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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건축하는 영적 망대 (눅 14: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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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 필재 목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 가운데 예수님 자신이 손으로 직접 노동하셨던 일과 깊은 관계가 있는 설교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요셉의 직업을 따라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생활철학과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세계 어디를 가도 튼튼하게 살아남는 이유는 그들의 고난 역사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성경에 나타난 대로 집시 민족으로 살았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은 사막의 끝없는 여행 1,600킬로미터의 여정을 떠돌이로 살았고, 가나안 정착 이후에도 애굽을 빈번히 넘나드는 순례자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도 끝없는 나그네 삶을 살았습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 정리된 국가 개념의 역사가 없이 방황하는 유랑 민족사를 가지고 있으며, 신약 시대에 와서도 흩어져서 살았습니다. 예수님도 태어나시자마자 애굽으로 피난을 떠나신 기록이 성경에 나타나있고, 베드로 사도는 그의 서신 첫머리에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니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는 글을 씀으로 유대 민족의 고난 역사, 집시 민족사를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난 역사는 그들로 하여금 자연히 살아남는 지혜와 자생력을 강하게 키우게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유대인들은 누구나 의무적으로 손으로 하는 기술 하나를 습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디를 가도 손만 움직이면 밥은 얻어먹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일종의 단순 기술노동 하나씩을 의무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바울 선생을 보십시오. 그는 유대 사회가 인정하는 학문적 엘리트입니다. 그의 고백에서 “나보다 잘난 사람은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나는 가말리엘 문하생이요 율법의 전문가라” 완전한 문관 출신의 출세자로, 국가를 움직이는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권 소유자가 72명인데 가장 어린 나이에 그 자리를 소유한 초특급 출세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나가는 바울도 기술 노동자임이 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대 나라나 그 일대의 문화는 유목민 문화요, 유목민들에게 절대 필요한 필수품이 천막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학문의 길을 가면서도 어려서부터 천막을 만드는 천막제조 기술을 배웠습니다. 사실 바울이 돈 없이 아시아와 유럽을 넘나들며 자비량 선교사 역할을 잘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손 기술인 장막 제조업 기술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 지방에 가서 돈이 없어서 돈을 벌려고 장막 제조 일을 찾아다니다가 업이 같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서 그들과 동업을 했던 것을 볼 수 있고, 그들의 협조를 얻어 선교비 조달을 하여 선교 활동을 훌륭하게 하는 바울 선교의 한 면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목수’라고 하는 기술 노동은 유대인들의 삶의 철학과 맞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열심히 손노동을 하셨는데 오늘 말씀은 자신이 직접 많이 하셨던 망대건축 이야기를 아주 세밀하게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유대 나라 문화 중에 중요한 것이 망대 문화입니다. 창세기에서부터 망대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망대가 없으면 살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이사야 1장 8절에도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원두밭의 상직막 같이” 이런 말이 있어서 포도원마다 망대가 있는 문화를 성경이 알려주고,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 마가복음 12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포도원마다 망대를 지었습니다. 누가복음 13잘 4절에는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이런 말씀도 나오는데, 모두 이 문화 배경의 말씀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망대 건축의 노동을 많이 하신 경험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 망대 건축에 대한 비유 설교를 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이 망대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마을마다 마을을 지키는 비상망대가 있습니다. 군사적 효과의 망대입니다. 24시간 교대로 경비를 쓰는데 이 부족 사회는 언제나 외부의 침입이 문제가 됩니다. 도둑 떼가 들이닥쳐서 마을을 불지르고 재물을 약탈할지 몰라 마을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언제나 망대를 건축합니다. 지난번에 제가 두만 강변에 700리 길을 돌 때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북한에 있는 사람들이 이 개울을 건너와서 중국 조선족들이 기르는 소들을 모조리 훔쳐 갔다고 합니다. 그러면 큰 재산이 없어지잖아요? 그게 아주 큰 골치라고 두만 강변에 사는 우리 조선족들이 말을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자꾸 발견이 되니까 이 경비자는 24시간 교대로 근무하다가 이상한 것이 나타나면 나팔을 불던가 종을 쳐서 비상을 알리고 그 소리가 나면 온 동네 사람들은 잠자다 말고 모두 전투태세로 들어가게 되는 이런 망대가 옛날에는 어느 사회나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포도원이나 목장 근처에 있는 망대는 주로 도둑이나 짐승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 한국 농촌에도 여름철이 되면 시골 경제에 큰 몫을 차지하는 농산물이 수박, 참외, 토마토, 오이 같은 과일입니다. 농촌에서는 그것이 아주 큰 부업이 됩니다. 그때 돈을 만져 봅니다. 그런데 수확기가 되면 도둑놈들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 수확이 다 된 과일들을 도둑 떼가 한번 지나가 버리면 일년 농사는 헛수고가 됩니다. 그래서 수확기 때는 밭모퉁이에 원두막이라는 망대를 짓고 불을 켜놓고 수확기 때 늘 지키는 그런 문화가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어 왔습니다. 저도 옛날 시골에서 많이 경험한 바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설교 초점은 인생이 망대 건축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예수의 제자됨의 삶을 살고자 하는 자는 이 망대 건축을 잘 계산하고 생각하면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제자의 성격은 언제나 두 가지로 구분을 합니다. 하나는 사도적 성격의 제자입니다. 이 사람들은 성직자들은 말합니다. 세상의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오직 복음 전파만을 위해서 평생을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예수님 주변에 그런 사람들로 열두 사도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봉사적 제자 성격입니다. 이들은 각기 자기의 생업에 열심히 종사하면서 필요한 부분의 주님의 제자 역할을 감당하는 자를 말합니다. 즉, 오늘날 여러분과 같은 평신도 사역자들을 말합니다. 어떤 제자가 더 우월하다든지 크다든지는 없습니다. 다만 자기 은사대로 사명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기 망대 건축을 해 갈 것인가?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거기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망대 건축비용을 예산하라”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망대 건축할 사람이 먼저 목수에게 요청을 할 거 아닙니까? “망대를 건축해 주십시오.” 그러면 비용을 계산합니다. “이 정도의 비용을 주셔야만 내가 건축하겠습니다.” 그럴 거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늘 해보셨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인생을 계산하라”라는 뜻입니다. 시편 90편 12절에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은 계산을 미리 잘 해야 훌륭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수없이 많은 인생들이 완성하지도 못한 망대 건축을 하다가 오늘 말씀과 같이 웃음거리만 될 수도 있습니다.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이 말씀은 성취 의욕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완성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내 인생에 내가 건축할 영적 망대가 무엇인가를 계산하라는 뜻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 왕자의 일을 온 세계 설교자들이 잘 사용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왕자의 가정교사였단 말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가르쳐주다가 어느 날 왕자에게 물었습니다. “왕자님! 이제 얼마 후에 왕이 되실 터인데 이 세계에서 가장 힘있는 왕이 되시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헬라를 통일하겠소.” “그래요. 헬라를 통일하실 수 있죠. 그렇게 통일을 이룬 다음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소아시아 일대를 다 정복하고 싶소.” “아, 그럼요! 알렉산더의 군대는 온 세상을 다 정복하실 수 있죠. 그런데, 그렇게 넓은 땅을 다 차지해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아,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집트까지 다 점령해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페르시아, 인도까지 내가 정복하겠고, 그러고 나서….” 자꾸 말하니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을 중단시켰습니다. “왕자님! 그래요. 온 세계를 다 점령하셨다고 합시다. 그 다음에는 뭘 하시겠습니까?” 사실 이 알렉산더는 징기스칸과 함께 세상 역사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가장 넓은 땅을 정복한 역사의 인물입니다. 그가 점령한 세계 곳곳에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는 도시가 70개나 있습니다. 20세에 왕이 되어 그가 말한 대로 헬라를 통일하고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다 점령하고 페르시아의 정복은 물론이요, 인도의 인더스 강까지 점령했습니다. “그래요. 다 점령하셨다고 합시다. 온 세상이 다 알렉산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빙그레 웃으며 “그때는 나도 죽겠지요.” 그랬단 말입니다. “아니, 그러면 그렇게 많은 고생을 하고 죽을 것 없이 그냥 편하게 살다 죽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되고, 또 그 전쟁을 하다가 대왕님도 죽을지 모르는 그 험악한 길을 그냥 안 가고 편안히 사시지 왜 그러한 인생의 탑을 쌓으시려 합니까?” 그렇게 질문하고 대답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가 인도 완전 점령을 이루지 못하고 인더스 강에서 군을 되돌려 다시 돌아와 이번에도 아라비아 원정을 나섰는데 아라비아 모래벌판에서 33세에 더 이상 건강이 버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알렉산더가 점령했던 모든 땅을 예수님은 복음으로 점령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그와 똑같이 33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건축했던 망대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이 다소 일찍 죽고 오래 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고유 권한이니까 우리가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망대 건축의 완성의 의미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나는 지금 어떤 기초 위에 내 인생의 망대를 어떻게 건축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33세에 돌아가셨으나 “다 이루었다.” 완성입니다. 바울은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완성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적을 헤아리라” 그렇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미리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이렇게 예수님이 지금 설교를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전쟁터 나가는 군인과 그 성격이 같습니다. 미국에는 한국 교인 가운데 선물 가게를 운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심방을 다녀보면 공통된 간증이 하나 있습니다. “목사님, 이 가게를 하면서 은혜 받는 게 하나 있습니다. 선물 가게에는 십자가 목걸이를 많이 팔거든요. 이 가게를 열고 지금까지 물건을 사간 사람들이 이것 좀 깎아 달라, 할인해 달라. 이런 사람들이 많은데 십자가 목걸이를 살 때는 깎아달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 마음은 누구든지 값싼 십자가는 싫은 것입니다. 사람들의 그런 마음으로 보았을 때 ‘아!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를 몸에 지니고자 하는 의미는 다 거룩하구나!’ 그것을 많이 느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몸에 십자가를 지니고 다니시죠? 왜 지니고 다니십니까? 두 가지 뜻이 있어요. 하나는 주님의 보호가 나에게 있기를 기도드리는 심정이고, 다른 하나는 ‘나도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겠습니다.’하는 이 두 가지 때문에 십자가를 지니고 다니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장식용이 아니라 영적 믿음의 표현을 그렇게 표시로 내가 하고 지니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오늘 26절에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주님의 제자 성격은 전쟁하는 군인과 같으니 적군을 헤아리라는 것입니다. 전쟁에 나가는 군인은 가장 소중한 인간 관계마저도 초월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전쟁 나가는 군인이 “아, 나는 부모님을 모셔야 하기 때문에 안 되겠습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선택의 우선권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 부모와” 부모는 하나님 다음으로 공경의 대상이 됩니다. “처자와” 처자보다 더 귀하게 취급하는 것은 세상에 누구도 없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초월한단 말입니다. “형제자매” 혈통 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의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자기 목숨까지” 아니, 목숨하고 무엇을 바꿉니까? 이런 것들은 어떤 경우에도 버릴 수 없는 소중한 관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체를 십자가라고 할 때, 그것까지 초월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나간다는 것은 생명을 거는 일이 됩니다. 로마의 전성기 역사인 그 당시에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사형을 당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진 사람은 백퍼센트 사형수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 자체가 죽으러 간다는 뜻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의 그 한번 밖에 없는 네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를 어디에다 걸겠느냐?”입니다. 33절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마지막 대목은 삶의 가치관 설정입니다. ‘알렉산더 같은 영웅은 전쟁만 하다가 끝이 났는데 나는 무엇을 하면서 내 인생 영적 망대를 완성시킬 것인가? 제자로서의 삶을 살고자 할진대 그것에다 생의 우선권을 부여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근대 스포츠 역사에서 축구로 세계에서 제일 찬양받던 사람은 브라질의 펠레 선수였습니다. 남미 선교를 가보면 그 나라에서는 펠레가 예수님 같아요. 누구든지 청소년들은 펠레같이 되는 것을 원합니다. 그가 은퇴하는 날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나는 내 인생을 축구에 걸고 살았습니다. 이 하나의 사명을 위해서 나는 살았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그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주님께 와서 인생의 가치관을 물었습니다.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될 가치관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그것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 청년이 기특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열심히 노력해서 자기 주변을 튼튼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은 성공한 바람직한 영적 청년이다.” 칭찬도 해줬습니다. 사업 성공도 했고 출세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삶의 가치관이 너무 지나치게 재물에 있는 것을 보시고 “네가 한 가지 고칠 것이 있다. 어쩌면 너의 삶의 가치관을 재물에 두고 있느냐? 그것을 변경시킬 수 있는 마음은 없느냐? 삶의 우선권은 영생이다.” 그런데 그 청년은 “그것만은 안 됩니다.”라고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주님의 제자로 삶의 방향을 정한다는 것은 우리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가치가 영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 의미를 네가 아느냐?”

우리 일상생활의 가치관을 한번 살펴봅시다. 여러분이 열심히 노력해서 얻으려는 모든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더 귀한 것을 찾고자 노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나 얻었습니다.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 나타났습니다. 그때 나는 그것을 또 얻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내 손에 이미 들려져 있는 이것을 버려야만 그것이 얻어진다고 했을 때 여러분 어떡하시겠습니까? 그때는 과감히 그것을 버려야 되잖아요? 여러분, 우리의 삶의 과정의 시작을 보세요. 어머니 뱃속에서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런데 모체로부터 나에게 연결되어 있는 생명줄이 하나 있어요. 탯줄을 통해서 생명 공급을 받아서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생명체로 성장을 한 것입니다. 이제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제는 세상에서 살아야 됩니다. 어떻게 해야 되죠? 제일 먼저 하는 작업이 뭡니까? 생명의 줄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탯줄을 끊어야 됩니다. 이제는 더 가치 있는 생명의 시간이 되었으므로 한 쪽의 줄은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내 스스로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생명이 그렇게 시작을 한단 말이죠. 주님은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을 때 한쪽의 줄을 끊어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주님은 제자들을 보실 때 최고의 가치라고 판단하는 것이 그들의 목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보다 더 큰 가치가 영생이니까 영생의 가치를 위해서는 목숨의 가치를 버려야 될 때가 올 것이다. 어떻게 하겠느냐?”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런 말들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즉, 기독교 국가들은 기독교 문화로써 처음부터 살아왔기 때문에 핍박이라는 것이 이 시대는 없습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예수님 믿는데 핍박이 있습니까? 가족 가운데 지독하게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있으면 좀 불편한 거 그 정도만 있는 것이지, 또 가문에서 다 예수를 안 믿는데 내가 신앙을 지키기가 좀 거북한 거 이런 것들뿐입니다. 오늘날의 문화는 대다수의 기독교 국가가 정부에서 신앙생활을 도와줍니다. 세금을 낼 때 내가 교회에다 이만큼 헌금했다고 증빙 서류를 내면 내 수입에서 그것을 공제함으로 세금을 덜 내게 해주는 일을 국가가 하고 있단 말입니다. 미국 같은 교회에는 비영리 단체를 만들면 거기다 투자하는 금액은 자기 일년 수입에서 그것을 다 공제해 줍니다. 그만큼 세금을 안내도 된다는 것입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비영리 단체 쪽에 내가 하고 있으니까 세금을 안내도 된다는 것입니다. 목적대로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영리단체가 얼마나 많습니까? 부시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되고 6개월쯤 있다가 교회로 편지가 왔어요.‘앞으로 정부 프로그램을 교회를 통해서 하겠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정부에서 이런 선한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교회가 한 절반을 내면 국가가 그 나머지 절반을 주어서 그 사업을 잘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해줄 테니까 합의가 잘 이루어져서 좋은 결과를 맺도록 합시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도 백악관 모임에 오라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교회가 좀 크니까 그런 연락이 왔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국가의 도움 안에 들어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누가 핍박을 하느냐 말입니다. 이런 문화권에서는 사실 목숨을 바쳐야 되는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목숨을 보호받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2,000년 역사를 살펴보면 목숨을 버려야 되었던 피 흘림의 역사였잖아요? 주님의 말씀대로 목숨까지 버렸던 제자들 때문에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확장된 것이며, 지금 우리들이 목숨을 버릴 필요가 없이 처자나 부모를 버릴 이유가 없이도 신앙생활을 아주 편안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앞서간 성도들이 그런 과정과 역사를 다 거쳐주었기 때문에 그 혜택을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적을 알고 전쟁에 임하라!” 예수님 시대에는 생명을 걸어야만 예수님을 믿었단 말입니다. “마귀의 역사는 만만치 아니하다. 그러니까 처자와 부모와 이런 인간관계에서 가장 소중한 관계까지도 초월할 수 있을 때 그때 하나님의 역사는 너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이 사도적인 삶이다.” 삶의 가치관이 오늘 말씀과 같이 정해질 때 이 땅의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되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효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평온한 시대에 잘못하면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한다고 하는 주님의 제자된 우리가 역사를 중단하고 세상의 웃음거리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것들이 모여서 인생을 논하고 신의 섭리론을 들고 나오더니 저 모양으로 끝이 나는구나.” 웃음거리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망대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면 온 동네 사람들의 생존에 위협을 받았습니다. 가장 튼튼하게 서서, 언제나 구원의 나팔을 울려야 되는 망대의 사명 “시작하였으면 완성시켜라. 망대가 망대의 역할에 충실하는 한 모든 사람들은 안심하고 자기 생업과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망대 지키는 자로, 망대를 건축하는 자로 비유하셨단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약속하는 이 망대 건축자의 행복은 무엇인가? 바로 제자됨 그 자체를 행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다는 자체, 주님이 지셨던 십자가를 나도 지고 갈 수 있다는 것에 인생의 의미를 발견해야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처럼 하나님을 믿으면 돈이 많아지든지, 온 세상에 영광을 얻게 된다든지, 출세의 마음을 너무 쓴다든지 그렇게 하면 내 제자는 능히 되지 못하리라. 도중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러셨습니다. 오늘도 교회는 세상을 향하고 종을 치고 나팔을 불고 밤새도록 망대지기가 되어 망대를 지키고 그렇게 나를 객관성 있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주님이 마련하신 안식의 세계를 기다리며 내 인생의 마지막 시간까지 도중에 그만 두지 말고 이 완성의 마침표를 찍으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이 마을에서 살았을 때 이 앞에 탄천이라는 조그만 강이 흐르잖아요? 옛날에 이쪽저쪽 동네 사람들이 탄천을 중심으로 청년들이 패싸움도 많이 했고 씨름도 많이 했고 저 강 하나가 흐르는 게 행복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여름이면 맑은 물이 흘러서 목욕도 하고, 밤에 고기를 잡는다고 하고, 겨울이면 얼음이 얼면 썰매타기, 팽이치기 등 한강까지 연결되는 탄천에서 이 양쪽 사람들이 다 재미있게 시간가는 줄도 모릅니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그곳을 행복의 터전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뛰어 놀고, 해가 넘어가도록 집에 가는 줄도 모르고 놀았습니다. 어두움이 깔리기 시작하는 시간에는 틀림없이 이곳저곳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엄마 아빠들이 자기 아들, 딸들 부르는 소리입니다. “얘들아, 들어와라! 저녁 먹어라!” 행복이 부르는 것입니다. “이제는 안식의 세계로 들어와라! 우리 모여 앉아서 따뜻한 식사를 나누면서 이야기를 하자!” 어느 날 주님은 내 인생의 어두움의 시간에 나를 부르실 것입니다. “이제는 내게로 오라! 안식의 세계에서 이제는 너와 내가 안식을 누리자! 너는 일생동안 나와 같이 내 영적 망대를 건축하고 지키기에 너무나 고생했다. 내게로 오라!” 그래서 주님은 이 약속을 주시면서 목숨까지 버리면서 하나님 사역에 헌신한 망대의 건축자와 망대지기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건축하는 망대는 중단하지 않았는가? 완성까지 갈 것인가? 오늘 이 말씀에 의해서 영혼의 결정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설교하신 망대 건축의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가 깊이 깨닫고 나는 지금 내 인생을 어떻게 계산하고 어느 지점에 있으며 중단하지 않았는가 내 영혼을 진단하는 말씀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 한 주간을 하나님이 주시는 우리 사역의 현장으로 순례의 길을 떠날 때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믿음의 승리자가 모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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