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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진실 (눅 1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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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 흥규 목사

⑴ 불의한 청지기
예수님의 비유들(PARABLES) 중에는 이해하기 힘든 비유들이 더러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눅 18: 1-8)나 '뻔뻔스러운 친구의 비유'(눅 11: 5-8) 등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비유보다 훨씬 더 난해한 비유가 있습니다. 바로 본문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the parable of the dishonest steward)입니다. 왜 이해하기가 어렵단 말입니까? 비유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부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이 부자는 아마 거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대지주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관례가 흔히 그랬듯이 이 지주는 자기가 재산을 직접 관리하지 않고 청지기에 맡긴 '부재 지주'(absentee landowner)였습니다. 주인이 현장에 없는 가운데 청지기가 재산을 도맡아 관리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청지기가 문제가 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1절 말씀에 보면 주인의 소유를 허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 NRSV는 '허비했다'는 말을 한글 그대로 'SQUANDERING,' 즉 '낭비했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허비했다'는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 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 말이 '횡령했다'--'EMBEZZLED'--는 뜻이라면 청지기는 법적으로 죄를 지은 범법자가 됩니다. 그러나 만일 이 말이 '재산 관리를 잘못했다'라고 해석을 할 경우에는 경영 능력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뜻할 것입니다.

우리 성경은 이에 대하여 정확하지 않은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서 청지기는 능력이 모자란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 관리 능력이 부족해서 주인의 재산을 허비한 것 같지는 않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주인의 재산을 고의적으로 횡령했다는 쪽이 옳은 해석이 될 것입니다.

청지기의 불성실함을 발견한 주인은 화가 나서 청지기를 해고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협박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해고를 해버렸습니다. 이제 갑자기 일자리를 잃게 된 청지기는 난감해졌습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 보면 이렇게 탄식합니다.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청지기는 그래도 재산 관리를 하는 일이었기에 천한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평생 돈만 만지고 살아온 먹물이 막노동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거지처럼 구걸해서 먹고살려니 창피한 일이었습니다. 청지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한 가지 기가 막힌 꾀를 생각해냈습니다.

우리 4-7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왕 해고될 바에는 장래에 대한 대책을 세워두자는 묘안을 낸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차례로 불렀습니다. 먼저 기름 백 말을 빚진 사람에게 50 말을 탕감해주었습니다. 50%나 되는 빚을 감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밀 100 석을 빚진 사람에게는 20 석을 탕감해서 80 석이 되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빚진 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업을 하기 위하여 자금을 빌린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기름 백 말이나 밀 백석은 가난한 사람들이 빌릴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습니다. 큰 사업을 하는 사람들만이 만질 수 있는 거액이었습니다. 어떤 학자에 따르면 청지기가 탕감해 준 두 사람의 경우 둘 다 거의 500 데나리온의 돈을 탕감받은 것에 맞먹는다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에 해당된다고 할 때 거의 2년치 임금에 해당되는 큰 돈을 각각 두 사람에게 변제해준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청지기는 왜 이렇게 했습니까? 빚진 자들이 불쌍해서 그렇게 했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들은 결코 가난해서 빚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큰 사업을 하기 위하여 자금을 빌린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 주어봤자 나중에 자기에게 돌아올 이득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청지기는 대 사업가들의 빚을 대폭 탕감해 줌으로서 장차 이들로부터 개인적인 도움을 받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해고당한 이후에 자기의 안전을 도모하려고 선심을 썼다는 말씀입니다!

⑵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한 주인
오늘 비유 말씀의 핵심은 주인의 반응에 있습니다. 사실 청지기는 누가 보더라도 불의한 사람이었습니다. 사기성이 있었습니다. 주인의 재산권을 심각하게 침해했습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주인의 재산을 축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상식적인 눈으로 볼 때 이 사람은 큰 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주인의 반응은 전혀 뜻밖입니다. 사실 오늘 제 설교 말씀의 본론은 바로 이와 같이 이해할 수 없는 주인의 태도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에 대하여 어떻게 했습니까? 여러분, 본문 8절에 있는 말씀을 우리 다같이 읽어봅시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를 꾸짖거나 법에 호소해서 중형에 처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예상 밖으로 두둔했습니다. 일을 지혜롭게 처리했다면서 극구 칭찬하기까지 했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처럼 체면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자기 체통을 구기는 일은 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고대 중동 지방의 관습으로 볼 때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를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문제를 놓고 굉장히 고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위신과 체면이 걸려 있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청지기는 이미 주인의 재산을 제멋대로 처분해버렸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만일 주인이 법과 정의의 잣대로만 일을 처리한다면 자신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먼저 자신이 데리고 있었던 청지기를 사기죄로 걸어 법정에 넘겨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중벌을 받게 해야 할 뿐 아니라 그 가족들의 생계까지도 위협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불의한 청지기가 빚을 탕감해 준 사람들 역시 법정에 세워야 할 것입니다. 물론 청지기는 해고당한 뒤에도 자신이 주인의 재산 관리를 맡은 청지기라고 하면서 빚진 자들을 속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빚을 탕감받은 사람들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청지기가 빚을 탕감하면서 공문서를 위조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빚진 사람들 역시 공모 여부를 추궁받게 될 것이 뻔합니다. 그리하여 줄줄이 심문을 받을 것은 물론이고 빚을 탕감받기 위하여 새로 작성한 빚문서는 무효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청지기와 빚진 사람들 전원을 법망(法網)에 걸어 넣을 경우 주인의 권위와 체면은 훼손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볼 때에는 당연히 법에 호소해서 응당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 옳겠지만 그 당시의 분위기는 이와 같이 사정이 좀 달랐던 것입니다.

주인이 엄청난 액수의 빚을 탕감해주었다는 소문은 아마 삽시간에 온 동네에 퍼졌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빚을 탕감받은 채무자들은 주인에 대하여 아주 감사한 마음을 품게 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세상 사람들 역시 주인이 관대한 사람이라며 칭송하고 존경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청지기와 빚을 탕감받은 사람들을 전부 다 법의 심판을 받게 해서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릴 경우 잃어버린 돈은 다시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주인의 체면은 구겨지고 말 것입니다. 주인을 존경하던 채무자들과 세상 사람들이 주인이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그런 수전노가 그런 일을 한다는 게 이상했어." 뒤에서 주인을 욕하게 될 것입니다.

주인은 자신이 쌓아 올린 위신이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보다 돈을 잃어버리는 것이 훨씬 낫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사실 주인은 재산이 엄청나게 많은 대지주였기 때문에 청지기 때문에 손해본 재산은 별 것 아니었습니다. 그리해서 마치 자기가 시켜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진 것처럼 청지기를 칭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인이 청지기와 빚을 탕감받은 채무자들을 법에 회부하지 않고 모든 것을 불문에 부친 것은 세 가지 효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첫째로, 빚을 탕감받은 사람들이 주인의 너그러움을 극구 칭송하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둘째로, 청지기가 이웃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셋째로, 청지기는 일자리를 잃고 막막해질 경우 자기의 도움으로 빚을 탕감받은 사람들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비유에서 주인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청지기는 비록 불의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세 가지를 동시에 성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만들었습니다. 둘째로, 이웃에게 도움을 줌으로서 우정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셋째로, 곤고한 날에 자기 자신이 구원받을 길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이 청지기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자기 사랑이라는 세 가지 사랑을 동시에 성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⑶ 사랑의 진실
여러분, 그러므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읽으실 때 주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의 진실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청지기가 정직했느냐? 부정직했느냐? 이것이 진실이 아닙니다. 청지기가 한 일이 합법적이었느냐? 아니면 불법적이었냐? 이것도 진실이 아닙니다. 윤리적이었는지 비윤리적이었는지도 이슈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은 무엇입니까? 주인의 관대함입니다. 청지기의 불의에도 눈을 감고 오히려 슬기로움을 칭찬하는 주인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주인공은 청지기가 아닙니다. 주인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이 비유의 제목을 '관대한 주인의 비유'라고 붙여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여러분이 이 비유 말씀을 읽을 때 '청지기의 윤리성'이라는 시각에만 붙들려 있으면 이 비유의 진실을 바로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 말씀을 하실 때 초점은 청지기의 부정직성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의 관대함과 용서였습니다. 이것은 이 비유 말씀이 기록된 눅 16장의 바로 앞 장, 즉 눅 15장에 저 유명한 세 가지 잃은 것을 되찾은 비유--'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동전의 비유,' 그리고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모두 끝없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99 마리의 양보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듯이, 잃어버린 동전 한 닢을 찾듯이, 잃어버린 아들을 찾듯이, 비윤리적이고 사기성이 있는 청지기까지도 버리지 않으시고 품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눅 15-16장은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말하려고 한다는 사실에서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함께 읽어야 할 말씀입니다!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본문 말씀의 진실은 주인의 용서와 자비입니다. 청지기의 부정직함이 아닙니다. 청지기가 불의한 방법으로 채무자들의 빚을 탕감해주었다는 사실이 초점이 아닙니다. 청지기의 잘못을 뻔히 알면서도 오히려 그 과오를 덮어주고 칭찬하는 주인의 자비로운 마음이 초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청지기의 부정직과 사기성을 칭찬하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본문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는 예수님을 많이 닮았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세리들과 교제하시면서 언제나 용서하셨습니다. 저들이 진 죄의 빚을 탕감해주시는데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볼 때에는 예수님의 행위가 주인의 재산을 축내는 청지기와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보기에는 불의하게 보이는 예수님의 행동을 오히려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빚을 탕감해준 청지기와 죄인들의 죄를 용서해주신 예수님, 여기에 일치점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생각하며 본문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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