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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과 영성 (요 2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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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형준 목사 

유대인들이 나라를 잃고 지낸 세월이 2000년이나 되지만 오늘날 열강들 틈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기들의 역사와 자기 정체감입니다. 세계 2차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6백만 명이나 되는 동족이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했을 때 유대인들은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독일을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 용서함으로 과거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잊지 않고 기억함으로 역사를 교훈 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기억해야 될 일이 참 많습니다. 만나는 사람 이름부터 그 사람에 대한 정보와 약속 등,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것 하나를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면 어떤 기억이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기억해야 할 것이 참 많은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정말 이거 하나만 기억하면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 수 있겠다고 하는 한 가지는 무엇일까요? 바울 사도는 아들 디모데에게 이 한 가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디모데야, 네가 나처럼 권위와 권세가 있고 영향력 있는 설교를 하기를 원하느냐? 네가 섬기는 교인들이 복을 받고 참 하나님의 자녀 되기를 원하느냐? 너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진정한 삶의 가치를 알게 되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이 한 가지를 기억하여라.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다. 꼭 이 한 가지를 기억하라.’ 고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8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하면 이 한절, 한마디만 붙들어도 가장 본질적인 기독교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했을까요? 이와 같이 주님의 부활이 우리 삶 전체에 주는 영향은 크고 놀랍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상황을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돌아가신 후 제자들이 모였습니다. 모여 있기는 하지만 사실 제자들 속엔 두려움과 불안, 걱정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죽인 위협의 칼날이 자기들에게도 조만간 덮쳐올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위기 앞에 선생님을 배신하고 떠나버린 깨어진 관계의 제자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제자들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홀로된 것 같은 외로움과 고독만이 가득했습니다. 오늘 성경은 제자들의 상황을 두고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마음을 닫아걸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제자들의 방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잘 생각해보면, 오늘 본문에서 나온 것처럼 우리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신 평강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의 평안이 깨지면 세상의 어떤 것을 가져도 소용없습니다. 물질이 있으면 무엇 합니까? 지식이 있으면 무엇 하며, 큰 권세가 있으면 무엇 합니까? 마음에 평안이 없고 기쁨이 없으며 불안과 두려움으로 요동친다면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매한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한 여배우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마음속에 평화를 잃고 나니 우울해지고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리면서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안을 잃어버린 인생만큼 불쌍한 인생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제자들은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운 현실 속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평안 이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요?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하루를 살아도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를 전혀 모르는 인생들은 얼마나 안됐습니까? 아직까지 숨을 쉬니 오늘을 살아간다는 인생만큼 안타까운 인생이 없지 않습니까?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은 왜 사십니까? 삶의 목적과 사명을 잃어버린 인생만큼 안타까운 인생은 없습니다.

그리고 외로움의 문제가 있습니다. 외로움의 문제는 사람이 살아있는 한 떨칠 수 없는, 일평생 같이 가야 할, 어쩌면 친구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하고 분명히 같은 이불에 누워 있는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같이 찜질 방에 갔는데도 불구하고 찬 바람이 내 마음에 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변에 수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사랑을 주고받는데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과 고독이 내 마음을 주장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의 부활로 제자들의 세 가지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난 제자들은 새로운 생명과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부활을 맞이하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주셨던 평강과 새로운 삶에 대한 사명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동일하게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이제부터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시는 것은 평강입니다. 평강이 20장에만 벌써 3번 나옵니다. 주님께서 계속 반복해서 사용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자들이 그만큼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주님께서 주신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강과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평강은 무언가를 소유하거나 성취했을 때, 일시적으로 소유하는 것이지만 주님 주신 평강은 관계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멀어졌던 우리가 화해함으로 얻게 되는 평강,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오는 평강인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은 세상이 넘볼 수 없습니다. 하늘의 평강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좁은 길도 기쁨이고 낙심과 절망의 상황에서도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 평강의 믿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평강이 제자들에게 찾아오게 되었을까요? 주님의 부활하심을 확인한 제자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힘 있는 사람, 돈 있는 사람들이 좌지우지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누가 우리를 어떻게 하려고 한다 할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확인한 제자들 속에 평강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이 원칙 없이 뒤죽박죽 힘에 의해 돈에 의해 사람들의 권력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할 때 이 땅의 평화는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컨디션에 따라 주님의 마음이 바뀐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불안할까요? 환경의 변화나 우리 마음 상태에 따라 주님의 평안이 생겼다 사라졌다 한다고 생각하면 과연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야 할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이 변해도 하나님은 역사를 당신의 선하신 원칙을 따라 다스리신다는 확신을 주님의 부활하심으로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공급자 되심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두렵고 무서운 순간에 가장 필요한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지금 당장 아무것도 없고 부족하다고 해서 낙심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이 내 하나님, 내 아버지 되시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길을 걸어가면서 먹을 양식이 없어도 염려하지 않았던 것은 메추라기와 만나로 먹이시는 하나님의 공급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적들이 나타나도 불안해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은 능히 승리하게 하실 하나님의 능력이 공급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평안함 속에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고 세상이 빼앗지도 못하는 귀한 것임을 제자들이 확인하게 되었을 때 어떤 문제 앞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용기와 힘을 갖고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대신 못 박혀 죽게 하시고 모든 죄로부터 대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시키셔서 믿는 자의 참된 주인이 되게 하시고 오늘도 우리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대로 이 땅을 이끌어 가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가 믿음으로 다시 고백하게 될 때 우리 두려움은 사라지고 불안은 물러갈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일이 하나님의 절대주권하에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의 계획을 신뢰하며 평강 가운데 우리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둘째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명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꾼에게 일감과 일터가 없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실직을 해 보거나 일감이 없어서 고통스러워 해 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히스패닉 계통이나 한국 사람들이 맥도널드 앞에 모여 있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었습니다. ‘누가 우리한테 일을 좀 주지 않는가?’하는 표정으로 대개 초조해보입니다. 이런 장면과 비슷한 장면을 한국에서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새벽에 일정한 장소에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오지 않을까?’하는 마음으로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표정은 얼마나 초조해 보이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명을 잃어버린 사람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무엇 때문에 살아야 되는가?’ 삶의 초점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삶만큼 지루하고 고달픈 것도 없을 것입니다. 고통과 어려움이 있어도 삶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은 견뎌냅니다. 힘들지 않습니다. 지치지 않습니다. 오늘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고통 중에도 참된 기쁨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적어도 자기들에게 할일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이러한 때 다시 오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께서 보내시되 무엇을 위해서 보내시는 것입니까? 하늘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였습니다. 그 전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평강이 있을찌어다”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갔을 때 환란과 어려움을 만나게 된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평강이 함께 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무엇을 위해 제자들을 보내십니까? 먼저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사도로 보내십니다. 우리가 가는 곳 마다, 사는 곳 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하나님과 원수된 심령들이 하나님과 다시 화목 하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우리를 보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원수 되어 깨지고 무너졌던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평강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여러분의 가정에 각각 보내셨지만 평화의 사람(peace maker)으로 사명을 다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썽꾸러기(trouble maker)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현재 여러분이 가족의 골칫거리는 아닙니까? 혹시 여러분이 가는 곳 마다 문제가 생기고 상황이 어려워지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이 가는 곳 마다 그 곳이 가정이든 회사든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고,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꿈과 살아갈 희망 그리고 기쁨이 살도록 하는 역할을 다 하며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새 소망을 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이웃들에게 소망의 소식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한 여자 의사가 인도의 병원으로부터 급한 부름을 받았습니다. ‘꼭 오셔서 이 지역 사람들을 진료해 주시기 바랍니다.’ 의사는 너무나 급하게 부름을 받은 나머지 언어를 공부할 틈도 얻지 못하고 통역사를 세워 진료하게 되었습니다. 여의사는 정말 정성을 다해 환자들을 진료하고 사랑하며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환자들에게 지극정성을 다한 여의사에게 환자들은 별로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의사는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하지만 얼마 뒤 그 원인을 발견해냈습니다. 바로 통역하는 사람이 얼마나 오만불손한지 의사의 말을 그대로 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엉뚱하게 통역을 하고 환자들을 내 보내서 환자들 마음을 더 괴롭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어쩌면 통역사처럼 주님이 전하라 하시는 말씀 그대로 전하지 않고, 우리 마음대로 하면서 주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지만 보냄 받은 자의 사명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정욕을 따라  삶의 현장에서 분란과 어려움, 다툼을 일으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화평의 도구로 보내셨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두고 떠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너무 두려워하니까 예수님께서 숨을 내쉬시면서 “성령을 받으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좀더 정확히 번역하면 ‘성령의 임재하심을 받아들이라’ 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후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생령이 되게 하신 장면을 생각나게 하지 않습니까? 에스겔이 보았던 환상의 골짜기, 뼈들이 앙상한 그 곳에 생기를 불어넣을 때에 큰 군대가 되었던 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나약한 내 존재 그대로인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역사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동행하시며 버리지 않으시기로,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기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성령님과 함께 주님의 일을 도모하며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우리를 고아와 과부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붙드는 자에게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일들을 얼마든지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일들을 행할 때, 주님은 용기와 힘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1989년 아르메니아에서 4일간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무려 3만 명이라는 인명피해를 입었는데 한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사건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대지진으로 초등학교가 무너진 곳에 한 아버지가 아들을 찾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이미 건물은 다 무너져 아이들은 깔리고 흔적을 찾을 수 없었으며, 구조대도 왔지만 너무 늦어 더 이상 어찌해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만은 평소 자기 아들에게 입버릇처럼 했던 ‘얘야, 아빠는 너를 끝까지 찾을 거야. 너와 끝까지 함께 할 거야. 약속할 수 있어.’ 말을 기억해 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말을 믿고 기다릴 아들을 생각하면서 아버지는 주위에서 말리는 데도 불구하고 아이가 있을만한 근처 흙더미를 파내기 시작했습니다. 벽돌 더미를 손이 다 터져라 끄집어내고 치웁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도 혼자 계속해서 치웁니다.

그러자 사람들도 딱해 보였는지 조금씩 돕기 시작합니다. 여덟 시간이 지났습니다. 열여섯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버지도 점점 지쳐갑니다. 그러나 아들에게 했던 ‘내가 끝까지 너와 함께 할 거야.’라는 약속을 지킬 아버지를 기다릴 아들을 생각하며 아버지는 조금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서른 두 시간이 지났습니다. 서른여섯 시간이 지났습니다. 서른여덟 시간이 지났을 때, 돌멩이 하나를 치우자 자기 아들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르만! 아르만!’ 아들이 안에서 대답합니다. ‘아빠, 나야, 나! 아빠 나 여기 있어. 아빠가 나 찾으러 올 줄 알았어. 여기 내 친구들도 살아있어. 내가 친구들에게 우리 아빠가 날 반드시 구하러 올 거라고 그러면 너희들도 구해주실 거라고 그랬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하신 약속, 우리를 고아와 과부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겠다 던 약속을 기억합시다. 저도 외로울 때가 참 많습니다. 힘들 때도 있고, 지칠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약속을 붙듭니다. ‘주님, 제가 혼자가 아니지요. 세상이 다 무너지고 어렵고 힘들더라도 저는 혼자가 아니지요. 고아처럼 누군가 물어볼 곳도, 기댈 곳도 없어요. 과부처럼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을 수밖에 없는 힘없는 연약한 존재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두려워말라고 하신 말씀 붙들게요.’ 이 약속을 믿고 끝까지 견디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나심을 보고 평강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왜 살아야 되는지 삶의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고 나아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 성령님이 함께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은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갈릴리의 평범한 어부에 불과하던 제자들은 전 세계 생명의 역사를 새롭게 써 가는 일에 동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마음에 새기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랑하는 믿음의 동역자 여러분, 우리 삶이 때로는 고달프고 힘들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낙담시키고 주저앉게 하려한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 오늘 여기 살아야 할 이유를 알게 하시는 하나님, 혼자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승리합시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할 영광의 그날을 바라보며, 하나님 보좌 앞에 섰을 때에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하여 아름다운 삶을 살았노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승리자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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