 십자가로 하여금 마침내 승리의 십자가가 되게 바꾸어 주실 줄 믿습니다.

2. “에반젤린”이라는 장편의 서사시는 두 남녀가 결혼식을 하는 날 전쟁이 나서 쳐들어오는 바람에 서로 헤어지고 나서 한 평생 서로 상대방을 찾는 이야기로 진행이 됩니다. 어떤 분이 이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평생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것이 인생이라 그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것이 단지 인생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이야기라고도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습은 결국 인간을 찾아 나서신 이야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아담을 찾아 나선 것을 시작으로 해서 아브라함을 찾으시고, 모세를 찾으시고, 다윗을 찾아서 나서셨습니다. 그러다 다윗 같은 사람을 만나셨을 때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그렇게도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통하여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가장 극적으로 우리에게 보여 준 것이 누가복음 15장입니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이야기,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이야기, 그리고 잃은 아들을 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노다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박경리의 “토지”에 나오는 조준구라는 사람처럼 한창 사람들이 금광에 미친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패가망신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럴 때 금광업을 하던 미국 사람이 금이 쏟아져 나오니까 다른 사람의 “접근금지”를 외친 것이 바로 “no touch”였습니다. 그러나 영어를 못 알아들었던 당시 사람들은 금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는 “노터치, 노터치”라고 미친 듯이 외치니까 금덩어리가 “노다지”인 것으로 오해하게 되었다는 일화입니다.

그런데 그때뿐만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항상 무엇인가를 찾아 헤맵니다. 왜냐하면 내가 찾고 있는 거기에 행복이 있는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산 너머에 가면 그것이 있다고 소문을 듣고는 헐레벌떡 찾아갔다가 눈물을 머금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단지 어떤 유명한 시인의 말이 아니라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정말 애타게 우리를 찾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마치 잃은 양을 찾는 목자처럼 산 넘고 물 건너고, 산 가시에 찔리고, 돌부리에 넘어지면서 나를 찾아 헤매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를 찾으신 주님은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십니다. 탕자를 맞이한 아버지가 송아지를 잡고 동네 사람들을 청해서 풍악을 울리며 잔치를 베푼 그런 상황을 연상케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나 혼자서 무엇인가를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나를 찾으시는 우리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께 찾은바 되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에게 말로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이루어주십니다.

오늘 사무엘서 본문에 사실은 사울이 나귀를 찾으러 나서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은 사람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선지자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사무엘은 하나님께 기도하던 중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눈에 띈 사람이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 나선 이 길에서 일이 잘 풀려 봐야 기껏 잃은 암나귀를 찾는데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찾은바 되었을 때 그는 암나귀 따위가 아니라 왕국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신문에 사람 찾는 광고를 봅니다. 잃은 가족을 찾기도 하고, 일할 사람을 찾기도 합니다. 교회도 교역자가 공석이 되면 교역자를 초빙하는 광고를 신문에 냅니다. 그런데 가장 절실하게 사람을 찾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구원할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것을 안다면 오늘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을 향해 찾아나서는 발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믿지 않는 가족이나 이웃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잘 하는 교회나 성도가 주님께 사랑을 받습니다.

그뿐입니까?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일할 사람을 찾으십니다. 기도할 일꾼을 찾으시고, 가르칠 일꾼을 찾으시고, 봉사할 일꾼을 찾으십니다. 자기 몸을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드릴 일꾼을 찾으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핑계를 합니다. 소도 사야하고, 밭도 사야하고 장가도 가야한다고 사양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하나님의 간절한 뜻을 알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응답한다면 우리 주님은 기뻐하시고 이런 사람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3. 오늘 우리가 처음 등장하는 사울을 보면서 한 가지 미리 기억하고 지나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울의 등장은 사무엘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매우 화려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아들 못 낳는다고 제대로 사람대접 받지도 못했던 어머니 한나에게서, 그리고 그 슬픈 일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제사장에게 조차 오해받던 그 어머니 한나의 슬픈 기도 끝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어떠합니까? 오늘 사무엘상 9장 1절에는 사울의 등장에 앞서 그 가문의 족보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 기스는 베냐민 지파의 유력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울도 그 외모나 신체가 요새 말로 하면 정말 “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는 더 크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핸섬보이라 그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완벽한 조건과 함께 화려하게 등장한 사울이 그 결말이 어떠했습니까? 나중에 사울은 정신분열증에 걸리기까지 했습니다.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가 적군의 화살을 맞고 돌보는 사람 없이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적군들이 그 목을 잘라가서 승전잔치를 벌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매우 초라하게 출발했던 사무엘은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처음 사울에게 그가 기름 부어 왕으로 세웠고, 다음으로 다윗에게도 역시 그가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습니다. 사울이 왕국을 온통 초토화 시킨 반면 사무엘은 이스라엘 왕국의 기초를 든든하게 세운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한 사람 즉 사무엘은 철두철미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만 찾고 의지하고 순종했기 때문에 그 사명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 사람 즉 사울은 하나님을 떠나고, 불순종하여 자행자지했기 때문에 망햇습니다. 저 사무엘이 사울에게 한 말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론 여러분의 신앙과 직분의 시작은 중요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요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어떠합니까? 처음 감격이 아직도 있습니까? 처음 결심이 아직도 살아있습니까? 아니면 사울처럼 화려하게 출발했으나 오히려 갈수록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께서 그 사역을 시작하실 때 맨 먼저 이루신 표적이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맛본 사람들의 품평이 “처음 것보다 낫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표적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큰 줄 믿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가 갈수록 왕성하게 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처음보다 오히려 나중이 더 좋아져야 한다는 말씀인줄 믿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 있기만 하면 반드시 처음은 미약해도 나중은 심해 창대하게 되어 지는 것, 이것이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우리 주님의 명령이요 약속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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